1927화. 밉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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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공은 익숙하게 길을 안내해 한립을 데리고 흑하성(黑河城)이라 적힌 석패가 있는 전송진 앞으로 갔다.
“태현전에서는 처음 전송진을 이용하는 것입니까? 전송진을 이용하려면 저기서 전송부를 먼저 구입해야…….”
전송진 옆에 선 보라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한립을 막고 대전 옆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기다란 돌 탁자가 놓여 있었고 열댓 명이 줄을 서서 전송부를 구입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석천공이 말없이 앞으로 나서 자금색 영패를 내보였다.
두 마리 교룡이 엉켜 있는 모습이 조각된 영패의 뒷면에는 ‘천상후’라는 그의 작호가 적혀 있었다.
“아이고, 제가 13황자 전하를 몰라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표정이 싹 달라진 자포 사내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길을 내주었고, 한립은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전송진에 올랐다.
“석 수사, 처리할 일이 많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동행해 주실 것 없으니 제가 일을 마치는 대로 찾아가지요.”
한립은 그를 따라 전송진에 오르는 석천공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우리 사이에 그게 무슨 소립니까! 천홍역 일은 한동안 손을 대기도 어렵고, 몇 년간 큰형님과 기 싸움을 하느라 저도 피곤하던 차였습니다. 함께 야양성 바깥으로 나가 바람이나 쐬다 오시지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석천공을 보고 한립은 정말 고마움을 느꼈다.
흑하상인은 대라경 존재로 그도 자령을 무사히 데리고 빠져나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는데 황자인 석천공이 함께 가면 도움이 될 터였다.
“13황자 전하, 후작 영패를 지니셔서 백년 마다 세 번 무료 전송이 가능하신데 오늘 두 분이 이용하셔서 두 번의 기회가 차감될 겁니다.”
자포 사내가 보라색 구리거울을 꺼내 들고 석천공의 영패를 비추며 공손히 안내해주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니, 어서 전송진이나 출발시키거라.”
석천공이 재촉하는 것을 보고 자포 사내가 고개를 숙인 후 하얀 영패를 꺼내 전송진을 발동했다.
파앗!
하얀빛이 두 사람을 감싸고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들은 또 다른 대전 안에 서 있었다.
전송진이 3개뿐인 대전 안에는 사람도 몇 명 없었다.
한립과 석천공은 주저 없이 대전을 빠져나와 검은 강 옆에 세워진 그리 크지 않은 성안을 살폈다.
성안에서도 강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웅거성과 비슷하게 그다지 번화한 곳은 아니었다.
“흑수역은 강과 호수가 아주 많아 이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별다른 자원도 없고 외진 곳에 있어 가장 빈곤한 구역 중 하나지요.”
석천공의 말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지영기와 마기도 야양성에 비해 희미했다.
유일하게 좋은 점은 금공금제가 없어 당장 날아올라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흑하상인은 흑수역의 어느 호수에 머무는데 이곳에서 두 달 정도 걸립니다. 마음이 급하더라도 힘을 비축해 두시지요. 흑하상인의 성격이 그리 대범하지 못해서 일이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석천공은 비행 보물 오신비사를 꺼내며 우려를 표했다.
육신을 지니고 시공간 초월을 하느라 진언보륜이나 태을신목 등의 시간도문이 절반밖에 회복되지 않아 최상의 상태는 아니었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한립은 비행 보물에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 * *
두 달이 지나 한립과 석천공은 거대한 호수 위에 도착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가 높게 치고 물안개가 자욱한 모습이 바다와 다를 바 없었다.
“천파호(千波湖)입니다. 흑하상인은 호수 깊은 곳에 있는 수궁(水宮)에 머물고요. 제가 볼 때 일단은 예의를 차려 이야기를 해보고, 나중에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대는 대라경 존재이고 또 3황자와 결맹을 한 인물이니 저도 충동적으로 움직이지는 않겠습니다.”
한립의 차분한 표정을 보고 석천공은 약간 안심했다.
“흑수역 변두리에 이른 듯한데, 이 호수를 지나면 바로 흑만역(黑蠻域)이 나오겠지요?”
“그렇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린공경이 바로 흑만역에 있었다.
두 사람은 천파호 속으로 뛰어들었고 수만 장을 내려가도록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사방에서 수압이 강해지며 한립도 약간의 답답함을 느꼈다.
석천공이 바로 물빛 구슬을 입에서 뿜어 거대한 남색 보호막을 이루어 둘을 보호하고 나서야 압박감이 사라졌다.
그렇게 수천 장을 더 내려가 호수 밑바닥에 이른 그들은 물속에 형성된 구불구불한 산맥과 거대한 협곡을 볼 수 있었다.
“이곳 지리에 익숙해 보이십니다. 와보신 적이 있는지요?”
한립은 석천공이 남색 보호막을 움직여 협곡 중 하나로 내려가는 것을 보며 물었다.
“아뇨, 셋째 형님이 흑하상인과 맹약을 맺을 때 저도 도왔었거든요. 당시 이곳 상황을 상세히 조사해 두었었습니다.”
“그랬군요.”
호수 밑바닥에 갈라진 틈으로 내려가자 물의 상태가 점점 진득해지고 색깔도 진해져서 거의 먹색에 가까워졌다.
중수와 약간 비슷한 질감이었다.
시야가 제약된 가운데 얼마나 더 내려갔을까.
앞이 탁 트이면서 거대한 지하 동굴이 나타났다.
그 거대 동굴 중심에 방원형의 거대한 섬이 있었고, 그 위로 흑수정으로 만든 누각과 정자들이 연결되어 궁전을 이루고 있었다.
가장 큰 건물 위로 흑하수궁(黑河水宮)이라는 글자가 적힌 편액이 걸려있었다.
섬 전체가 투명한 검은 빛의 장막으로 가려져 있어 외부의 물이 안으로 스며들지 못했다.
검은 보호막에 빼곡하게 새겨진 주술문자에서 강력한 금제 파동이 느껴졌다.
누군가 강제로 뚫고 들어가려 한다면 검은 보호막의 금제만으로도 태을경 수사를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우 도착했네요. 섬 전체가 거대한 태음수옥(太陰水玉)으로 이루어져 있어 흑하상인의 실력으로도 제련하는 데 아주 오래 걸렸다고 합니다. 이 자체로 강력한 마보라 할 수 있지요.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이곳에서 흑하상인과 충돌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석천공이 목소리를 낮춰서 말해주었으나 한립은 거대 섬을 보며 결연한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석천공은 바로 남색 옥패를 꺼내 무어라 중얼거리고 검은 보호막 쪽으로 던져 넣었다.
옥패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계심이 느껴지는 여인의 목소리가 섬에서 들려왔다.
“어느 수사분께서 흑하수궁을 찾아주셨는지요?”
“저는 석천공이라 합니다. 흑하상인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석천공이 앞으로 나서 자금색 영패를 보이고 웃으며 공수를 했다.
“13전하셨군요. 미리 마중 나가지 못한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여인이 목소리가 들린 뒤 한립과 석천공 앞에 검은 소용돌이가 생기며 물길이 갈라져 통로를 이루었다.
한립은 황자라는 신분이 잘 통하는 것을 보고 동행해 준 석천공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검은빛이 몰려들어 그들을 포위했지만, 곧 눈앞이 번쩍 한 다음 낯선 대청으로 이동해 있었다.
네 개의 벽이 흑수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닥에 놓인 의자와 집기들도 전부 하나의 수정으로 연결되어 있어 모든 게 조화로웠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옅은 금색 깃털 옷을 걸치고 금색 봉황비녀를 한 아름다운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 뒤로 네 명의 시녀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여인의 백옥 같은 피부와 곧게 뻗은 눈썹이 약간 매서운 인상을 풍겼다.
한립은 태을경 초기의 수행을 확인하고 상대가 흑하수궁에서 중책을 맡은 인물일 거라 예상했다.
“13황자께서 찾아주셨는데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으니 저희의 실례입니다.”
예를 올리며 말하는 깃털 옷 여인의 목소리는 아까 들려온 것과 같았다.
“저희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니 그리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부인.”
석천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깃털 옷 여인은 한립을 살피더니 어렴풋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려 수사, 이분은 흑하 선배님의 반려이신 국 부인이십니다. 여기 려 수사는 선역 출신의 제 지기로 실력이 뛰어나 부황께서도 칭찬과 상을 내리셨던 분입니다.”
석천공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한립을 소개했다.
“국 부인, 갑자기 찾아와 실례가 많습니다.”
한립이 공수를 하며 인사를 하자 국 부인도 표정을 풀고 살짝 몸을 숙였다.
“어떻게 흑하수궁까지 찾아주셨는지요?”
국 부인은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하고는 시녀들에게는 차와 과일을 올리게 했다.
“흑하 선배님께 여쭐 말씀이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궁에 계시는지요?”
“이런, 어떻게 하죠? 부군께서는 공법을 수련하시느라 폐관을 하셨습니다. 전하를 만나 뵙지 못할 듯하군요.”
국 부인은 오만한 눈빛으로 석천공에게 답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오히려 한숨을 돌렸다.
“부군이 폐관 수련을 하시는 동안 흑하수궁은 제가 관리하고 있답니다. 중대사가 아니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듯한데 말씀해 주시지요.”
“하하,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흑하수궁에 백여 년 전에 자령이라는 하계 비승자가 왔다고 들었는데 사실인지요?”
석천공이 웃으며 꺼낸 이야기에 국 부인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질투 어린 시선은 더욱 매서워졌다.
다만 그 변화는 아주 찰나의 순간 지나갔다.
“아,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게 별일은 아니고, 그 자령 수사와 려 수사가 하계에서 친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려 수사가 자령 수사가 성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보기를 청하니 부인께서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친분이 아니라 정분 아니고요? 그 여우 같은 것은 어디에서든 사내를 꼬여내는군요.”
국 부인은 공손한 석천공의 물음에 냉소를 흘리며 한립을 힐끗 쳐다보았다.
“자령은 성역에 비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 사정에 익숙하지 못할 겁니다. 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이 있다면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지요.”
한립은 무슨 일이 있었음을 눈치채고 일어나 공수를 했다.
“마음을 상하게 하다라…….”
코웃음을 친 국 부인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부인을 위해 구한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선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부디 받아주시지요.”
눈을 반짝인 한립이 손을 저어 탁자에 푸른빛에 휩싸인 네 가지 물건을 불러냈다.
남색 깃발, 흑자색 인장, 남색 얼음 결정 그리고 검은 고목이었다.
깃발과 인장은 품계가 있는 마보였고, 남색 얼음 결정과 검은 고목은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라 완성된 마보보다 더욱 강력한 법칙의 힘을 품고 있었다.
조골진인의 저물대에서 찾아낸 보물이라 석천공 앞에 내놓았다고 해도 그가 침을 흘릴 만했다.
그런데 국 부인은 그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또 코웃음을 쳤다.
“큼, 국 부인. 어찌 되었든 제 체면은 좀 생각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이 만나볼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시지요.”
한립의 얼굴이 굳은 것을 보고 석천공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13전하께서 부탁을 하시는데 제가 거절할 수 있나요. 그저 자령은 흑하수궁에 없어 불러드리고 싶어도 못 불러드린답니다.”
국 부인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없다고요? 그럼 어디에 있단 말씀입니까?”
“흑하수궁에 속한 수사가 한둘도 아니고, 그들을 나가지 못하게 잡아 두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그 여우 같은 것은 부군의 환심을 사 마음대로 수궁을 드나들 수 있으니 어디로 갔든 제가 알 리가 있나요?”
한립의 질문에 국 부인은 굳은 얼굴로 차갑게 답했다.
“조금 전 흑하 선배님께서 폐관 중이어서 국 부인께서 흑하수궁을 도맡아 관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령이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뭔데 그렇게 묻는 거죠? 13황자 전하의 체면을 생각해 선역 놈을 흑하수궁 안에 들였건만 이렇게 무례하게 군다면 쫓아내겠습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국 부인은 당장 두 손을 펼쳤다.
대청 양쪽 벽에서 검은 광채가 흘러나와 한립을 뒤덮고 소용돌이로 변해 바깥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하지만 한립이 진언보륜을 불러내 급속도로 회전시키자 수많은 금색 파문이 벌떼처럼 빠져나와 검은 소용돌이를 정지시켰다.
안색이 달라진 국 부인이 법결을 던져 넣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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