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화. 두 가지 소식
*
며칠이 흘러 이른 아침.
햇살을 받은 한립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다 떠졌다.
정염불새는 백골 갑옷을 가루로 만든 다음 정염소인으로 변해 그의 가슴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를 지킨다고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한립이 깨어나자 정염소인은 벌떡 일어나 즐거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머리가 묵직한 한립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산사태에 깔렸다가 벗어난 듯 온몸이 아프고 저려 어쩔 수가 없었다.
육신을 지닌 채로 이곳으로 시공간 초월을 했기에 이곳 세상의 대규모 제약을 받는 듯했다.
묵묵히 대주천성원공을 일으킨 그는 하얀빛에 휩싸인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정염소인이 그의 어깨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손과 발을 휘저었다.
“알겠다, 알겠어. 네가 나를 도와 갑옷을 없애주고, 여기로 데려와 지켜주었단 것이지? 고생 많았구나…….”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주위를 둘러본 한립은 아직 그가 시공간 초월 중인 것을 알고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금색 고리를 확인했다.
시간도문이 얼마 남지 않았다.
“돌아오거라.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한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염소인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한립이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어 잠시 기운을 고르는 동안 마지막 시간도문이 꺼졌다.
이어서 머리 위의 금색 고리가 몇 배로 커져 중간에서 심연과 같은 검은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한립은 강력한 흡입력에 몸이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가 머물고 있던 방에서 한립이 다시 나타났다. 눈을 깜빡인 그는 아직 유지되고 있는 진법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의식세계가 진탕이었지만 천지가 그를 구속하는 느낌이 사라져 몸은 훨씬 가뿐했다.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수정장벽이 흩어지며 암녹색 작은 병이 원형으로 돌아왔다.
한립은 병을 들어 표면의 무늬를 문질렀다.
시공간 초월 때 들린 소리는 장천병 병령의 목소리가 분명했는데, 다시 교감을 해보려 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는 장천병을 목에 걸어 의복 속에 숨기고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매만졌다. 손을 들어 옷깃을 정돈하던 그가 멈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오른손 약지에 금색 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아무런 문양도 없이 그냥 매끈하기만 한 반지는 고통을 참으며 의식으로 훑어도 아무런 파동을 감지할 수 없었다.
반지를 빼보려 해도 한 몸이라도 된 듯 빠지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시도해봐도 안 되자 그는 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기에 빼는 것은 일단 포기했다.
한립은 가부좌를 틀고 대오행환세결을 운용해 금빛 속에서 시간도문이 꺼진 진언보륜과 광음정병 등의 보물을 꺼냈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반지가 금빛으로 반짝이더니 그의 손가락을 떠나 허공에 떠오르며 거대한 고리로 변해 투명하게 변해갔다.
멈칫한 한립은 고리 안에 수십 가닥의 금색 수정실들이 돌면서 강력한 시간법칙의 힘을 발산하는 것을 보았다.
금색 반지는 시간정사들이 뭉쳐 만들어진 고리였던 것이다.
시간의 고리가 나타나자 진언보륜 등의 시간법칙 물건들이 그 안으로 날아들어 대량의 금빛을 방출했다.
동시에 목에 걸어 둔 암녹색 병도 들썩였다.
‘이제 막 돌아왔는데 또 시공간 초월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한립이 깜짝 놀라고 있는데 장천병이 그의 품속에서 몇 번 들썩이다 멈추었고, 시간 고리도 금색 반지로 변해 그의 약지로 돌아갔다.
“시간도문이 충분치 않아서?”
한립은 반지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는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시간 보물들을 거두고 의식 회복용 단약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자양난옥은 제혼을 위해 남겨둘 생각이었다.
* * *
낙가구 안, 극히 면적이 넓은 동산에 정교하게 세공된 화려한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중 휘황찬란한 첨탑 대전 안에 백발에 진한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잘생긴 청년이 하얀 요수 가죽이 깔린 금색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아래로 검은 갑옷을 입은 거구가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두원, 확실한 소식이냐?”
청년이 인상을 찡그리고 물었다.
“확실합니다.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두원이라 불린 마족 거구가 답했다.
“그리 고생하며 쫓았는데 그런 곳에 있었다니. 하긴 그러니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겠지.”
“전하께서 병력을 내어주신다면 제가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반드시 물건을 갖고 돌아오겠습니다.”
“소식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이 일은 내 따로 생각이 있다.”
“전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으나 이 일에 직접 나서실 생각입니까? 전하처럼 귀한 분이 그곳의 상황도 아직 모르는데…….”
두원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내가 대라경에 이를 수 있을지 결정지어줄 중요한 물건이다. 다른 일은 모두 미뤄두고 이 일에 집중하도록.”
청년은 손을 저어 두원의 말을 끊고 명을 내렸다.
“예,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두원이 포권을 하고 물러났다.
* * *
또 몇 해가 지나갔다.
밀실 안의 한립은 양손에 수결을 맺고 수련 중이었다. 진언보륜 등의 시간 보물들이 떠올라 절반 정도 회복해 시간도문을 반짝였다.
이전에 비하면 시간도문의 회복 속도가 무척 빨라졌다.
손가락에 낀 금색 반지는 속세의 물건처럼 여전히 아무런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간 의식손상을 회복하면서 대오행환세결 수련에도 진보가 있었고, 시간고리도 처음보다 능숙하게 조종할 수 있었다.
이제는 시간고리를 격발하지 않으면서 대오행환세결만 발동할 수 있었다.
순간 표정이 달라진 한립은 밀실을 나서 정당으로 향했다. 정당 안을 하얀빛이 파리처럼 날아다니며 웅웅 거리고 있었다.
하얀빛을 잡은 한립이 전음부를 바스러트리자 그 안의 소식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그가 눈썹을 끌어올려 장정원 밖으로 나가니 백발의 석천공이 뒤짐을 쥐고 서 있었다.
“려 수사, 열심히도 수련하십니다.”
“별말씀을요.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한립은 석천공과 마주 웃으며 그를 안으로 청했다. 그들은 정당의 원형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았다.
“천홍역으로 가시지 않고 어찌 제 거처로 오신 겁니까?”
“한 구역을 다스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각 방면에서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개도 아니고, 큰형님이 또 암암리에 수를 써서 천홍역을 장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보다 오늘 찾아온 것은 려 수사에게 알려줄 소식이 두 가지가 있어섭니다.”
“무엇입니까?”
석천공이 진지한 얼굴을 하자 한립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일단 부탁하셨던 ‘적린공경’에 대한 소식입니다.”
“무언가 찾으셨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저도 처음 들어 보는 장소라 셋째 형님에게도 묻고 수많은 고서를 뒤져서 겨우 알아냈습니다. 성역의 구석에 있는 곳인데 야양경처럼 아예 또 다른 계면 공간으로 이루어진 위험지대라 하더군요.”
“위험지대라고요?”
“적린공경 내에는 천지영기도 없고 마기도 없다는군요. 그 안의 상황을 자세히는 몰라도 아주 특수한 지역이라 할 수 있지요. 오래전 죄인들의 유배지로 쓰이다가 수십만 년 동안 방치되었다고 합니다.”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하하, 그리 물으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그것도 알아보지 않고 왔겠습니까?”
석천공은 지도가 담긴 옥간을 꺼내 건넸다.
“적린공경을 왜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한 곳이니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다른 소식은 무엇입니까?”
“자령이라는 비승 수사에 관한 것이에요.”
석천공은 슬쩍 놀리는 표정을 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게 사실입니까!”
한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에 희색이 어렸다. 석천공에게 부탁은 했지만 찾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진선계에서 비승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자령도 비승할 만한 수행에 이르렀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셋째 형님께서 수하들을 보내 성역의 비승자들을 조사해 주셨고, 흑수역(黑水域) 비승대에서 백여 년 전에 비승한 여 수사의 모습이 려 수사께서 말씀하신 자령 수사와 흡사했다는군요. 가히 천하절색이라 할 수 있다 합니다!”
석천공은 손바닥 크기의 푸른 구슬을 꺼내 법결을 던져 넣었다.
웅.
구슬에 부드러운 빛이 흐르고 검은 치마를 입고 흑단 같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미인의 모습이 어렸다.
표정이 냉랭하기는 해도 자령이 틀림없었다.
한립은 익숙하면서도 약간은 낯설은 그녀의 모습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어휴, 려 형 괜찮으신 겁니까?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꽤 되었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 봅니다. 과거에 이 미인과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셨을 것 같은데요?”
“제가 찾던 사람이 맞습니다. 지금 어디 있다고 합니까?”
한립은 석천공이 대놓고 놀리는 데도 민망해하는 기색 없이 물었다.
“잠깐만 숨을 고르세요. 음, 성역에서도 하계에서 비승한 수사들은 그 잠재력을 높게 사서 여러 세력에서 눈독을 들입니다. 게다가 자령 선자는 미색이 뛰어난 데다 자질도 비범해서 흑수역의 대라급 존재가 휘하로 받아들였다는군요.”
석천공은 약간 뜸을 들이다 답했다.
“그 대라경 수사에게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한립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그게 사내란 다 그렇지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대라경 수행을 지니고도 세속적인 욕망에 초연해지지 못했는지, 또 자령 선자의 자태는 성역에서도 드문 미모라…….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시겠지요?”
석천공은 손을 휘적거리다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심하세요. 흑하상인과 셋째 형님의 사이가 나쁘지 않습니다. 결맹 관계라고도 볼 수 있고요. 조사를 마친 셋째 형님이 바로 서신을 보내 경고하였는데 아직 답이 없다고 합니다.”
그를 따라 일어난 석천공이 빠르게 사정을 설명했다.
한립은 한마디 말도 없이 3황자 저택을 나서서 정문 밖에 대기하던 마차에 올랐다. 석천공이 그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었다.
“야양성에 각지로 통하는 전송진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흑수역으로 가는 것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저와 가시지요.”
석천공은 한숨을 내쉬며 훌쩍 마치에 올랐다.
두 사람이 탄 마차는 반 시진 만에 낙가구의 거대한 궁전 앞에 멈추었다.
새까만 벽에 ‘태현전(太玄殿)’이라 적힌 금색 편액이 걸려있었고 그 앞에 적잖은 마차들이 서 있었다.
“야양성 안의 전송전은 총 두 곳입니다. 그중 한 곳이 태현전인데 황실이나 귀인들이 이용하지요. 다른 곳은 마가구의 태월전(太月殿)으로 일반 수사들이나 상인들이 이용하는 곳입니다. 규모로 보았을 때 태현전이 훨씬 크지요.”
석천공은 오는 내내 말이 없는 한립을 대신해 화제를 찾으며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석 수사,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한립은 심호흡을 하고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럼 다행이고요.”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태현전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옥돌 바닥에 벽과 지붕에는 커다란 하얀 수정들이 박혀 내부를 환하게 비추었다.
지붕을 받친 기둥들 외에 바닥에 하얀 돌 제단들이 백여 개 설치되어 있었고 각각 전송진이 웅웅 거리면서 부드러운 빛을 뿜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