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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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리 밖, 검은 해역 위에 흑록색 신형이 떠서 파도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흑록색 장포를 입은 조골진인이었다.
지금 그의 머리 위에는 주먹 크기의 보라색 구슬이 떠서 그 연기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혼백을 보호하고 배양하는 9품 선기였다.
“의식 공격으로 노부에게 중상을 입히다니, 다음번에 만나면 잔인하게 죽여주고 말 것…….”
조골진인은 어두운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런데 그가 말을 마치기 전에 멀리서 둔광이 날아들어 익숙한 얼굴을 드러냈다.
모골이 송연해진 조골진인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어찌 네 놈이!”
“과연 그랬어! 하하하!”
한립은 오래간만에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그가 죽이기 전에 조골진인에게 중상을 입혀 놓은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니라 시공간 초월을 해서 돌아온 그 자신이었다.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한립을 본 조골진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무언가 굉장히 불편한 느낌이었는데 콕 찝어서 무엇이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간도 크구나. 석천공을 빼돌리고 혼자 노부를 죽이러 돌아온 것이냐?”
“아직 의식이 온전히 나아지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다면 네가 어쩔 것이냐? 너도 비술을 쓰느라 의식의 힘을 소모해 다시는 그 수를 쓸 수 없을 텐데!”
아까와 분위기가 확 달라진 한립을 보고 조골진인은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제가 다른 수법이 있다면 어쩌시려고요?”
한립은 우습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조골진인은 한기가 들었지만 대라경 수사인 자신이 겨우 태을경 수사 앞에서 겁먹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헛수작 부리지 마라!”
마음을 가라앉힌 조골진인이 하얀빛을 퍼트려 고골영역을 펼치고 8개의 백골경관을 불러냈다.
조골진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탁한 기운이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이에 한립은 가볍게 손바닥을 뒤집어 유리 등잔을 불러냈다.
“그건 서혼정! 네가 어떻게?”
“선배님도 아는 보물이었군요. 그럼 어떻게 방어하면 되는지도 아시겠습니다?”
한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놀란 조골진인을 향해 유리 등잔을 날려 보냈다. 그걸 본 조골진인이 바로 자금색 부적 두 장을 꺼내 자신의 이마에 붙였다.
화륵!
자금색 부적이 불타 연기로 사라지고, 그의 이마에 복잡한 문양이 생겨났다.
한립은 미간을 좁혔지만 수결을 맺는 데 집중했다.
서혼정은 조골진인을 백 장 앞두고 보라색과 푸른색이 교차하는 기이한 불 구렁이를 내뿜었다.
흐릿한 자청색 불꽃이 등잔에 솟고 그걸 바라보는 조골진인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조골진인의 의식세계에 거대한 유리 등잔 허상이 나타났고 그 아래 조각된 네 마리 짐승이 입을 벌렸다.
막 안정을 찾아가던 조골진인의 의식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한립은 청죽봉운검 한 자루를 불러내 조골진인이 넋을 잃었을 때 앞으로 튀어 나갔다.
푸른 장검에서 금색 뇌전이 번쩍 튀어나와 하늘을 수평으로 가르고 채찍처럼 조골진인을 갈랐다.
치지직.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날카로운 뇌전이 그를 때리기 전에 조골진인의 이마에서 자금색 문양이 강력한 의식의 힘을 발산해 의식세계의 등잔 허상을 밀어냈다.
펑!
파도처럼 밀려드는 의식의 힘에도 등잔 허상은 부서지지 않았지만, 그 파도가 얼어붙자 같이 봉인되고 말았다.
그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 검을 들고 달려들던 한립은 급히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 뒤로 물러나려 했다.
이때 조골진인의 의복이 벌어지면서 가슴에서 음산한 뼈 칼이 튀어나왔다.
칼끝에 하얀 물방울이 한 방울 맺혀 있는 검이었다.
‘이런!’
고공에 뜬 한립은 하얀 물방울을 보고 표정이 달라졌다.
조골진인의 법칙의 힘을 응축한 물방울을 제대로 맞으면 중상을 피할 수 없을 듯했다.
본체로 시공간 초월을 한 탓에 여기서 다치거나 죽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힐끗 위쪽의 시간도문을 본 한립은 이번 시공간 초월이 이전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골진인은 서혼정을 통제하고 수결을 맺어 백골경관으로 서혼정 본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때 한립은 보물과의 감응이 단절된 것을 느꼈다.
“자청쌍매의 서혼정을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다만 이미 노부에게 봉인 당했다. 이제 어쩔 것이냐!”
조골진인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물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안 되겠어.’
얼굴을 굳힌 한립이 수결을 맺어 청죽봉운검 18자루를 동시에 날려 보냈다.
주변에 뇌전이 촤르륵 흐르는데 금색 뇌전 연못에서 정련한 이후 청죽봉운검들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 연계가 강해지고 검 자체의 영성도 강해져 있었다.
18자루의 청죽봉운검에 새겨진 주술문양이 빛을 발하고 푸른 만고검기와 금빛의 뇌전이 엉켜 거대한 금색 빛구슬을 만들어냈다.
금색 빛구슬은 백골경관을 둘러싼 어둑한 화염을 뚫고 한립을 향해 길을 내고 있었다.
쉭!
그때 아주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고 한립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조골진인의 가슴에서 튀어나온 기괴한 검이 흐릿한 잔영으로 변해 백골경관의 틈에서 튀어나와 그의 허리를 찌르려 하고 있었다.
칼끝에 맺힌 하얀 물방울 탓인지 그 속도가 너무 빨라 한립은 진언보륜을 역전해도 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그는 비취색 호리병을 꺼내 빛을 반짝였다.
핑!
녹색 광선이 쏘아져 나가 우윳빛 물방울과 부딪쳤다.
쿠콰쾅!
하얀 뼈 검은 훼멸법칙의 기운을 품은 녹색 광선을 뚫고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충돌이 그에게 대처할 귀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 순간, 한립의 등 뒤에서 진언보륜이 떠올라 대량의 금빛을 방출했다.
주변의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고 우윳빛 물방울도 예외는 아니라 속도가 느려졌다.
한립은 청죽봉운검을 휘리릭 돌려 안에 담긴 뇌전의 힘을 폭발하면서 힘껏 앞으로 뻗었다.
콰르르.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고 대량의 금빛 뇌전이 퍼져나갔다.
자욱하게 하얀 김이 서린 공간에서 속도가 느려진 백골 검이 바르르 떨며 튕겨 나갔다.
그걸 본 한립은 진언보륜을 회수하고 다시 한 번 현천 호리병박을 내밀었다.
호리병 입구에서 녹색 소용돌이가 나타나 강력한 흡입력으로 백골 검을 빨아들였다. 멀리서 눈을 부릅뜬 조골진인이 맹렬히 수결을 맺어 고골영역을 진동시켰다.
8개의 백골경관 지붕에서 거대 백골의 눈알이 녹색 빛을 뿜었고, 고골영역도 점점 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다니 태을초기의 옥선치고는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래봤자 수행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조골진인이 허공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며 말했다.
“아직 의식 비술을 쓸 힘이 남아 있는데,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셔도 되겠습니까?”
한립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묻자 조골진인도 우뚝 멈춰 섰다.
“서혼정은 봉인되었고, 의식 소모가 극심한 게 분명한 수정검도 이미 써버렸다. 공연히 나를 겁박하지 말거라.”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닌지 직접 시험해 보시지요.”
한립은 양손에 검과 현천호리병을 들고 씩 웃어 보였다.
“좋다!”
냉소를 흘린 조골진인은 전신에서 새하얀 빛을 터트렸다.
그러자 의복이 갈기갈기 찢기고 백골이 피부를 뚫고 나와 거대한 백골 거마(巨魔)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에 수행도 증폭되어 고골영역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었다.
한립도 신중하게 사태를 살폈다.
쿵! 쿵! 쿵……!
거대해진 조골진인의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고, 미간에서는 금색 주술문자를 번쩍이면서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립의 진언보륜이 방출한 금색 광선도 조골진인의 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조골진인의 다섯 손가락이 하얀 낫처럼 번뜩이며 허공을 가르자 한립은 눈빛이 달라지며 양손을 뻗었다.
청죽봉운검 다섯 자루가 뻗어 나가 대량의 금빛을 뿌리면서 백골 낫들과 부딪쳤고, 그는 허공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챙! 챙! 챙…….
다섯 번의 날카로운 충돌음이 들리고 청죽봉운검들은 백골 거마의 일격을 막고는 빛을 잃고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다.
검을 거둘 시간도 없이 수백 장 거리로 물러나는 한립 뒤로 바람 소리가 울렸다.
8개의 백골경관 지붕의 거대 해골 머리들이 분분히 입을 벌리고 하얀색 뼈 사슬을 분출했다.
한립이 역전진륜 신통을 사용해 피하려는데 두 팔이 얼어붙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수결을 맺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두 팔꿈치에 하얀 뼈 갑옷이 생겨나 그가 관절을 굽히지 못하도록 방해했고, 그것은 점점 손목과 어깨 쪽으로 퍼져나갔다.
“대체 언제……. 설마 그 하얀 액체가?”
미간을 좁힌 한립은 두 발로 쿵! 허공을 박차고 올라 전신에 금빛을 폭발해 뇌전으로 하얀 뼈 갑옷을 공격했다.
하지만 금빛이 가신 후에도 뼈 갑옷은 흩어지지 않았고 점점 더 많은 곳을 뒤덮고 있었다.
그가 다른 방법을 쓰기도 전에 8개의 백골 사슬들이 들이닥쳐 두 다리와 두 팔을 휘감고 그를 포박했다.
백골에 휘감긴 한립은 강력한 힘에 뼈마디가 삐거덕거렸다.
현선의 육체를 지니고 태을옥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면 벌써 뼈가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동시에 백골경관 지붕의 해골 머리들이 두 눈에서 녹색 화염을 뿜어 백골 사슬을 타고 한립을 향해 흘러내렸다.
‘안 돼!’
녹색 화염은 다가올수록 뜨거워지기보다는 주변 공기가 서늘해졌는데, 한립은 화염이 몸에 닿는 순간 안색이 크게 변했다.
녹색 화염이 그의 육신이나 혼백을 공격하지 않고 직접 골격을 불사른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립은 뼈가 아주 작은 벌레들에게 갉아 먹힌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르륵.
그가 소환하지 않았는데도 몸에 은빛이 번지고 작열하는 은색 화염이 흘러나와 녹색 화염을 밀어냈다.
안 그래도 강력하던 정염 불새의 화염은 칠채화단사 3알을 연화시키고는 더욱 세져서 한립을 보호한 뒤에 일부분은 녹색 화염을 쫓으며 거꾸로 잠식하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두 화염이 충돌하는 곳에서 연기가 치솟더니 녹색 화염이 뒤로 물러났다.
정염불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백골 사슬을 따라 녹색 화염을 끈질기게 추격했다.
조골진인이 변신한 백골 거마가 앞으로 나서며 정염불새를 보다 한립을 쳐다보았다.
태을옥선 밖에 안 되는 인족 주제에 지닌 방법이 무궁무진해서 해치우려 할 때마다 변수가 생겨났다.
그는 칼날 같은 다섯 손가락을 펼쳐 한립을 향해 찔렀다.
그때 두 팔은 물론이고 복부까지 하얀 뼈 갑옷에 갇힌 한립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립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떠올랐지만 두 눈만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건, 뭔가 이상한데…….”
조골진인은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손을 거두려 했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손가락뼈들이 한립의 몸을 꿰뚫기 전에 그의 두 눈에서 번득 빛이 일어난 것이다. 아주 익숙한 장면이었다!
“겨우 태을경 수사의 의식의 힘으로 어떻게!”
대경실색한 조골진인이 소리를 질렀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반투명한 수정검이 주술문자를 반짝거리면서 한립의 미간에서 튀어나와 조골진인의 손가락뼈를 관통해 미간으로 날아드는 중이었다.
푹!
‘아냐……. 이건 말도 안 돼!’
조골진인은 빠르게 의식의 힘이 소모돼 시선이 흐릿해지고 거대한 몸도 작아져 원래대로 돌아갔다.
8개의 백골경관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녹색 화염과 뼈 사슬들을 회수했다.
더는 집어삼킬 화염이 없어지자 정염불새가 은색 새의 모습으로 돌아가 한립에게 돌아왔다.
가까이 다가가 한립의 두 팔과 배를 백골 갑옷이 속박하고 있는 것을 본 정염불새는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은색 불 구슬처럼 변해 갑옷과 충돌했다.
“크아아악!”
두 눈에 핏발이 선 조골진인이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놓은 것처럼 표정이 괴상해진 조골진인은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러자 의식세계에 손바닥 허상이 나타나 반투명한 의식거검을 때려 흩어버렸다.
다음 순간, 조골진인의 뒤통수에서 빠져나온 수정빛이 한립의 미간으로 되돌아갔다.
조골진인은 노망난 노인네처럼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날아올라 달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가버리고 고골영역과 백골경관이 사라져갔다.
수정빛을 회수한 한립도 막대한 의식 소모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겨우 보물들만을 거둬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정염불새가 혼절한 주인을 받쳐 들고 근처의 섬으로 데려간 뒤, 그의 주변에서 활활 타올랐다.
시간이 흘러 그의 뼈 갑옷들이 드디어 타들어가 거미줄처럼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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