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화. 육신
*
“축하한다, 열셋째 아우! 야양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부황의 총애를 듬뿍 받아 후작 작위에 천홍역을 봉토로 받다니 내 아우를 대신해 아주 기쁘구나!”
대전 바깥으로 나온 석참풍이 석천공 등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에 다른 이들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고 석경연과 석명진만이 남아 합류했다.
“총애라뇨, 부황께서 큰형님을 아끼시는 것만 하겠습니까. 단약과 갑옷 보검을 받을 때 아주 부러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쉽구나, 부황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그런 물건들이야 아끼는 아우에게 죄다 내주었을 텐데.”
석참풍이 하하 웃는 것을 보고 석천공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더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려 수사의 실력에 감탄하던 차인데 시간이 나면 언제 내 저택에도 한 번 다녀가게.”
석참풍이 그 옆의 한립에게도 한마디를 했다. 한립은 그러겠다는 말과 함께 그저 공수를 했다.
그 모습에 석참풍이 호탕하게 웃으며 소매를 털자 그 옆의 8황자와 10황자까지 눈앞에서 사라져 먼 곳에서 나타났다.
다시 한 번 그가 소매를 펄럭였을 때는 이미 시야 밖에 있었다.
한립은 석참풍의 축지법과 비슷한 신통에서 미약하게 공간 파동을 감지하고 동공을 수축했다.
석천공에 비해 고명한 실력이었다.
“큰형님의 경공명(鏡空明)이 또 진보했구나.”
석파공이 웃으며 하는 말에 석천공이 미간을 좁혔다.
“열셋째 아우, 살쇠로 오랫동안 고생을 하더니 진선계에 다녀오고 수행이 부쩍 늘어 다행이야. 누님으로서 이리 기쁠 수가 없구나. 나도 일이 바쁘지 않다면 진선계에 가보고 싶을 정도야.”
석경연이 다가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 것 아닌 걸요, 다섯째 누님.”
석천공은 공수를 하긴 했지만 표정은 냉담했다.
석경연은 잔잔히 웃는 얼굴로 한립에게 눈짓을 하고 사뿐사뿐 다가왔다.
흠칫 놀란 한립은 그녀에게 대한 경계심을 높였다.
기이한 향기가 훅 퍼져 사람을 쥐도 새도 모르게 취하게 했고, 겨우 세 걸음을 남기고 가까이 멈춰서는 혼을 빨아들일 것 같은 매혹적인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어서였다.
“5공주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인상을 찌푸린 한립이 먼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간격을 유지했다.
“할 말은 없고, 그냥 화경과 조골진인을 죽인 자를 잘 봐두려고 하네.”
석경연은 그냥 빙긋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향이 점차 진해져 사방팔방에서 벌떼처럼 그를 노리고 몰려들었다.
한립은 코와 입 그리고 전신의 선규를 막고 시간법칙의 힘을 압축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향기는 시간법칙마저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서 금방 꽃들이 만발한 싱그러운 초원에 누워있는 것처럼 의식이 몽롱해졌다.
한립은 눈앞의 석경연이 아주 가깝게 느껴지고 꿈에 그리던 여인이라도 되는 듯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곧 그의 의식에서 방대한 힘이 흘러나와 격한 파도처럼 향기를 흩어버리고 동시에 소매 속에서 녹색 실들이 번득 빠져나와 전신을 감싼 향기들을 흡수해 사라졌다.
석경연의 아름다운 눈에 이채가 어렸다.
“큼, 다섯째 누이. 아직 성황궁인데 언행을 주의하는 것이 좋겠지?”
석파공이 헛기침을 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셋째 오라버니? ……난 그저 반가운 마음에 려 수사와 인사나 나눈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
“5공주의 ‘인사’를 평범한 사람은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향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려 수사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한가하면 내가 머무는 궁으로 와서 선역에 대한 이야기나 들려주면 좋겠군. 나도 선역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야.”
석경연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셋째 형님, 열셋째 아우, 저도 가보겠습니다.”
동그란 얼굴 청년이 공수를 하고 냉랭히 한립을 훑은 다음 그녀를 따라갔다.
“려 수사, 다섯째 누이의 천향몽귀(天香夢歸)는 그 위력이 위협적인데 괜찮습니까?”
석파공이 한립을 향해 물었다.
“저는 괜찮으니 안심하시지요.”
“그럼 다행입니다. 우리도 돌아가지요.”
한립은 석파공을 따라 마차에 오른 뒤 낙형공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뒤 혈적후가 물러나고 한립은 석천공의 눈짓에 그를 따라 석파공과 함께 대청으로 들어갔다.
“셋째 형님, 부황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째서 제가 습격받은 일을 거론하지 못하게 하시는지요. 그곳에 모인 이들도 그들이 얼마나 흉악한 인물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석천공이 앉기도 전에 불만을 토로했다.
“큰형님과 다섯째 누이가 관련된 사건이니 공론화하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동시에 네게 큰 상을 내려서 보상을 하시지 않았더냐. 천홍역을 봉토로 내리신 것에는 나도 놀랐을 정도였다.”
석파공이 자리에 앉아 차분히 말했다.
“하긴 그래요! 천홍역이 있으면 이제 우리 세력도 크게 늘어난 셈이니까 큰형님을 이길 수 있겠어요.”
석천공이 앉으며 한립에게 옆자리를 권했고, 시종들이 들어와 그들을 위해 차를 들고 들어왔다.
“너무 좋아하지 말거라. 앞으로 네가 모두의 표적이 될지 모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어엿한 태을경 수사입니다. 아무렇게나 꼬집고 비틀어도 되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제게는 셋째 형님이 있지 않습니까?”
석천공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다졌다.
“대놓고 날아드는 칼과 창은 피해도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비수는 피하기 어려운 법니다. 아, 려 수사, 오늘 대제사 일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큰 형님의 자양난옥으로 시간을 벌면 제가 사람을 보내 어떻게든 관련 정보를 수집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전하.”
“큰형님이 협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예상한 바입니다. 그래도 부황의 명이 있었으니 따를 수밖에 없을 거예요. 어쩔 수 없이 한동안 야양성에 더 머물러야겠지만, 제혼 수사의 일은 저와 셋째 형님이 다른 방법도 강구를 해보겠습니다.”
석천공이 한립을 향해 미안해하며 말했다.
“두 분을 곤란하게 해드렸습니다. 오늘 일로 형제분들끼리 나눌 말씀이 있을 테니 저는 먼저 일어나지요.”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그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아직 그리 급히 가지 마시고요. 천홍역 일로 수사의 도움을 구해야 한단 말입니다.”
“저는 성역 각지에 대해 잘 몰라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3전하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시고 제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 능력이 되는 한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열셋째 아우, 그만 려 수사를 보내 드리거라. 새 자양난옥을 구했으니 한 시라도 더 빨리 제혼 수사를 살피고 싶을 것이 아니냐.”
석파공이 웃으며 아우를 말렸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려 형은 어서 가보시고 이야기를 마치는 대로 따로 찾아가겠습니다.”
석천공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은 대청을 나와 장정원으로 돌아온 다음 금제를 모조리 발동했다.
중품 자양난옥들을 구해 한동안 제혼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테니 남은 시간은 수련에 매진할 생각이었다.
* * *
십여 년 후, 어느 날 밤.
금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눈을 감은 한립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빠르게 수결을 맺으며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등 뒤에 진언보륜이 쾌속으로 회전하면서 금색 광선을 뿜고, 좌측의 광음정병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왼쪽은 모래로 이루어진 폭포가 좌르르 흐르고, 오른쪽 금실들은 빽빽이 들어선 나무처럼 숲을 이루었다가 다시 커다란 나무로 뭉쳐졌다.
“뭉쳐라!”
번쩍 눈을 뜬 그가 입을 달싹였다.
진언보륜, 광음정벽, 단시류화(斷時流火) 그리고 환진사가 시간도문을 응결해 강대한 시간법칙 파동을 일으켰다.
금실들이 이룬 숲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십여 년간 고된 수련 끝에 드디어 동을신목(東乙神木)을 응결한 것이다.
이제 <대오행환세결> 3성 수련을 마친 셈이었다.
진언보륜의 720개 시간도문이 반짝이고 광음정병의 360개 도문이 빛을 발했다.
단시류화와 환진사의 도문은 그보다 적어 180개 정도였고, 동을신목에는 시간도문 하나가 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45가닥의 시간정사가 돌연 보물들에서 벗어나 한립을 감싸고 기이한 현상을 일으켰다.
시간정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동그란 고리를 이루어 한립을 중앙에 품고 강력한 시간법칙의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동시에 진언보륜과 광음정병 등이 품은 다섯 가지 시간법칙이 몰려들어 고리들을 거대한 금색 고리로 뭉쳤다.
“또?”
무언가를 직감한 한립의 소매가 부풀어 오르고 문양이 가득 새겨진 암녹색 병이 날아올랐다.
바로 장천병이었다.
녹색 태양이 뜬 것처럼 밝은 빛을 발한 병 위로 금색 빛의 고리가 녹아들어 새겨졌다.
휘이이잉.
고리와 병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웅장한 법칙의 힘이 퍼져 수많은 녹색 주술문자가 구름을 이루고 떠올랐다.
쿠쿠쿵!
허공이 찢겨나가고 수정빛이 몰려나와 익숙한 수정장벽을 이루었다.
“후후, 이번에는 내 예상보다 빠르구나.”
그 순간, 한립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냈다.
안색이 달라진 한립은 장천병에 콩알만 한 검은 눈 두 개가 생겨 그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수정장벽에서 쿠릉! 하는 소리가 울리고 소용돌이가 떠올라 그를 집어삼켰다.
‘여긴…….’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에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시야의 끝에서 거대한 강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데 수많은 물방울의 움직임이 보일 만큼 유속이 느렸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멈춘 것 같기도 한 기이한 광경이었다.
처음 겪는 일도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움직이려다 한립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이럴 수가.”
고개를 숙인 그는 자신이 혼백 상태가 아니라 본체로 넘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만져보아도 절대 환영 같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립은 머리가 복잡해 어떻게 답을 찾을지 몰라 망설였다.
한참 주위를 살피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높게 떠올라 흘러내리는 강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경험들이 뭉친 빛구슬들이 무엇이 그리 바쁜지 휙휙 지나가고 있었는데, 다른 것들에 비해 꽤 크기가 큰 빛구슬 하나가 그의 앞을 느리게 흘러갔다.
‘설마!’
그 안의 모습을 본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늦기 전에 손을 뻗은 그는 물방울 구슬에서 터져 나온 강렬한 빛에 빨려들어 갔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뜬 한립은 자신이 해수면 위의 검은 암초 위에 누워있는 것을 깨달았다.
파도 소리와 주변의 마기의 흐름 그리고 검은 물이 낯설지 않았다. 모든 장면이 비슷비슷하게 중첩되어 머릿속에 포개지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숙여 물속에 비친 모습을 본 그는 그가 정말 육신을 지닌 채 시공간을 초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진언보륜 허상이 흐릿하게 떠서 빽빽한 시간도문들을 반짝이고 있었다.
대충 봐도 도문의 수가 1,600개가 넘는 것이 진언보륜 뿐 아니라 광음정병, 동을신목 등 다섯 가지 시간법칙 도구들이 합쳐진 듯했다.
얼마나 멀리 돌아가냐에 따라 시간의 힘이 소모되는 속도가 결정되는 듯했다.
“내 예상이 맞는지는 확인해 보면 알겠지.”
그는 윤회전 가면을 꺼내 쓰고는 어딘가로 날아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