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화. 꿇지 않다
*
궁전 깊이 들어간 그들은 거대한 건물 중에서도 군계일학과 같은 위엄을 뽐내는 거대한 전당에 도착했다.
몇 사람이 두 팔을 벌려 껴안아도 부족할 만한 검은 돌기둥에는 마신이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정문 위 거대 편액에 ‘성황전’이라는 보라색 글자가 적혀 있었다.
정문에 서 있던 보라색 장포를 걸친 시종들이 네 사람이 걸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석파공과 석천공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부황께서는 안에 계시더냐?”
“성주 대인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안에 고하겠습니다.”
석파공의 물음에 시종 중 하나가 답하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돌아 나왔다.
“네 분 다 안으로 드시라는 성주 대인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석파공과 석천공은 깊게 숨을 내쉬고 의복을 정돈한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과 혈적후가 그들과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텅 비어있는 거대한 공간에는 양쪽 벽에 볼록하게 새겨진 조각들이 다였다.
그중에는 사람이나 짐승의 형태도 있었는데, 하나 같이 그대로 복제를 해 둔 것처럼 생생했다.
묵묵히 걸어간 그들은 어두운 대전에서 유일하게 빛이 드는 높은 자리에 보라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4, 50대로 보이는 백발의 각진 턱에 길고 가느다란 눈썹을 지닌 중년인은 우아한 문생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 시선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전신에서 발산되는 위압감에 저절로 그 앞에 굴복하고 싶어지는 인물이었다.
한립은 장천병의 시공간 초월로 그를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진짜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슬쩍 그를 훑었다.
마주가 그걸 알고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눈이 마주친 한립은 모든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해서 선령력을 운용해 의식을 맑게 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은 마주의 시선이 떠나며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한립은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한숨을 돌리며 긴장감을 유지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전력을 다해 전투를 치른 듯 피로감이 몰려왔다.
“부황을 뵙습니다! 성공적으로 폐관 수련을 마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석파공과 석천공이 앞으로 나서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석파공과 석천공을 따라 혈적후도 급히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성황의 덕을 칭송했는데 한립은 그저 허리만을 굽히고 말았다.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석천공이 힐끗 그 모습을 보고 기함했다.
마주는 규칙을 무척 중시했고, 그를 알현하며 꿇지 않는 것은 중죄였기 때문이다.
그가 뭐라고 언질을 주기 전에 옆에서 누군가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무엄한 놈이구나! 성황 전하를 뵈며 제대로 된 예를 취하지 않다니!”
대전 좌측에 이미 몇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립은 자신이 대전에 들어선 이후 마주에게 정신이 팔려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 당황했다.
가장 앞줄에 마련된 13개 자리는 금칠이 되어있어 그 뒤로 준비된 주홍색 자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앞줄에서 다섯 번째 자리에 앉은 보라색 궁장 차림의 묘령의 여인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절색의 미모를 지녔고, 그 옆의 여섯 번째 자리에 앉은 동그란 얼굴의 청년은 작은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방금 소리를 친 사람이 바로 체구가 작은 청년이었다.
두 사람 뒤에 앉은 덩치 큰 마족은 한립, 혈적후처럼 호위의 자격으로 참석한 듯했다.
한립은 동그란 얼굴 청년 말고 궁장 여인을 보며 이채를 띠었다.
대황자가 그와 접촉하려 했을 때 나타났던 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바로 그녀였다.
궁장 여인은 고요한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며 싱긋 웃고 있었는데, 그녀의 웃음에 갑자기 꽃이 만발하고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대전이 밝아졌다.
의지가 굳건한 한립도 순간 넋을 놓고 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저는 성역 사람도 아니고 열셋째 전하를 호송하기 위해 야양성에 온 것입니다. 성역을 통치하시는 성황 대인을 존경해 마지않으나 제게는 그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선배님이실 뿐이니 굳이 그 앞에 꿇어 절을 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제혼의 일로 도움을 청해야 해서 완전히 밉보일 수도 없었다.
“어디서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냐!”
동그란 얼굴의 청년이 인상을 팍 쓰고 외쳤다.
“되었다. 명진, 사소한 일로 소란 피우지 말거라.”
“예, 부황.”
마주의 명에 청년은 뜻밖이라는 눈빛이었지만 한립을 노려보기만 할 뿐 더는 나서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석천공도 어안이 벙벙했고, 석파공은 뚜렷한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눈썹이 슬쩍 들려 있었다.
“려비우라고 했나? 성역 사람이 아니니 과한 예는 면해 주지. 파공, 천공, 너희도 어서 일어나거라.”
마주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부황.”
석파공과 석천공 그리고 혈적후까지 일어나 감사 인사를 했다. 한립도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천공, 성역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는데 진선계에 다녀온 것은 어찌 되었더냐?”
석천공을 내려다보는 마주의 얼굴에 미약하게 웃음이 어렸다.
“부황께 아룁니다. 소자 진선계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많은 수확을 얻고 돌아왔습니다.”
석천공이 급히 답했다.
“확실히 수행이 꽤 늘었어. 제대로 수련하려면 많은 것을 보고 겪으면서 고생을 좀 해야 하는 게야.”
마주는 그를 칭찬하면서도 대전의 나머지 사람들을 훑었다.
“부황의 말씀이 맞습니다.”
석천공이 대답하고 궁장 여인과 동그란 얼굴 청년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역의 억만창생을 책임지는 황족으로서 그것에만 신경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정이 최근 성역 인근에서 수시로 소란을 피우니 조사를 명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석파공이 공수를 하고 말했다.
“알겠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마주가 두루뭉술하게 답을 하는데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와 쿵! 하고 바닥에 무릎을 찍으며 꿇어앉았다.
“성황께 아룁니다. 대전하, 8전하, 10전하께서 바깥에서 알현을 청하고 계십니다.”
“들어오라 하라.”
마주는 석파공 등을 향해 손을 저었고, 그걸 본 그들은 옆으로 물러났다.
석파공은 앞줄 세 번째 자리에 앉고 혈적후가 그 뒤에 섰다. 석천공은 당연히 가장 말석에 앉았고 한립은 그 뒤에 섰다.
“려 수사, 부황도 고집스러운 면이 있는 분입니다. 조금 전에는 잘 넘어갔지만, 부황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은 다시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제혼 수사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석천공이 전음을 보내와 한립은 생각을 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마역 한가운데에서 마주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찌해도 남에게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것은 할 수 없었다.
석천공은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안심했다.
“석 수사, 저 두 분은?”
“다섯째 누님 서경연과 여섯째 형님 석명진입니다.”
“대황자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다섯째 누님은 수행이 높고 큰 뜻을 품어 큰형님, 셋째 형님과 더불어 두각을 나타내는 황가의 자제입니다. 누님도 상당한 세력을 이끌고 있고 여섯째 형님과 열두째 형님의 지지를 받고 있지요.”
한립은 그 이야기를 듣고 당시 대황자와의 대화를 막았던 것이 어떤 내막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 걸음 소리와 함께 대황자 일행이 들어왔다.
“부황을 뵙습니다. 성공적인 수행 정진을 축하드리며 하루빨리 도조의 자리에 올라 만고의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대황자 등은 바닥에 엎드려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그래. 어서 일어들 나거라.”
미소를 머금은 마주는 대황자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대황자는 첫 번째 자리로 가서 앉고, 나머지 황자들도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는 형제들을 향해 눈인사를 건네고는 마지막에 한립을 향해서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립이 그런 그를 모른 척하자 곧 시선을 돌렸지만 말이다.
그 후로도 마주의 출관을 축하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찾아왔다.
야양성 혹은 마역 각지에서 중책을 맡은 이들이 모여 속세의 황실 조회를 떠올리게 했다.
석천공이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때마다 전음으로 설명해주어서 한립은 대략 중요인사들을 익힐 수 있게 했다.
그 밖의 좌석은 찼는데 가장 앞줄은 앞서 도착한 석파공 등 7명을 제외하면 더는 황자나 공주가 오지 않아 비어있었다.
“석 수사, 다른 황자나 공주들은 참석하지 않는 것입니까?”
한립은 거의 절반이 빈 앞줄을 보고 전음으로 물었다.
“일곱째 형님은 흑압성(黑鴨城)에서 천정의 동향을 주시하느라 돌아올 수 없고, 열두째 형님은 워낙 세상을 떠도는 것을 좋아해서 야양성에 붙어 있는 날이 거의 없습니다. 부황께서도 그 형님은 어쩌지 못하시고요. 둘째, 넷째, 아홉째 그리고 열한번째 누님은 성역의 어느 도조 문하에서 수련 중이라 저도 누님들을 만나 뵌 지 엄청 오래되었습니다.”
석천공의 이야기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모였으니 시작하지. 내가 폐관을 하는 동안 성역에서 발생한 중대사에 대해 고하라.”
마주가 앞에 놓인 탁자를 탕! 치며 말했다.
대황자 석참풍이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황께서 폐관하시는 동안 소자 묵하, 용량, 한운, 고성 등 네 개 성을 돌며 수집한 정보입니다.”
석참풍이 옥을 엮은 서책을 내밀자 마주 위쪽에서 회색 그림자가 튀어나와 받아들고 마주에게 바쳤다.
한립은 회색 그림자가 회색 의복을 입은 사람인 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기운으로 얼굴이 가려진 그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이 아닌 일종의 혼백 같았다.
“말 그대로 그림자라 불리는 자입니다. 부황의 호위로 누구도 그 정체를 모르고 진짜 얼굴을 확인한 적은 없지만, 실력만큼은 강하지요.”
석천공이 한립의 시선을 보고 전음을 보내왔다.
“네 개의 성이나 도적들을 소탕하다니, 공이 크다.”
마주는 옥간의 내용을 훑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황의 고민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소자의 복입니다. 폐관 수련을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부황을 위해 몇 해 전 구한 원공초(元空草)를 바치니 받아주십시오.”
석참풍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하얀 목함을 꺼내 뚜껑을 열고 9개의 이파리가 달린 은백색 풀을 내보였다.
은색 도문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이파리에서 강렬한 공간법칙 파동이 흘러나왔다.
그림자가 번득 목함을 가져다 마주에게 바쳤다.
“효심이 지극하다. 상으로 천청령롱단(天靑玲瓏丹) 세 알, 태초성갑(太初聖甲) 열 벌, 용상진옥검(龍象鎭獄劍) 열 자루를 하사하겠다.
마주가 미소를 보이며 그림자에게 말했다.
번득 사라진 그림자는 바로 백옥으로 만든 쟁반에 하늘색 단약이 봉인된 수정구슬 세 개와 하얀 갑옷 열 벌 그리고 금색 장검 열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단약의 맑은 향기에 한립의 36개 현규가 꿈틀거렸다.
단숨에 삼키고 싶은 향기였다.
단약뿐만 아니라 보갑과 보검도 비범한 것들이었다.
“감사드립니다!”
석참풍이 희색을 드러내며 상을 받자 양측에 앉아 있던 이들이 무척 부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