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21화 (1,678/2,000)

1921화. 알현

*

“큰 경사라면…….”

“맞습니다. 부황의 출관을 축하하는 종소리였습니다. 내일이면 모두를 불러들이실 테니 그때 계획한 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좋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셋째 형님의 계획은 꼭 통할 겁니다.”

석천공의 말에 한립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튿날 아침, 단정하게 차려입은 한립은 정당으로 향했다.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석파공과 석천공은 화려한 보라색 예복을 입고 허리에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머리에 자금색 관까지 쓴 그들은 속세의 황실 자제처럼 기품이 넘쳐 보였다.

석파공이 쓴 자금색 관에는 반짝이는 보석 3개가 박혀 있는데 비해 석천공의 관은 색도 탁하고 보석도 박혀 있지 않았다.

“두 분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하하, 우리도 막 왔습니다.”

한립이 인사를 건네자 석천공이 화답했다.

“가시죠.”

평온한 얼굴을 한 석파공이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바깥으로 나섰다.

저택을 나선 세 사람 앞에 마차가 2대 서 있었다.

금색 사자가 끄는 마차는 무척 화려했고, 두 번째 마차는 크기도 작고 평범했다. 평범한 마차 옆에 붉은 옷을 입은 혈적후가 서 있었다.

혈적후는 한립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했다.

“려 수사, 부황은 성역의 규칙을 중히 여기는 분이라 함께 마차를 타고 갈 수 없습니다. 혈적후와 같이 다른 마차를 타셔야겠어요.”

석천공이 사정을 설명했고,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두 번째 마차에 올랐다.

두 마차는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입니다, 혈적후 수사.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수사가 조골진인을 유인해 주지 않았다면 저와 석 수사는 무사히 야양성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

한립은 같이 마차에 탄 혈적후에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닙니다. 3전하께서 두 분을 데리고 야양성으로 돌아오라는 중책을 내리셨건만, 조골 그 늙은 마두에게 당해 중상을 입고 오랫동안 치료하다 얼마 전에야 회복했습니다. 조골진인을 려 수사가 죽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우연히 겹쳐 간신히 죽일 수 있었던 겁니다.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죽는 것은 저겠지요.”

“너무 겸손하십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마차는 빠르게 달렸다.

한립은 그간 저택을 몇 번 떠나지 않았고 대부분 마가구로 무언가를 구매하거나 제혼을 구할 방법을 찾으러 다녔기에 낙가구 풍경이 익숙하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천천히 낙가구를 보고 있자니, 북에서 남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높아졌다.

성산 아래에서부터 성벽까지 건물들이 가지런히 지어져 있어 계단을 보는 것 같기도 했는데 성산 쪽으로 갈수록 건물들이 높고 화려해졌다.

두 대의 마차가 골목을 돌아 나와 탁 트인 백옥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족히 폭이 백 장은 될 듯한 쭉 뻗은 길이 성산으로 곧장 이어졌다.

그리고 백옥 도로 양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정성스럽게 성산을 향해 절을 올리는 중이었다.

“출관 축연이 열릴 때마다 성안의 모든 이들이 길로 나와 하루 종일 참배를 하곤 합니다.”

혈적후가 한립의 놀란 표정을 보고 이야기했다.

“그랬군요.”

그렇게 반 시진을 달린 마차는 천여 개의 흑수정 건물들이 나무처럼 솟은 궁전 앞에 멈추었다.

각 건물에는 마신이나 괴상한 요수의 조각과 그림이 가득했다.

“이곳이 성황께서 머무시는 성황궁(聖皇宮)입니다.”

혈적후가 먼저 설명을 했다.

궁전 옆 거대한 백옥 광장에 흑수정을 쌓아 만든 거대한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로 참배객들이 가득했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쉼 없이 축복의 말을 중얼거리며 절을 했다.

“갑시다. 규정에 따르면 저희도 참배하고 나서야 성황궁으로 들어가 부황을 뵐 수 있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석파공이 그들을 부르고 제단으로 걸어갔다.

한립은 걸어가면서 거대한 석상 두 개가 서 있는 제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래되어 보이는 조각은 그다지 윤곽이 선명하지 않았는데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그중 새하얀 여인 조각상은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고, 머리가 12개에 팔이 24개 달린 새까만 조각상은 희로애락을 대표하는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러 개의 손이 각각 다른 손짓을 하고 있어 눈길이 갔다.

한립은 그간 마역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았기에 두 조각상이 마역 사람들이 신봉하는 유명성모(幽冥聖母)와 천살성황(天煞聖皇)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마역에는 천살성황이 허공을 갈라 세상을 만들고 유명성모가 그 안을 채울 만물을 만들어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다.

당연히 한립은 그 전설을 믿지 않았지만 처음 보는 석상이라 찬찬히 봐두었다.

그의 시선이 유명성모를 떠나 천살성황을 향했을 때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저건.’

눈에서 보일 듯 말 듯 보랏빛을 일으킨 그는 안색이 달라져 천살성황이 허리에 찬 허리띠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적힌 특이한 문자들은 조골진인에게서 얻은 조각상에 떠오르던 문자와 같은 종류였다.

한립은 문자의 비밀을 알아낼 기회에 기뻐하며 자세히 기억을 해두려 했다.

‘헉!’

그때, 천살성황의 어느 머리에서 눈이 번득이고 어둑한 기운이 퍼져 나와 주변을 암흑으로 물들였다.

화들짝 놀란 한립은 혼백이 격동하는 것을 느끼며 암흑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만장 얼음 속에 갇힌 듯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가시고 눈앞이 밝아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온몸의 털이 곤두선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려 수사, 왜 그러십니까?”

혈적후가 그를 보고 물었다.

석천공도 이상하다는 얼굴로 돌아보는 것이 조금 전 석상의 이상을 그들은 감지하지 못한 듯했다.

“아닙니다. 곧 성주를 뵐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안했나 봅니다.”

한립은 쿵쿵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답했다.

“하하, 부황이 엄하시기는 해도 말이 안 통하는 분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석천공이 그런 그를 보고 웃음 지었다.

한립은 억지로 웃어 보였고 슬쩍 천살성황 조각을 보았지만 어떤 변화도 찾을 수 없었다.

“갑시다.”

석파공이 먼저 위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리고 나머지 세 사람도 그를 따라 제단 위로 향했다.

두 개의 조각상 바닥에 타원형의 거대 진법이 새겨져 있고 수십 명의 제사(祭司) 복색을 한 사람들이 법기를 들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범인들을 내려다보는 신 같은 자세로 두 조각상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제단 위로 올라서자 두 석상에서 분명한 압박감이 전해져 숨을 고르게 쉬기가 어려워졌다.

한립은 또 아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까 봐 흠칫 놀랐는데 곁눈질을 하니 석파공 등 다른 이들도 안색이 미미하게 창백해져 똑같이 거대한 압력을 이겨내고 있었다.

세 사람은 두 석상을 향해 참배의 예를 취하고 안색이 나아졌다. 그걸 본 한립도 두 조각상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한립은 거대한 압력이 차차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그 신통함에 놀랐다.

‘석상에 정말 신이라도 깃들어 있단 말인가?’

“두 분 전하께서 성심을 다하는 것을 보셨으니 성황과 성모의 비호가 따를 것입니다.”

제사 중 하나가 일어나 인사를 하고 말했다.

헝클어진 누런 머리카락에 농부처럼 거뭇거뭇하게 탄 피부를 지닌 중년인은 두 눈이 유난히 맑았다.

한립은 그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겨우 금선 초기의 수행을 지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죽일 수 있는 자였는데 어쩐 일인지 간담이 서늘해졌다.

“염정 제사의 축복에 감사드립니다.”

제혼 때문에 야양성의 제사전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제사전은 특수한 지위를 지녀 소속된 제사들은 전부 성주의 직속으로 어떤 임무도 수행하지 않고 평생 천살성황과 유명성모를 모시는 일에 집중했다.

그중 가장 지위가 높은 자가 대제사이고, 그 아래로 고계 제사가 몇 명 있는데 염정도 그중 하나였다.

한립은 다른 제사들을 훑고 수행이 염정보다 높은 자가 없음을 알고 실망했다.

“하하하, 셋째 아우가 먼저 와있었구나.”

그때 아래쪽에서 웃음소리가 들리고 서른 일고여덟 살로 보이는 사내가 석파공, 석천공과 비슷한 복색을 하고 나타났다.

머리에 쓴 자금색 관에는 3개의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 있었고 미간에 은은하게 보라색 표식이 신비로운 빛으로 반짝였다.

한립은 움찔했다.

‘10년 전 마가구에서 그를 초대했던 자가 아닌가!’

그때는 흑발이었는데 오늘은 백발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자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8황자가 서 있었다.

얼굴이 누렇게 뜨고 호흡이 고르지 못해 병색이 짙은 마른 청년도 함께였다.

“큰형님, 여덟째 아우, 열째 아우. 다들 오래간만입니다.”

석파공이 그들을 향해 포권을 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알고 보니 체구가 큰 자포 사내는 석천공의 큰 형이자 마주의 장자인 대황자 석참풍이었다.

당시 그가 자신을 청했던 목적도 의문이었지만 대놓고 그를 말렸던 백발 여인은 또 누구란 말인가?

수많은 의문이 떠오른 한립은 유심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여덟째 형님인 석전갑은 만나보았고, 그 옆에 아파 보이는 사람이 열째 형님 석백부입니다. 어릴 적에 괴상한 병에 걸려 오랫동안 시달리고 있는데 그게 오히려 복이 되어 강력한 저주법칙을 깨우쳤지요. 둘 다 큰형님 사람입니다.”

석천공의 목소리가 한립의 머릿속에 울렸다.

태을경 초기의 수행을 지닌 10황자는 과연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특이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모두 야양성에 있는데도 각자의 일로 바빠 자주 보지 못하는구나. 최근에 진선계에서 자라선주(紫羅仙酒) 두 병을 구했는데 부황을 알현한 다음 셋째와 열셋째도 내 저택으로 와서 함께 마시자꾸나.”

석참풍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이 어두워진 석천공은 석파공에게 거절하라는 눈짓을 했지만 석파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큰형님의 초대에 아우가 당연히 응해야지요. 부황이 출관하시는 덕에 형제들끼리 모일 수 있고 잘 되었습니다.”

석천공은 답답해했지만 이렇게 답한 이상 안 갈 명분이 없었다.

“그래, 좋다! 그렇지, 려 수사도 관심이 있으면 함께 와도 좋네. 일전에 이야기한 내용은 아직 유효하니까 말이야.”

석참풍이 고개를 돌려 한립에 한 마디를 더하고 천살성황과 유명성모를 참배하러 걸어갔다.

8황자와 10황자가 그 말을 듣고 한립을 향해 괴이한 웃음을 남기고 따라갔다. 한립은 석참풍이 이간질을 하는 것을 알고 화가 치밀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려 수사, 방금 대황자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표정이 가라앉은 혈적후가 당장 따져 물었다.

“혈적후, 쓸데없는 소리는 삼가게.”

석파공이 서늘해진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놀란 혈적후는 입을 다물었지만 한립을 향해 의심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한립은 그걸 알고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비록 석파공의 명을 받았다지만 목숨을 걸고 조골진인을 유인해줘 혈적후에게 적잖은 호감을 지니고 있었는데, 대황자의 한 마디에 쉽게 돌변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깊게 친분을 유지할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만 가시지요.”

석파공은 한립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성황궁 쪽으로 난 계단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려 수사, 방금 큰형님이 왜 그런 소리를…….”

석천공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물었다.

혈적후와는 달리 그를 질책하거나 의심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아우, 큰형님의 이간책일 뿐이다. 자신의 벗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느냐?”

석파공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저야 물론 려 수사를 믿지요. 그냥 뭔 소린가 너무 궁금해서 말입니다.”

석천공이 아이처럼 헤헤 웃으며 말했다.

“별 것 아닙니다. 마가구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만났는데 그때 제혼에 대해 몇 마디를 나누었습니다. 당시 대황자가 분장을 해서 신분을 알지는 못했고요.”

침묵하던 한립이 대황자와 만났던 일을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큰형님이 참으로 교활하지 않습니까! 이런 저열한 수단을 쓰다니요.”

석천공이 콧김을 내뿜으며 화를 냈다.

“큰형님의 성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더욱 조심하면 될 일이다.”

석파공은 아우를 가르치는 것 같았지만 눈길은 혈적후에게 향해 있었다. 혈적후가 민망한 얼굴로 한립을 향해 예를 취했다.

“제가 조금 전에 충동적으로 실언을 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괜찮습니다.”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평소보다 냉담한 어투였다. 혈적후는 이 일로 그에게 나쁜 인상을 심어준 것을 깨닫고 어색하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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