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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20화 (1,677/2,000)

1920화. 출관

*

십여 일 후, 다시 3황자의 저택을 떠나 제강방으로 향할 때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3황자는 그를 까맣게 잊은 것 마냥 그를 가만 놔두었다.

몇 개월 뒤, 제강방의 크고 작은 상점들을 두루두루 들린 한립은 조골진인의 저물 반지에 든 마기들을 한두 점씩 꺼내 팔고 시간법칙 물건을 모으기 시작했다.

동시에 경물재나 류풍각처럼 배후가 분명한 곳들은 일부러 피하면서 대제사에 대한 소식과 제혼을 구할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둘 중 어느 소식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안면을 익힌 어느 상점의 장궤가 견천가에도 가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견천가에는 수많은 성족 고계 단사들이 머물고 있고, 그중 성원당(盛元堂)에는 천단사가 있어 난치병을 치료해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한립은 날을 잡아 마차를 타고 야양성 절반을 가로질러 견천가로 향했다.

제강방보다 배는 큰 곳이라 길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시장에 가까웠다.

시장의 정문에는 하얀 돌로 만든 패루가 세워져 있고, 그 뒤로 넓은 백석 광장에 거대한 청동 연단로가 놓여 쉼 없이 푸른 연기를 뿜어냈다.

한립은 연단로 옆에서 멈춰 가볍게 연기를 들이마시고 미소를 지었다.

마족 특유의 향을 태워 시장 곳곳에서 파는 약재와 단약의 냄새가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 길가로 나오자 제강방보다는 통일된 양식의 벽과 뾰족한 지붕과 원형 지붕이 섞여 있는 건물들이 보였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리 소란스럽지 않았고, 상점의 직원이나 장궤들도 소리를 높여 손님을 부르지 않았다.

한립은 구경은 미뤄두고 장궤의 조언에 따라 길 중간에서 좌측으로 꺾어 성원당이 있는 또 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다른 가게에 비해 문이 두 배로 크고 드나드는 이들이 아주 많았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자 계산대 앞에 마족 수사들이 가득해 점원이 일고여덟 명이나 되었으나 무척 정신없어 보였다.

바로 그때, 비단 장포를 걸친 통통한 중년인이 안쪽에서 걸어 나와 웃음 띤 얼굴로 다가왔다.

“일손이 부족해 귀빈을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아니네. 막 들어왔으니 기다렸다고 할 수 없지.”

한립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떤 물건을 찾으십니까? 단약입니까, 아니면 재료?”

“모두 아닐세. 만날 사람이 있어 찾아온 것이네.”

고개를 저은 한립의 말에 중년인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오해는 말게. 성원당의 수석 천단사를 만나 부탁할 일이 있어 찾은 것이니 악의는 없네.”

“강 대사를 만나기 위해 오셨군요. 공교롭게도 대사께서 단약을 제련하기 위해 폐관 중이시라 만나 뵐 수 없을 듯합니다.”

“그거 안타깝게 되었군.”

“대사가 제련한 단약을 매입하기를 원하시면 몇 가지가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그보다 강 대사는 언제쯤 출관하겠는가?”

“그건…… 저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지라.”

중년인은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그렇다면 나중에 다시 들르겠네.”

한립이 내심 탄식하며 바깥으로 나가자 중년인이 고개를 젓다가 몸을 돌렸다. 큰길로 나온 한립은 힐끗 성원당을 보고 다른 골목으로 걸어갔다.

체구가 큰 자포 청년이 성원당에서 빠져나와 그를 따라 그가 갔던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막다른 길목에서 걸음을 멈춘 한립은 뒤를 돌아보았다.

평범한 얼굴에 검은 머리를 높게 묶은 사내의 진한 보라색 눈동자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상대가 그를 향해 미소를 보이며 거침없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뜻밖에도 상대의 기운이 가늠되지 않았다.

“저를 기다린 겁니까?”

자포 청년이 그 앞에 서서 불쑥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수사가 저를 쫓아온 것일 텐데요.”

“저는 고풍이라 합니다. 성원당에서 수사가 천단사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제가 찾는 것은 강 대사이지 그냥 천단사가 아닙니다.”

한립은 코끝을 긁적이고 차분하게 답했다.

“강 대사가 연단에 능할 뿐 아니라 기이한 병을 고치는 데도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다만 려 수사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까 봐 걱정이군요.”

청년은 자신을 고풍이라 소개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저를 아십니까?”

“제가 려 수사를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자리를 옮겨 잠시 이야기를 나누심이 어떠신지요?”

고풍에 말에 한립은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분명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을 텐데, 석천공의 형제자매들과 연관이 있는 자일지 몰랐다.

그러나 제혼이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하는 마당에 어떤 기회도 놓칠 수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따라나서기로 결정을 내렸다.

야양성에서 함부로 누군가 소란을 피울 수 없다는 점이 안심되기도 했고, 상대가 대라경 수사라도 목숨을 건져 달아날 자신은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한립이 말을 끝맺기 전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고 형 아닙니까? 어디서 또 ‘태비’라도 잡아 오셨는지요?”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지닌 백발 여인이 한립 옆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경물대를 떠나고 나타났던 여인으로 오늘은 갑옷 대신 하얀색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지금은 너와 허비할 시간 없다. 려 수사, 가시죠.”

고풍은 여인의 출현에 불쾌해하며 한립을 향해 말했다. 한립은 ‘태비’라는 두 글자를 듣고 백발 여인의 뜻을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급한 용건이 생각이 나서 아무래도 가봐야겠군요.”

그는 자포 청년에게 포권을 하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견천가를 떠나 낙가구로 향했다.

* * *

밤이 깊어져 3황자 저택으로 돌아온 한립은 화원의 정자에 앉아 달빛을 감상하며 홀로 술을 마시는 석파공과 마주쳤다.

“오래간만입니다, 려 수사. 이리로 와서 같이 한잔 하시겠습니까?”

석파공은 그를 보고 빙긋 웃으며 권했다.

잠시 망설이던 한립은 돌로 만든 정자로 가서 예를 취하고 맞은 편에 앉았다.

“무슨 일로 달빛을 맞으며 술을 다 드시고 계셨습니까?”

한립이 웃으며 묻는 말에 석파공은 그의 잔을 채워주고 입을 열었다.

“그간 일이 바빠서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오늘 마침 시간이 났고, 술을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 년간 아껴두던 ‘선인취(仙人醉)’를 뜯었으니 몇 잔 함께 하시면서 이야기나 나누시지요.”

“제가 전하를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벌주로 한 잔 마시겠습니다.”

한립은 바로 잔을 비웠다.

“하하, 역시 열셋째 아우가 가까이할 만한 성정이십니다!”

“석 형이 폐관한 지도 꽤 시일이 흘렀는데, 언제 출관할지 아십니까?”

“여러 곡절을 겪으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상이 쌓였지만,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깨달음도 많아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이번에 더 높은 경지에 이르면 실력도 월등히 강해지겠지요.”

“미리 석 형을 위해 축배를 들어야겠군요.”

석파공의 말에 한립은 잔을 들어 상대의 잔과 가볍게 부딪치고 입으로 가져갔다.

“오늘 뵌 김에 제혼 수사에 대해 해명할 일이 있습니다. 일이 복잡해져서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 결코 잊은 것이 아니니 기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석파공은 술잔을 흔들기만 할 뿐 마시지 않고 말했다.

“……저로 인해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 말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의 대답을 들은 석파공은 술이 가득한 술잔을 내려놓고 인사를 하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자에 홀로 남아 있던 한립도 장정원으로 돌아가 자신의 방 안에 금제들을 모두 펼치고 태비 눈알을 든 채 묵묵히 대오행환세결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더이상 3황자 저택을 떠나 시장을 전전하지 않았다.

* * *

눈 깜짝할 사이에 10년이 지나갔다.

방 안에 앉아 금빛을 썰물과 밀물처럼 출렁이는 한립 앞에 황금색 모래 알갱이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왼쪽에 금색 화염, 머리 위에 병, 등 뒤로 금색 고리 그리고 오른쪽에 금실들이 모여 있었다.

문득 수결을 푼 그는 모든 기이한 현상들을 체내로 흡수시키고 눈을 떴다.

황혼이 깔린 시간 자리에서 일어나 단정하게 의복을 추스른 그는 방 안의 금제를 풀고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장정원 문밖에 백발 청년이 보라색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성공적으로 태을경에 이른 것을 축하드립니다, 석 수사.”

그를 보고 반갑게 다가오는 석천공을 향해 한립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제가 보기에는 려 형의 수행도 크게 늘었는데요? 출관한 지 보름 남짓 되었는데 어째 수사의 얼굴을 보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꼭 상의할 일이 없었다면 일부러 수련을 방해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방에 들어앉아 수련만 한지 오래라 이제 바깥 공기도 쐬려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일이라면?”

“며칠 전 셋째 형님이 곧 부황께서 출관하실 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제혼 수사를 구할 기회가 온 것이지요!”

“그게 정말입니까?”

“형님과 계획을 다 짜 놓았습니다. 부황의 출관 축하연에서 제가 수사의 도움을 받아 본 족의 보물인 라타비파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또 수사가 보호를 해주지 않았으면 계속된 암살 시도 속에서 십환산맥을 벗어날 수 없었을 거라 알릴 생각입니다.”

석천공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모든 공을 제게 돌려서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호시탐탐 수사를 노리는 형제자매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좋을 것이 없을 겁니다.”

“하하, 제가 뭐라든 그들이 믿기나 하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하려는 것은 전부 부황께서 수사에게 상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주께서……직접 대제사에게 제혼을 구하라 명하게 하겠다는 뜻입니까?”

한립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맞습니다. 부황의 명에는 큰형님도 거절할 방도가 없을 테니까요.”

“3황자께서 때를 기다린다고 하신 이유가 있었군요.”

“원래 우리 셋째 형님의 일 처리가 빈틈이 없으십니다. 려 형,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한참 한담을 나누다 헤어졌다.

방으로 들어간 한립은 화지 동천을 열어 제혼의 상태를 확인했다.

수련하는 틈틈이 제혼을 구할 방법을 찾았음에도 수확이 없었는데 석천공이 찾아와 확답을 주니 훨씬 안심이 되었다.

* * *

한립이 여느 때처럼 저택 안에서 수련하고 있는데 댕! 댕! 하는 웅장한 종소리가 그가 펼쳐 놓은 금제를 뚫고 들려왔다.

종소리에 담긴 알 수 없는 힘에 체내의 선령력이 요동쳤으나 해가 되기보다는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방을 나선 그는 성산의 꼭대기에서 둥그런 은색 광채가 종소리와 함께 퍼지는 것을 보았다.

3황자 저택의 시종들이 무척 기뻐하며 분분히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종소리는 연달아 들리다 일다경이 지나서야 그쳤다.

“성족의 삼성진원종(三聖鎭元鐘)입니다. 종소리를 듣는 이의 원기를 정련해주는 효과가 있지만 발동하는데 드는 힘이 상당해서 큰 경사가 있을 때만 울리지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 은빛이 모여 석천공으로 변했다.

“공간 분신이 아닙니까? 태을경에 이른 뒤에 공간 법칙을 다루는 솜씨가 아주 정교해지셨습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경상분신(鏡像分身)일 뿐이라 본 실력의 2할밖에 내지 못하는걸요. 유일한 장점은 원거리에 자유롭게 모습을 투영해서 진신을 통해 교류하는 것보다 편하다는 거지요.”

한립의 칭찬에 석천공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이에 한립은 장천병을 통해 시공간 초월을 했을 때 본 마역을 떠올렸다.

당시 마주도 이 경상분신 신통을 이용해 전장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닫고는 석천공의 분신을 다른 눈으로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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