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19화 (1,676/2,000)
  • 1919화. 혜안(慧眼)

    *

    “필요하신 물건이라도 있으신지요?”

    “이것들이 있나 확인해 주게.”

    한립은 소매 속에서 말아놓은 종이를 꺼내 건네주었다. 종이를 펼쳐 내용을 확인한 청년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너무 귀한 것들이라 마지막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저희 같은 작은 상점에서는 찾아드릴 수 없겠습니다. 꼭 필요하시면 상회에 연락해 구할 수 있을지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청년은 한립을 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좋겠군. 모두 꼭 필요한 것들일세.”

    “이것들은 너무 진귀해서 절반을 모으기도 힘들 겁니다. 다른 곳도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능한 대로만 모아 주면 되네.”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릴 것은 마계에서 선계의 물품을 조달하는 것이 어려워 시간이 되시면 다음 물품 조달 때를 기다리시면 되고, 급하시면 따로 운송을 해달라 요청해야 해서 가격이 더 오릅니다.”

    청년은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다음번 조달은 언제지?”

    “약 10년 뒤입니다.”

    “운송비용을 더한 가격은?”

    “저희 점포는 딱 물품 가격의 10분의 1만을 더 받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술술 오가자 청년이 웃으며 답했다.

    “선원석으로도 계산할 수 있는가?”

    “안 될 것 없지요.”

    “그럼 기다리지.”

    “좋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두 가지 물건을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시원시원한 한립의 대답에 청년이 희색을 띠고 물러났다.

    * * *

    황성의 정교하게 꾸며진 마기가 그득한 별채 안.

    마족 소녀가 급히 돌아와 하얀색 첨탑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한립을 안내했던 소녀의 수행이 어느새 금선 초기 경지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고하기 전에 대문이 열리고 소녀는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검은 경장 차림의 은발 사내가 거대한 화판에 먹으로 높이 솟은 산봉우리와 그 위에 선 모호한 그림자, 그리고 그 주위에 몰아치는 폭풍을 묘사하고 있었다.

    산봉우리 정상에 선 사람 위로 새하얀 벼락이 떨어져 그림을 정확히 둘로 나누는 중이었다.

    “청청, 쫓겨난 것이냐?”

    붓을 멈춘 은발 사내가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돌아보았다. 석천공의 셋째 형님 석파공이었다.

    “전하께 아룁니다. 그자가…….”

    마족 소녀는 공손히 예를 올리고 그와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아뢰었다. 팔짱을 끼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석파공이 입을 열었다.

    “몰래 따라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더냐?”

    “그건 제가 함부로 결정할 수 없어…….”

    호청청은 서둘러 답했다.

    “그래, 잘했다.”

    석파공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호청청은 우물우물 망설이고 있었다.

    “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거라.”

    “상대가 이동하는 내내 무척 상냥하게 대해주었지만, 떠나기 직전 들은 한 마디에……. 솔직히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그래서 감히 쫓지 못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호청청이 숨김없이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하하, 상대가 일부러 그렇게 느끼게 만든 것이니 신경 쓸 것 없다. 처음부터 너를 거절하지 않은 것은 내 체면을 살려준 것이고, 제강방에 이르러 너를 쫓은 것은 내게 한 경고이지. 내가 감시하는 것에 불만은 표하되 신중하고 자신의 처지에 맞게 행동하고 있구나.”

    석파공이 두 손을 비비며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미천한 인족이 성역의 성도에 머물며 그게 불만이라니요. 전하께서 예를 다해 대우해 주시지 않았으면 그런 야만인은 온갖 곳에서 쓴맛을 봤을 겁니다!”

    호청청이 분하다는 듯 말했다.

    “되었다. 열셋째 아우가 청해온 손님인데 감시를 한 우리에게도 잘못이 있다. 분부를 내려서 앞으로는 감시를 붙이지 않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래, 물러가거라.”

    소녀가 나간 뒤에도 석파공은 붓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야. 재미있기도 하고…….”

    * * *

    제강방, 한립은 선령각을 떠나 강에 인접한 건물에 도착했다.

    상점의 대문은 대로 쪽이 아닌 유유히 흐르는 강물 쪽으로 나 있었고, 검은 석재로 만들어진 벽에 둥근 지붕이 얹어져 있었다.

    “경물재…….”

    고개를 들어 편액을 본 한립이 잠시 고민하다 안으로 들어갔다.

    상점 안에는 뜻밖에도 손님이 한 명도 없었고 가게 내부는 둘로 나뉘어 있었다.

    왼쪽에 놓인 진열장 위에 걸린 ‘혜안신주자득(慧眼識珠者得)’이라 적힌 검은 목판이 가장 눈에 띄었다.

    오른쪽 진열장 위에도 목판이 걸려 있었고 거기에는 ‘가재만관자득(家財万貫者得)’이라 적혀 있었다.

    좌측의 목판은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고, 우측 목판은 새로 달았는지 조금 더 반질반질했다.

    각각 ‘안목이 있는 자가 얻을 것이다.’, ‘부유한 자가 얻을 것이다.’라는 뜻이었다.

    양쪽의 계산대에 직원이 한 명씩 앉아 한 명은 연신 하품을 하며 졸고 다른 한 명은 푸른 서책을 들고 흥미롭게 읽고 있었는데, 그 서책도 공법 관련 책이 아니라 속세에서 떠도는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소설이었다.

    서책을 보던 직원은 한립이 들어온 것을 발견하고는 느긋하게 일어나 서책을 어딘가에 쑤셔 박아 두었다.

    “손님,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경물방에는 온갖 물건이 있으니 필요하신 것을 말씀해 주시면 찾아드리겠습니다.”

    외워 놓은 문장을 그대로 읊는 듯한 태도였다. 열정이라고는 없는 모습에 한립은 그 뒤의 진열장을 훑었다.

    다양한 마기며 법보, 단약과 재료들이 섞여 있었는데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게다가 그 아래 표시된 가격이 아무렇게나 사기에는 꺼려지는 액수였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혜안식주자득’이라는 목판 아래를 보았다.

    점원은 그가 아무것도 찾지 않자 다시 푸른 서책을 찾아 침을 묻힌 손으로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좌측 진열장에도 물건들이 두서없이 놓여 있었고 심지어 가격표도 없었다.

    한립은 다양한 짐승들의 절단된 시체 일부부터 살폈다. 발톱 같은 것들은 광택이 나고 흉살기가 풀풀 날리기도 했다.

    그 옆에는 다양한 색깔의 액체가 담긴 투명한 수정 병에 크고 작은 눈알들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는 심지어 인족 수사의 눈알도 있었다. 한립은 정확히 회색 돌 구슬 같은 눈알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건 얼마인가?”

    한립이 손을 뻗어 그걸 가리키자 졸고 있던 직원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 힐끗 돌아보고 중얼거렸다.

    “3천.. 5백 마원석입니다.”

    “그렇게 비싸단 말인가? 안목이 있는 자가 얻을 것이라고 적어 놓고?”

    “손님도 보셔서 알겠지만 안목이 있는 자가 거저 얻을 거라고는 적혀 있지 않은데요.”

    점원은 하품을 하며 나른하게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회색 돌 눈알은 성년 태비의 눈알로 시간법칙을 지닌 물건이었다. 병에 특수한 금제가 펼쳐져 있어 얼마나 파동이 강한지 제대로 감지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야양성의 지도를 파는가? 상세할수록 좋네.”

    한립은 더는 눈알을 보지 않고 물었다.

    “지도요……. 있기는 합니다만 흑천구와 마가구만 나와 있고 황성이 있는 낙가구와 성안의 비밀구역들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점원이 약간 굳은 얼굴로 답했다.

    “그거면 되었네. 성안 각 구역에 대한 풍경 소개라도 되어 있으면 좋겠군.”

    “야양성 지도는 마원석 50개이고, 야양성 풍경서는 마원석 300개입니다. 특별히 알고 싶은 정보가 있으시면 구해드릴 수 있으나 가격이 나갑니다.”

    “되었네. 그 두 개만 주게.”

    한립은 미소를 짓고 계산을 마무리 지었다.

    한립이 지도가 각인된 검은 옥간과 두꺼운 검은 서책을 들고 나가려 하자 점원이 그를 불렀다.

    “손님, 이건 태비의 외눈입니다. 조금 더 고민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가격도 흥정할 방법이 있습니다…….”

    “오, 그게 무엇인가?”

    문턱을 나서려던 한립이 고개를 돌렸다.

    “둘째 장궤께서 정한 규칙인데 충분히 희귀한 물건을 저희에게 파시면 혜안식주 칸의 물건은 충분히 가격을 협상해 드릴 수 있습니다.”

    “충분히 희귀한 물건?”

    “아주 이상한 물건도 됩니다. 가치가 있는지는 저희가 판단할 것이고요.”

    잠시 고민해보던 한립의 머리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짐승의 비늘이나 발톱을 파는 것을 보면 완전한 시체도 거래하겠지?”

    “어떤 시체를 말씀하시는지……. 태을옥선 이상의 유해를 제외하면 일반 수사의 시체는 쓸데가 없는데요.”

    “회선의 시체.”

    “수행은요?”

    그 말에 점원은 바로 흥미를 보였다.

    “생전에 금선 수사와 비슷했네.”

    “태을옥선 경지의 회선 시체였으면 바로 태비의 외눈과 교환할 수 있었겠지만 금선경이라면 일부 비용밖에는 감면이 안 됩니다.”

    약간 실망한 점원과 가격을 흥정한 한립은 폭포의 회선 시체를 내주었다. 진언문 유적에서 마주친 회선이었다.

    점원은 회선의 눈꺼풀을 열어 눈알을 확인하고 은색 거울을 꺼내 시체의 머리를 비추었다.

    “확인되었습니다.”

    한립은 마원석 500개만 주고 점원에게서 태비의 눈알을 받아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점포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 병풍 뒤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걸어 나왔다.

    은색 갑옷으로 몸통을 가린 그녀는 긴 은발을 높이 올려 묵어 은색 관과 비녀로 고정하고 있었다.

    자태며 얼굴이 경국지색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대장궤를 뵙습니다.”

    점원 둘이 서둘러 나와 허리를 굽혔다.

    은갑 여인은 손을 저어 인사를 받고는 회선 시체를 보다 문밖을 쳐다보았다.

    “정보를 캘 기회를 주었는데도 그냥 갔다라…….”

    길가로 돌아온 한립은 대황자가 배후로 있다는 유풍각을 피해 계속해서 제강방을 돌아다녔다.

    * * *

    저녁 무렵 한립이 마차를 타고 3황자 저택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거처로 바로 들어간 그는 금제를 모두 펼치고 회백색 돌 구슬을 불러냈다.

    경물재에서 사들인 태비의 눈알이었다.

    파앗!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시간법칙의 힘이 서서히 회백색 돌 구슬을 감쌌다.

    회백색 돌 구슬이 쩍쩍 갈라지고 한 꺼풀이 벗겨진 다음에야 금색의 눈알이 강대한 시간법칙 파동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고 한립은 눈알을 거두어 기이한 빛을 감추었다. 이건 평범한 태비의 눈알이 아니었다.

    눈알에 들어있는 시간의 힘이 다른 것보다 훨씬 강한 것으로 보아 변이 태비의 눈알인 듯했다.

    한립은 그가 매우 좋은 거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령각에서 꺼내 보였던 구매목록에는 대부분 <대오행환세결>을 수련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법칙을 함유한 물건이 적혀 있었다.

    시간 법칙을 지닌 물건이 있으면 수련 속도를 끌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본래 시장에 나간 이유는 사적으로 마족 대제사와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경물재의 점원이 먼저 정보를 줄 수 있다고 말했는데도 거절했다.

    일단은 상점 자체가 믿음이 가지 않았고 둘째로 야양성에 대해 더 파악한 다음에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후, 그의 옆으로 은색 빛의 문이 열리고 해 도인이 걸어 나왔다.

    “한 수사,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무엇입니까?”

    “수사가 야양성을 돌아다닐 때 기억의 파편들이 순간순간 떠올랐는데, 연결할 수는 없더군요.”

    “어떤 기억이었는지 상세하게 묘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작고 검은 성에 푸른 강이 흐르고 그 위로 거대한 다리가 있었습니다.”

    “그게 다입니까?”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은 아주 선명했는데 말을 하려니 점점 더 기억이 모호해집니다.”

    해 도인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답했다.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당장 야양성을 떠날 것도 아니니 언젠가 또 떠오르겠지요. 석천공이 출관한 이후에 ‘적린공경’에 관해 물어봐야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해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보자고 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겠지요?”

    “적린공경 말입니다. 아무래도 아주 위험한 곳 같습니다.”

    “다른 기억이 떠오른 것입니까?”

    “모호한 인상 같은 것인데, 그냥 위험하다는 느낌이 다입니다.”

    “그곳이 확실히 수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군요. 옛 주인이 다녀간 적이 있었을 지도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조골진인의 저물 반지에서 필요한 재료를 몇 가지 찾아냈습니다. 참정도와 단소도 모두 위력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어 폐관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야양성에서는 그럭저럭 안전하다 볼 수 있으니, 안심하고 폐관에 들어가세요. 저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해 도인이 인사를 하고 동천 안으로 돌아가자, 한립은 경물재에서 구입한 지도와 서책을 꺼내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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