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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18화 (1,675/2,000)
  • 1918화. 시장

    *

    시간이 흘러 보름 뒤, 석천공은 이미 폐관 수련에 들어가고 한립도 방 안에서만 머무르고 있었다.

    석천공이 폐관에 들어가기 전 한립은 그를 한 번 더 만나 여러 가지 경전들을 요청했다.

    제혼의 상황이나 영역 수련에 관한 내용은 물론 조골진인을 이긴 것도 어찌 된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자료를 찾아봐야 했다.

    마족의 경전을 구해달라는데 석천공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날 당장 다채로운 고서와 경전들을 잔뜩 보내주었다.

    단 하나 유의할 것은 경전들이 셋째 형님이 소장품이기에 훼손하면 자신이 한 소리 들을 거라는 당부와 함께, 금제가 펼쳐져 있는 서적들이라 복제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겨 놓았다.

    그 뒤로 며칠 동안 한립은 서책에 파묻혀 살았다.

    두꺼운 고서들의 가죽 표지와 속지는 금속을 입혀 놓은 것처럼 단단하면서 부드럽고 질겼다.

    수많은 고서에는 의식손상이나 원영 봉인 그리고 수많은 마족의 비술 그리고 외부인들은 쉽게 알기 어려운 비사들이 담겨 있어 그의 견문을 많이 넓혀 주었다.

    아쉬운 일은 고서에 적힌 장기간의 혼절이나 원영 봉인으로 인한 부작용이 제혼의 상황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제혼은 의식손상을 입은 것도 아니었고,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장기간 자양난옥에 노출되었으니 벌써 나았어야 했다.

    원영 봉인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석천공의 말대로 대제사가 대황자 휘하로 들어갔으면 그쪽에 큰 희망을 품기도 어려웠다.

    남은 시간 동안 한립은 영역에 관해 서술된 부분을 중점으로 서책을 읽었다.

    예전에 보화가 펼친 현천위영역을 시작으로 소진한 등이 펼치던 진정한 영역 그리고 조물경의 영역까지 본 것은 많았고, 후에 그도 회선 묵우의 도움으로 영역을 응결할 수 있게 되었으나 제대로 공부를 한 적은 없었다.

    오늘 보니 영역은 조물경과 화령경으로 나뉘지만 둘을 익히는데 선후가 있는 것도 조물경을 이뤄야만 영역 안에 역령을 기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선계에서 수사들이 영역을 조물경까지 수련한 다음에 화령경을 수련해서 그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집을 지어 놓고 가구를 들이고, 우리를 마련해 두고 가축을 기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화령경 영역을 먼저 수련하면 역령을 황무지에 풀어 놓고 배양하는 것과 같아 역령의 성장에 불리했다.

    한립이 평범한 영력을 수련할 때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처럼 화령경이든 조물경이든 수련하는데 막대한 자원과 시간 그리고 수련자의 심력이 들었다.

    조물경만 해도 응결하는 데만 만년은 잡아야 하고 자신과 맞는 속성의 법칙 사물들을 연화시켜 영역에 녹여내야 했다.

    예를 들어 건물이나 집 혹은 산과 물 같은 것들 말이다.

    이 과정은 극히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단약이나 법보를 제련할 때와 마찬가지로 실패할 가능성도 있었다.

    조골진인처럼 8개의 백골경관을 융합하려면 수백 만년은 걸릴 것이다. 그렇기에 법칙의 물건이 의식이 생겨서 역령이 되려면 그 어려움은 더욱 극심했다.

    그래서 그간 만났던 수많은 이들이 대부분 평범한 영역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미가 당기기는 했지만 한립도 당장 화령경이나 조물경 영역을 익힐 여유가 없었다.

    그는 호흡을 고르며 자세를 다잡고 <대오행환세결>을 떠올렸다.

    이전에 <진언화륜경>과 <수연사시결> 그리고 <환진보경>을 수련해 두었고 시간법칙에 대한 깨달음도 늘어서 <대오행환세결>을 무리 없이 익힐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했다.

    * * *

    3년이 지나서야 한립은 별채를 나섰다.

    <대오행환세결>은 크게 늘지 않았고 이전에 수련했던 공법의 오류를 잡고 공법을 정리하는 정도에 그쳤다.

    다섯 가지 공법을 그냥 단순히 합쳐 놓은 게 아니라 오행의 상생을 요구해서 큰 진보가 없는 게 당연했다.

    그가 이번에 급히 나선 것은 수련에 진전이 없어 답답해서라기보다는 제혼이 걱정되어서였다.

    제혼은 여전히 의식이 없고 석파공 쪽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석천공이 폐관 수련에 들어가고 석파공이 그를 찾은 적은 없으나 은밀한 감시는 계속되었다.

    이날 한립은 3황자 저택을 떠나려 장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도중에 만나는 마족 수사들은 석천공의 당부를 들었는지 그에게 공손히 예를 취했다.

    그가 막 장정원 끝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려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개를 돌리자 준수하게 생긴 흑의 소녀가 작은 보폭으로 그를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열서너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소녀는 눈매가 곱게 휘어서 인상이 좋았는데 벌써 합체 초기의 수사였다.

    “낭자, 무슨 용건이라도 있습니까?”

    한립은 걸음을 멈춰서 소녀를 기다렸다.

    “낭자라뇨, 당치도 않으십니다. 일전에 3황자 전하께서 선배님께서 이곳 지리가 익숙하지 않으시니 나갈 일이 있으면 노비에게 길을 안내하라 명을 내려 두셨습니다.”

    소녀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3황자는 그를 꽤 공들여 감시하고 있었다. 그의 의심은 석천공의 말 몇 마디로 쉽게 가실 것 같지 않았다.

    은밀하게 그를 감시하던 기운이 며칠 전에 사라져서 석파공이 안심하나 했더니 이건 대놓고 사람을 붙이는 꼴이 아닌가.

    “그럼 수고를 해주게.”

    한립은 자연스럽게 웃음 지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린차(鱗車)를 준비하겠습니다.”

    소녀는 기뻐하며 허리춤의 영수대 같은 걸 풀어 푸른 빛을 내뿜었다.

    그러자 머리에 뿔이 달리고 푸른 비늘이 돋은 짐승 두 마리가 금실로 치장된 검은 마차를 끌고 나타났다.

    마차에는 가림막이 없고 세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편안한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립이 마차에 오르고 소녀가 따라 올랐다.

    “어디로 가려고 하시는지요?”

    “야양성에서 상점이 많고 교역이 활발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러면 노비가 우선 제강방(帝江坊)으로 모시겠습니다. 마가구에서 가장 번화한 8개의 시장 중 한 곳이고, 이곳에서 거리도 가깝습니다.”

    “굳이 노비라 칭할 것 없네. 같은 수사인데 후배로서 예의만 지키면 될 것이야. 이름이 어떻게 되지?”

    “후배는 호청청이라 합니다. 선배님께서는 청청 혹은 청아라 부르셔도 됩니다.”

    소녀가 조금 놀라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그러지, 가세.”

    마차가 검은 돌이 가지런하게 깔린 길을 달려 제강방 쪽으로 향했다.

    * * *

    낙가구는 면적이 아주 넓어서 황성 범위 밖에도 대규모의 정원이 가꾸어져 있었다.

    제강방이 있는 곳은 마가구와 낙가구의 접경지역으로, 그 사이를 성하인 박란강의 지류 제원강(帝苑江)이 흘렀다.

    강의 좌측이 마가구, 우측이 낙가구로 하얀 돌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통제교(通帝橋)를 지나 제강방에 이르면 마차로는 갈 수 없고 걸어가셔야 합니다. 이는 대황자께서 정한 규정이십니다.”

    마차가 다리에 오르자 마족 소녀 호청청이 송구하다는 듯 말했다.

    “괜찮네.”

    “무엇을 사려고 하시는지요? 워낙 넓고 없는 물건이 없어 그냥 구경하시려면 보름이 지나도 다 못 보실 겁니다.”

    “원래는 천천히 구경하며 돌아다니려 했는데 말이야. 호 수사가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게.”

    “예, 선배님. 제강방이 야양성에서 가장 상가가 밀집한 곳은 아니지만 법보와 기물을 주로 거래하는 통역원(通易院)이나 단약과 재료를 주요 품목으로 하는 견천가(見天街)와 달리 이곳에서는 다양한 제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호청청은 능숙하게 소개를 했다.

    한립은 호청청의 이야기를 들으며 커다란 다리를 수많은 마차들이 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리 사이에는 거대한 수중 짐승들이 화려한 배를 이거나 끌고 지나다녔다.

    “제강방에서 가장 규모가 큰 상가가 ‘류풍각(流風閣)’이온데, 그 배후에 대황자 전하께서 계셔서 물건의 품질이 좋고 가격도 비쌉니다. 다음으로 광원재의 상점이 있는데 규모는 떨어져도 파는 물품만은…….”

    “광원재 본점도 이곳에 있는가?”

    “제강방에 있는 상점은 분점이고 본점은 마가구에 있기는 하나 통역원에 위치해서 거리가 먼 편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 마차가 다리 끝에 이르자 마족 수사들이 앞을 막아섰다.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계속 말해 보게.”

    “예, 제강방 성족의 법보와 재료를 파는 상점은 물론 선역의 기물들을 파는 점포도 있습니다. 그중에 선령각(仙靈閣)이 전문으로 선계 기물을 팔기로 유명하지요. 아, 경물재(經物齋)라는 곳은 가장 희귀하고 이상한 물건들을 골라 파는데, 어떤 물건은 등장하기만 해도 야양성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큼 대단하지만, 또 어떤 물건들은 아무도 용도를 모르는 것도 있답니다.”

    호청청은 한립이 귀 기울여 자신의 말을 듣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곳이로군, 배후 세력은?”

    “물론 있습니다. 야양성에서 비밀도 아니고요. 경물재의 자금은 12황자 석경개께서 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석경개면 오공주 석경연과 같은 어머니를 둔 남매 사이가 아닌가.”

    “맞습니다. 12황자께서도 훌륭한 인재이지요. 생김새도 훤칠하고 성격도 워낙 자유분방해서 어릴 때부터 수련에 관심이 없어 아직 진선경 수행에 머물러 계십니다.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여러 비경과 상고선가의 유적을 찾아 경물재에 적잖은 상품을 대시고요. 야양성을 떠들썩하게 했던 마기 만유호(万幽壺)도 그분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진선 수행으로 그리 위험한 곳만 찾아다닌다면 그 동복 누님인 5공주가 신경을 많이 쓰겠구나?”

    “그렇죠. 듣기로 5공주께서 동생의 곁에 늘 태을옥선 3명을 붙여 놓고 대라경 수사에게까지 돌봐달라 부탁을 해놓았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유롭게 다니실 리 없지요.”

    호청청이 목소리를 낮추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이 시장의 돌로 만든 패루 앞에 이르렀을 때 한립이 걸음을 멈추었다.

    “잘 들었네. 그럼 호 수사는 이만 돌아가도 되네.”

    “예? 선배님…….”

    마족 소녀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합체기 수사가 아는 것이 많구만. 제강방까지 안내해 주었으면 소임은 다한 것이니 더는 따라올 것 없네.”

    한립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자 호청청도 무표정하게 예를 올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한립은 그녀를 등지고 손을 저어 보이고는 홀로 시장으로 걸어갔다.

    그가 군중들 틈으로 사라지자 마족 소녀는 화난 얼굴로 쿵쿵 발에 힘을 주고 마차가 기다리는 다리로 돌아갔다.

    한참 만에 뒤를 돌아본 한립은 그녀가 눈치 있게 그를 미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양옆의 상점을 둘러보았다.

    제강방은 마궁 쪽과 달리 건축양식이 일정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행인들도 많아서 속세와 같은 떠들썩함이 느껴졌다.

    길을 지나는 이들은 인족과 다를 바 없이 약간 비늘이 남아 있다거나 피부나 눈동자 색이 다르거나 하는 등의 마족의 특징만 남아 있었다.

    그중에 인족과 똑같이 생긴 이들도 없지 않아서 한립의 시선을 끌지는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기와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고풍스러운 양식의 3층 누각이 눈에 들어왔다.

    선령각이었다.

    선계의 물건을 팔아서인지 다른 상점과 달리 그리 오가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상가의 문턱을 넘은 한립은 짙은 선령력을 느꼈다.

    대형 진법이 주변의 천지영기를 끌어당겨 이곳에 모아두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유생 차림의 청년이 능숙한 미소를 짓고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찾아…….”

    “손님이랄 것은 없고 어쩌다 마역에 이런 상점을 열게 되었는지 궁금해 들어와 봤네.”

    “선계에도 마족 출신이 섞여 있듯 마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님도 그러지 않으십니까? 저희는 손님처럼 선계에서 넘어오신 선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합니다.”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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