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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17화 (1,674/2,000)

1917화. 우애 깊은 형제

*

석파공은 라타비파를 지긋이 바라보다 담담히 밀어냈다.

“열셋째, 네가 천신만고 끝에 되찾아온 라타비파가 아니냐. 당연히 네가 부황께 아뢰는 것이 맞다. 내 아무리 못나도 동생의 공을 빼앗을 수야 없지.”

“셋째 형님! 제 것이 형님 것이지요. 고집부리지 마세요. 제가 라타비파를 부황께 바쳐서 이로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우가 성역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부황께서는 수시로 아우를 언급하셨다. 내가 보기에 열셋째 아우를 아끼는 것이 틀림없어. 게다가 같은 황자 중 한 명으로서 정당한 계승자격을 지니는데 벌써 포기하려는 것이냐?”

석파공은 인상을 찡그린 석천공을 보고 웃음 지었다.

“형님은 그게 또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진선계까지 가서 라타비파를 구해온 것은 전부 형님을 위해서란 말입니다. 성주의 자리는 한 번도 욕심낸 적이 없어요. 저는 그럴 재목도 못되고요.”

“자신을 그리 박하게 평가하지 말거라. 그간 광원재를 잘 꾸려서 이만큼 성장시킨 것에 부황께서도 흡족해하신다. 나라를 다스릴 능력은 아직 못 되어도 가능성을 보신 것이지. 부황께서 기회를 주시면 결코 거절하지 말거라. 우리는 한 뿌리에서 난 친형제이니 네가 잘 되는 것도 나의 기쁨이다.”

“……대체 요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석천공은 침묵하다 물었다.

“그런 것 아니니 괜한 생각은 하지 말아라. 최근에 깨달은 것인데 성주의 지위가 아무리 중요해도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모든 일에는 인연이 따라줘야겠지.”

석파공이 아무렇지 않고 온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말을 들은 석천공은 크게 놀랐다.

석파공이 평화주의자이기는 했지만, 성주의 직위에 대해서는 집념이 강해서 필생의 소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난 정말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수행이 늘면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뿐이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고 할까.”

“형님, 혹시 대라경 고비를 앞두고 계십니까!”

“그건 아니다. 대라경이 어디 그리 쉬운 경지더냐. 아직 멀었지만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다.”

석파공이 아니라는데 석천공은 여전히 희색이 만연했다.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자신의 셋째 형님이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대라경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도 성주의 지위는 최선을 다해 도전하겠지만 너는 나를 도우려 무리할 것 없다. 만일 네가 나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한다면 내 돌아가신 어머니를 다시 뵈었을 때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머니…….”

“하하, 네가 무사히 돌아온 것이 내게는 가장 경사스러운 일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꾸나. 자,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상세히 들려주거라.”

석파공은 화제를 돌렸고, 석천공도 밝은 얼굴로 진선계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진언문유적을 찾았다가 회선에게 쫓기어 회계로 간 일, 그리고 그곳을 탈출해 십환산맥에서 야양성에 올 때까지 너무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형님이 너무 걱정할까 봐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나, 너무 위험했던 순간은 각색했지만 그래도 석파공의 안색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렇게 힘을 합쳐서 조골진인을 격살하고 야양경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야양성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고요.”

“네가 그런 일을 겪었을 줄은 몰랐다. 전설 속의 회계에까지 다녀오다니. 정말 다채로운 일을 겪고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돌아왔어. 열셋째 아우, 너는 존귀한 황자이고 더없이 중요한 존재다. 앞으로는 그렇게 위험한 일은 삼가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셋째 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석천공은 이렇게 답했지만 일련의 경험들을 읊자니 오히려 피가 뜨거워졌다.

황자로 태어나 주변 사람들이 금이야 옥이야 아껴주며 성장하다 보니 이렇게 수많은 역경을 경험할 일도 많지 않았다.

“수행도 쓸 만하고 시간법칙까지 수련했다는 려비우란 자는 확실히 인재다.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네게 벗으로서 정이 깊은 듯하니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이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벗인데 당연히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지요. 그런데 형님, 흑유왕 일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수락한 일이 형님에게 골치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십환대왕과 마족 황실의 적대관계를 생각하면 황자가 사사로이 흑유대왕과 결탁한 일이 알려지면 좋을 것이 없었다.

“대라경 존재와 결맹을 맺는 일은 나쁠 것 없다. 흑유왕이 벌써 사람을 보내 나와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고. 그저 교활한 성격이라 무슨 목적이 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형님에게 나쁜 일만 아니면 안심입니다.”

“살쇠도 이겨냈다니 한동안은 수련에 힘써서 경지를 공고히 하도록 해라. 너를 대신해서 월신제단(月神祭壇)에 들어갈 수 있게 준비를 해두었으니, 부황께서 출관하시기 전에 태을경에 이르도록 하고.”

석파공은 진지하게 수련 이야기를 꺼냈다.

“부황께서 또 폐관에 들어가셨습니까?”

석천공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래, 근래 들어 자주 폐관을 하시는구나. 무슨 비술공법을 익히시는 것인지…….”

“그러게요, 이상한 일입니다.”

석파공과 석천공의 눈빛이 달라졌다.

“부황에 대해서는 우리가 거론할 일이 아니다. 너도 야양성으로 서둘러 돌아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이니 돌아가 푹 쉬거라.”

“형님, 이 라타비파는 정말…….”

석천공이 아직 들고 있던 비파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네가 찾아온 것이니 직접 부황께 바치라고. 이미 부황께서 네가 라타비파를 가지고 돌아온 걸 아시니 내가 대신해서 바친다 해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실 거다.”

석파공이 단호하게 말하자 석천공도 한숨을 쉬고 비파를 거두었다. 아우가 나가고 고요해진 대청에 석파공만 남아 있었다.

스슷.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서 그림자가 뱀의 형태를 이루고 솟아올라 보라색 장포를 입은 유약한 청년으로 변했다.

“3전하, 려 수사에게 장정원(長亭苑)내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유약한 청년이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그래……. 열셋째 아우의 벗이라 하나 선역의 사람이니 방심할 수 없다. 감시를 소홀히 하지 말거라.”

“존명!”

유약한 청년이 검은 그림자로 변해 바닥으로 사라지고 석파공이 홀로 안쪽으로 걸어갔다.

* * *

3황자 저택 깊은 곳의 별채는 정자와 누각, 화원 그리고 연못까지 갖추어져 있어 진선계의 성궁이 부럽지 않았다.

이곳은 석파공이 한립을 위해 준비해준 거처로 별채 전체에 특수한 금제가 펼쳐져 있어 대량의 영력이 바깥에서 주입되어 천지영기가 농염했다.

별채에 있는 방에서 한립이 가부좌를 틀고 수결을 맺고 있었다.

다채로운 빛들이 그의 손에서 날아가 다섯 겹의 금제를 펼치자 그제야 마음을 놓은 한립은 은색 빛의 문을 열어 화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제혼은 아직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 석천공을 통해 대제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석천공을 떠올린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석천공과 가까운 사이라 해도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야양성의 형세가 복잡하고 황자들끼리의 경쟁이 심해서 그를 보호해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벌써 몇몇 황자들의 심복을 죽여 말려들 수밖에 없을 듯했다.

한립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당장 방법이 생각나지 않으면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대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조골진인의 검은 반지를 꺼내 들었다.

석천공과 서둘러 이동하느라 반지를 살필 시간이 없었는데 대라경 존재가 지니고 있던 저물법기라 기대가 되었다.

그는 눈을 감고 반지 안을 살피다 거의 반 시진 만에 눈을 떴다.

푸른빛이 사람 키만 한 하얀 돌기둥 8개와 하얀 뼈 방패 하나 그리고 검은 조각을 품고 나타났다.

8개의 하얀 돌기둥은 상대의 고골영역 안에서 보았던 백골경관이었다.

조골진인의 본명 마기로 대라경 수사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배양을 해서 고골법칙이 충만했다.

백골경관을 조종할 수는 없어도 그 안의 법칙의 힘은 이용할 수 있었다.

미소를 머금은 한립은 현천호리병을 꺼내 녹색 빛으로 8개의 백골경관을 넣어두었다.

쉭! 하고 안으로 빨려 들어간 백골경관들이 안에서 바스러져서 하얀 빛덩이 8개가 떠올랐다.

‘저건!’

그가 현천호리병에서 의식을 불러내려다 하얀 고골법칙 덩어리들이 서서히 융합되는 것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빛덩이들이 3배는 큰 하얀 빛구슬로 응결해서 그 안에 희미하게 백골 허상을 품고 있었다.

그 강렬한 법칙 파동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반가운 일이었다.

이 정도 법칙의 힘이면 대라경 수사에게도 위협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었다.

한립은 현천호리병을 넣어두고 백골 방패를 들어 그곳에 빼곡하게 새겨진 작은 문자들을 읽어 보았다.

백골진인이 수련하던 <고골진경(枯骨眞經)>과 수련 상의 깨달음이 적혀 있었다.

아직 손에 넣은 시간법칙 관련 경전도 다 습득하지 못했기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는 깨달음을 위주로 내용을 파악하고는 뼈 방패를 넣어두고 마지막 검은 조각판을 들었다.

손바닥만 한 조각판에는 삼두육비의 마신이 이상한 자세로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볼록하게 새겨져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던 한립은 미간에서 수정빛을 방출해 조각에 불어넣었다.

웅.

검은 마신 조각이 살아나기라도 한 듯 손과 발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다양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자세가 바뀔 때마다 조각 위로 개미같이 작은 글자들이 떠올라 무언가를 설명했는데 고대 문자로 보이는 글자를 한립은 알아보지 못했다.

총 12가지 자세가 나타날 때마다 배후의 문자도 12번 바뀌었다. 그는 서둘러 하얀 옥간을 꺼내 알 수 없는 문자들을 옮겨 적어 두었다.

검은 뼈 반지 안에는 이밖에도 수많은 재료와 마원석, 단약 등이 들어 있었다. 그리 귀하지 않은 것들인데 수량이 너무 많아 정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마원석이 2백만 개가 넘어서 마역에 머무는 동안 여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해 수사, 저물 반지 안을 정리해 주셔야겠습니다. 이 안에서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가져다 쓰시고요.”

한립은 해 도인을 불러서 검은 뼈 반지를 내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해 도인은 반지를 받아들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가 더 이상 화지 공간에 머물지 않고 방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한립은 별안간 방 밖 어딘가를 돌아보며 눈썹을 꿈틀했다. 찰나의 느낌이었지만 지극히 약한 기운이 그를 엿보고 있었다.

한립은 금방 시선을 거두고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야양성에 갑자기 나타난 선계인을 석파공이 감시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 * *

이튿날 아침, 누군가 별채의 문을 쾅쾅! 두드렸다.

한립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려 수사, 밤사이 잘 쉬셨습니까?”

석천공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편안하게 잘 쉬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 그건 되었습니다. 야양성에 오랜만에 돌아오니 할 일이 쌓여 있어서요. 아침부터 찾아온 것은 할 말이 있어서 입니다.”

“말씀하시지요.”

“그게……. 제혼 수사의 치료를 돕는 일에 대해 셋째 형님께 말씀드렸는데, 대제사가 큰형님 파에 들어가 도움을 청하기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형님이 최선을 다해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걱정은 마십시오! 예상보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저도 재촉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니고 있던 중품 자양난옥이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길어야 일이십년밖에는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 신경을 좀 써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 좋은 용건일 거라 직감했던 한립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양난옥이라면, 셋째 형님께서 이미 사람을 보내두었습니다. 곧 구해드릴 테니 안심하세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수사와 약속한 일은 제가 꼭 지킬 테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겁니다.”

석천공은 자신 있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태을경에 도전하기 위해 얼마 동안 폐관 수련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으면 이곳의 시종에게 분부를 내려주시면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석 수사의 자질에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한립이 웃으며 미리 축하했다.

“하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석천공이 돌아가고 한립은 약간 굳은 얼굴로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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