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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16화 (1,673/2,000)
  • 1916화. 도움

    *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는데 기둥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말도 안 돼.”

    힘에 자신이 있던 나철이 전신을 팽창해 구리기둥과 같은 두꺼운 팔뚝에 힘을 주었다.

    웅웅!

    보라색 사슬이 미친 듯이 떨렸지만 한립은 고요히 서 있기만 했다. 주변의 웅성거림과 자신을 향한 뒷말에 8황자가 난색을 표했다.

    마족은 힘을 숭상해서 강자에게 이끌리기 마련이었다.

    “하하, 형님, 제 호위를 데려가시려면 마음대로 하시지요. 다만 이런 하잘것없는 수하들을 시켜 데려가시려면 오랜 세월이 걸리겠습니다.”

    성을 코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해 짜증이 나던 석천공은 이제야 막힌 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이 못난 것들이! 비켜라!”

    8황자가 나철 앞에 나타나 직접 보라색 사슬을 손으로 감아 끌어당겼다. 나철과 그의 수하들이 부끄러운 얼굴로 물러났다.

    “인족치고 힘이 좋다만 거기까지다.”

    8황자가 뭐라 중얼거리든 한립은 거기가 딱 제자리라는 듯 뒷짐을 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웅웅웅.

    눈빛이 매서워진 8황자가 두 팔에 금색 빛덩이 3, 40개를 일으켰다.

    ‘저건…….’

    한립이 눈을 번득였다.

    쿠쿵.

    요란한 빛이 번진 8황자의 두 팔에서 거대한 금색 팔 허상 두 개가 빠져나와 보라색 사슬을 움켜쥐고 힘껏 당겼다.

    무시무시한 힘이 사슬을 당겨 주변 허공이 진동했다. 석천공은 어쩔 수 없이 몇 걸음 물러나며 우려를 드러냈다.

    한립은 복부와 앞가슴에서 36개의 별빛을 일으켜 두꺼운 빛의 장막으로 몰려드는 검은 기운을 잘라냈다.

    그러자 왜곡되던 공간이 그의 옆에서만은 멀쩡해졌다.

    놀란 기색이 스친 8황자가 기합을 넣으며 복부와 앞가슴에서 4, 50개의 금빛을 일으켰다.

    금빛이 퍼지며 순식간에 거대한 금색 마신으로 변한 8황자는 무한한 힘을 낼 수 있는 것 같았다.

    마신이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보라색 사슬을 끌어당겼다.

    그걸 본 한립도 안색이 달라져 수결을 맺었다.

    파아앗.

    자금색 빛을 터트린 그의 주변으로 진룡, 채봉, 거원 등 여덟아홉 개의 진령 허상들이 떠올라 방대한 파동을 일으켜 휘휘 돌풍을 만들어냈다.

    두 거대한 힘이 충돌에 땅이 흔들리고 성벽이 진동을 했다.

    챙강!

    보라색 사슬이 뜯어지면서 8황자가 쿵쿵쿵! 세 걸음을 물러섰지만 잠시 휘청거렸을 뿐 한립은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이를 바라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들 눈에 적수가 없을 것 같던 8황자 전하가 겨우 인족 한 명을 어쩌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이런, 어찌 이렇게 약해 빠진 사슬을 씁니까. 형님, 도움이 필요하시면 다음에는 우리 광원재에 연락을 주세요. 좋은 사슬을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석천공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8황자를 동정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한립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저 성격에 크게 한 번 사고를 칠 날이 있겠구나.’

    한립은 그걸 보고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석천공이 있으니 목숨을 잃은 일은 없겠으나 이 상황을 어찌 수습할지는 어려운 문제였다.

    얼굴이 파랗게 변한 8황자가 금빛을 폭발하며 무언가를 하려 했다.

    “오늘따라 성문 앞이 시끌벅적하다 했더니.”

    이때 온화한 목소리가 들리고 평범한 암청색 요수 마차가 성안에서 달려 나왔다.

    석천공이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신이 나 마차로 달려갔다. 반대로 8황자는 냉랭한 시선으로 금빛을 거두었다.

    그가 만들어 놓은 금색 마신이 허공으로 흩어져 한립도 수결을 맺어 진령허상들을 거두었다.

    마차에서 내린 백발의 사내는 석천공과 꽤 닮아 있었고 달빛을 닮은 장삼을 걸쳐 속세의 수려한 공자처럼 보였다.

    “셋째 형님!”

    한달음에 달려가 백의 사내의 손을 잡은 석천공이 감동에 차 외쳤다.

    “열셋째 아우, 드디어 돌아왔구나.”

    백의 사내의 눈에도 희색이 언뜻 스쳤으나 금방 평온해졌다.

    “3전하를 뵙습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이들이 분분히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나타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에 8황자는 코웃음을 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3황자, 석파공.’

    한립은 백의 사내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평복을 입고 개인적인 용무로 나온 것이니, 모두 예를 거두어도 된다.”

    석파공은 사람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힘이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석파공은 기이한 기운을 발산해서 한립도 상대의 구체적인 수행을 파악할 수 없었다.

    “여덟째 아우, 야양성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모두가 안심하고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지만, 괜한 소란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이 일은 이대로 마무리 짓도록 하지.”

    석파공이 8황자를 향해 차분히 말했다.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만 저자는 선역 수사라 규정에 따르면 신분을 증명해야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열셋째가 함부로 선역 수사를 대동해 안으로 들어가려 해서 막은 겁니다.”

    8황자는 석파공을 어려워하며 변명했다.

    “여기 선역 수사의 이름은 려비우, 열셋째 아우의 호위이다. 내 이미 부황께 보고해서 신분을 증명할 신물을 받아왔다.”

    석파공이 보라색 영패를 8황자에게 날렸다.

    8황자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영패를 받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석파공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이자 영패가 8황자의 손에서 사라져 한립 앞으로 이동했다.

    얼굴이 굳은 8황자는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려 수사, 자네의 신분 영패일세.”

    석파공이 한립을 향해 웃음 지었다.

    한립은 영패의 한 면에는 두 마리의 금룡 도안이, 다른 면에는 자신의 진짜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동공을 수축했다.

    그는 오늘에서야 진짜 얼굴을 드러냈건만 이미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지.”

    석파공은 마차에 오르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석천공과 함께 성안으로 걸어갔다. 한립은 마음이 복잡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웅!

    성문 위의 돌 거울이 맑게 울며 세 사람을 비추고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8황자는 멀어지는 그들을 서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군중에 섞여 있던 회색 의복을 입은 누군가가 재빨리 골목 구석으로 들어가 보라색 원반을 꺼내 뭐라고 속삭였다.

    회색 의복의 사내는 빛이 사라진 보라색 원반을 집어넣고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세 사람은 빠르게 야양성 안으로 진입했다.

    성문에서 이어진 대로는 열댓 명이 나란히 걸어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넓었고, 양옆으로 저택들이 연달아 있어 지나다니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행인들은 보라색 장포를 걸친 황족의 시종들이나 보라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개를 든 한립은 백 장 높이에 일정 간격을 두고 검은 구슬이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구슬에서 검은 주술문자들과 문양이 흘러나와 파문을 남기고 허공에 녹아들었다.

    “진법 대사가 설계한 금공금제입니다. 대라경 존재라도 둔광을 일으키면 강제로 억제할 수 있지요. 성안에서 비행하는 것은 그만큼 중죄라서 잡히면 엄벌을 받게 됩니다.”

    석천공이 한립이 구슬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제 생각이 짧아서 여덟째 형님께 려 수사가 잡혀갈 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립을 보고 석천공이 미안해하며 말했다.

    “그가 일부러 시비를 걸려 한 것이니 우리가 무슨 준비를 했어도 아무 일 없이 성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기는 합니다. 셋째 형님이 제때 와준 것이 다행이지요!”

    석천공은 곁의 석파공을 향해 웃음 지었다.

    “너는 매사에 너무 조급한 것이 문제다. 미리 내게 언질을 주었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석파공이 한숨을 내쉬며 아우를 나무랐다.

    “형님 말씀이 다 맞습니다! 다음에는 조심할게요.”

    대답은 했지만 석천공은 충고를 마음에 담아 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너를 어찌해야 할지…….”

    석파공이 그런 아우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형님, 제가 이번에…….”

    “이곳은 대화를 나눌 만한 곳이 못 된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 이야기하자.”

    석천공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자 석파공이 그를 잡아 마차에 태웠다. 이곳은 황성이라 황자들과 동석할 수 없어 한립은 마부와 함께 앉아야 했다.

    요수 마차의 속도는 꽤 빨라서 낙가구 깊은 곳의 ‘낙형공부’라 적힌 거대한 저택 앞에 금방 도착했다.

    정문만 해도 예닐곱 명이 동시에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넓었고, 양옆에 두 개의 거대한 사자 조각상이 새워져 있었다.

    한립은 저택을 보고 석파공이 마족에서 누리는 지위에 대해 생각했다.

    마차에서 내린 석파공은 석천공과 한립을 데리고 바로 대청으로 향했다. 저택 안은 말 그대로 휘황찬란해서 사치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려 수사, 제가 황자인지라 어쩔 수 없이 이런 저택에 머무는 것이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지는 말아주십시오.”

    석파공이 온화하게 웃으며 한립에게 존대를 했다.

    “아닙니다. 저는 이종족 수사인지라 이곳의 예를 잘 모르니 3황자 전하의 이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립도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제 아우를 지금까지 지켜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혹시 원하시는 바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저는 석 수사와 진작 약조한 바가 있으니 전하께서는 따로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을 들은 석파공은 석천공을 힐끗 보고는 그 일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먼 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 겁니다. 여봐라, 려 수사를 방으로 모시거라.”

    석파공의 명에 보라색 시종 복장을 한 청년이 걸어들어왔다.

    뽀얀 피부를 지닌 마른 사내는 허약해 보였지만 뜻밖에도 태을경 초기의 수사였고 극독을 품은 뱀처럼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려 수사,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유약한 청년이 한립을 향해 인사를 했다.

    한립은 그들끼리 나눌 말이 있음을 알고 그를 따라나섰다.

    “려 수사는 그 심성이나 실력이 평범하지 않구나. 어디서 찾아낸 인물이냐? 믿을만한 자는 확실한 것이야? 방금 그가 말한 약조는 또 무엇이고.”

    한립이 멀어지자 석파공이 연달아 물었다.

    “진선계에서 사귀게 된 벗입니다. 여러 번 제 목숨을 구해줄 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고, 방금 그가 말한 약조는…….”

    석파공은 그들이 나눈 약속에 관해 이야기했다.

    “네 목숨을 구해주었다면 당연히 그 보답을 해야겠지. 자령이라는 여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겠다만 대제사에게 청해 사람을 구하는 일이 문제로구나.”

    “예? 셋째 형님과 대제사의 친분을 생각하면 한 번 도와달라 청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줄 알았는데요?”

    “그건 예전 이야기다. 수백 년 전 부황께서 제사전(祭祀殿)의 일을 전적으로 큰형님께 맡긴 뒤로 대제사는 완전히 큰형님 사람이 되었다. 려비우의 사람을 구해달라 부탁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허나 내 최선을 다해 기회를 만들어 볼 것이니 미리부터 걱정할 것은 없다.”

    “부황께서 제사전을 큰형님에게요? 성 방어는 여덟째 형님에게 맡기시더니 대체 무슨 생각이랍니까? 설마 큰형님을 성주로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석천공의 표정이 달라지며 벌떡 일어섰다.

    “큰형님이 어찌 되었든 장자가 아니더냐. 내 앞에서는 몰라도 밖에 나가서는 이 일에 대해 함부로 입에 담지 말거라. 큰형님께서 수백 년 전 흑로역(黑瀘域)의 흑수산맥으로 가 도적단 흑수맹(黑水盟)을 소탕한 일로 부황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제사전을 맡기셨다. 허나 부황이 무슨 생각으로 그리하셨는지는 나도 알 수 없구나.”

    석파공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셋째 형님. 제가 이리 오래 성역을 떠나 그저 놀러만 다닌 것은 아닙니다!”

    말을 마친 석천공이 손바닥을 펼쳐 팔뚝 크기의 은색 비파를 불러냈다.

    “라타비파!”

    “바로 그겁니다!”

    석파공이 보물을 알아보고 눈을 빛내자 석천공은 대뜸 그걸 내밀었다.

    “뭐 하는 것이냐?”

    “큰형님이 부황의 환심을 샀듯이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라타비파는 성족의 보물이지요. 오래전에 누군가에게 빌려준 뒤로 잃어버렸던 물건을 형님께서 바치면 큰 상이 따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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