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15화 (1,672/2,000)
  • 1915화. 8황자

    *

    “성역의 도성이 명불허전입니다.”

    한립은 거대한 야양성을 눈앞에 두고 탄식했다.

    “하하, 야양성은 건축된 지 아주 오래된 성이라 개보수를 거치면서 오늘의 규모에 이른 겁니다. 저기 하얀 산맥이 백란산(白瀾山)이고, 거대한 강이 백란강(白瀾江)입니다. 둘 다 극히 농염한 성맥을 지니고 있어 성산이나 성하라고 불리지요.”

    석천공의 말에 진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성안에는 수도자와 범인들이 섞여 살아갑니까?”

    “예, 야양성의 거주민 중 다수가 각 종족의 평범한 족인들과 저계 수사이고 가장 외곽의 흑천구(黑天區)에서 머뭅니다. 연허기 이상의 중계 수사들은 보통 각자의 동부나 가문이 있어 중간 지역인 마가구(摩訶區)에서 임시 동부를 빌려 쓰지요.

    마가구에는 성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광원재 본점도 거기 있습니다. 가장 안쪽 낙가구(落迦區)는 황족과 진선경 이상의 지위가 높은 이들이 머무는 곳이라 일반 사람들은 진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석천공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야양성 남쪽이라 이곳으로 진입하면 흑천구와 마가구를 지나야 황성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금공금제가 있어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북쪽으로 더 가서 성으로 들어가지요.”

    그들은 성벽을 따라 날아가 야양성 북쪽 입구에 도착했다. 석천공이 가장 잘 아는 곳이기에 한립은 이견이 없었다.

    야양성은 규모가 큰 만큼 동서남북으로 적잖은 입구가 있었는데 모두 길게 줄을 서 있었지만, 북쪽 입구는 모여 있는 사람의 수가 현저하게 적었다.

    “려 수사, 야양성은 출입하는 이들에 대해 검문이 엄격해서 각 문에 대천경성금제(大千鏡聖禁制)가 걸려 있습니다. 모든 위장을 가려내지요.”

    수결을 맺어 검은빛으로 전신을 감싼 석천공이 원래 얼굴을 드러냈다.

    성문 위에 거대한 잿빛 돌 거울이 떠서 휘황찬란한 빛으로 드나드는 이들을 일일이 비추고 있었다.

    눈에서 보랏빛을 번득인 한립은 회색 거울을 지긋이 바라보다 침음했다.

    ‘어쩔 수 없겠구나.’

    잠시 후, 수결을 맺은 그는 푸른빛에 휩싸여 뼈 비틀리는 소리를 냈다.

    “려 수사의 진짜 얼굴은 이랬군요. 성역이 진선계 사람들을 배척하기는 하지만 제가 있으니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석천공은 한립의 진짜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 봐두고 가슴을 팡팡 치고 앞섰다.

    한립은 석천공이 뭔가를 알아차린 것 같지 않자 안심하고 뒤따랐다.

    대문 앞에 있던 보라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 중 한 무리가 갈라져 나와 그들 앞을 막아섰다.

    “이곳은 황성의 입구입니다.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임을 모르십니까?”

    “헉, 선계 수사!”

    누군가 경고를 하는데 다른 한 명이 한립을 보고 적의를 드러냈다. 그 소리를 들은 병사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몇몇은 이미 그를 향해 병기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선역 수사가 감히 야양성에 침입하려 하다니, 비열한 첩자를 잡아라!”

    어디선가 거구가 나타나 명을 내렸다.

    그러자 구레나룻을 기른 거한이 흑자색 갑옷을 두른 맹수처럼 달려 나왔고, 그 옆의 자갑 병사들은 일제히 보라색 사슬을 들고 한립을 포위했다.

    “저기서 갑자기 웬 소란일까요?”

    “진선계 수사가 나타나서 나철 대장이 첩자라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성문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소란을 듣고 몰려들었다.

    “무엄하다! 감히 내 수행원을 건드리려 하다니, 썩 물러나지 못할까!”

    얼굴을 굳힌 석천공이 소리쳤다.

    “네가 누구길래 성문 호위들의 업무를 방해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네 놈도 같이 잡아가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낱낱이 밝혀내야겠구나.”

    구레나룻 사내가 멸시하듯 석천공을 훑었다.

    “난 석천공이다. 겨우 호위대장이 내게 그따위로 말을 하다니!”

    석천공이 대노해 소리를 높였다.

    “석천공이면 13황자의 존함이 아닙니까? 아주 오래전에 야양성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13황자를 본 사람이 있습니까? 진짜일까요?”

    “저야 본 적이 없습니다. 원래 두문불출하고 야양성에 있을 때도 공식적인 행사에도 잘 나서지 않는 분 아니었습니까.”

    ‘석천공’이란 이름에 몰려든 관중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13황자? 하하하! 13황자는 야양성은 물론 성역을 떠나 성주 대인의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시다. 네가 13황자라면 봉천령을 꺼내 신분을 증명하면 될 것 아니냐?”

    구레나룻 거한은 입꼬리를 비틀고 냉소했다.

    “무엄하다. 네가 뭐라고 내가 신분을 증명해야 한단 말이냐!”

    봉천령은 성주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내린 신분증명용 영패로 통령마보라 성주의 힘이 일부 봉인되어 있어 위기의 순간 주인을 보호했다.

    회계에서 두 도조의 전투에 휘말린 석천공을 구하기 위해 봉천령에 봉인된 성주의 힘이 발동되어 간신히 라타비파를 조종해 한립과 마역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봉천령은 힘을 다하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왜, 없어서 꺼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13황자를 사칭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이놈들을 당장 잡아들여라.”

    구레나룻 거한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트려 손을 저었다. 자갑 병사들이 정말 한립과 석천공을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눈을 번득였다.

    “네놈들이 정녕 죽고 싶구나!”

    석천공이 노기등등하게 손을 뻗었다.

    흑자색 거대 손이 공중에서 나타나 사슬들을 붙잡아 내팽겨치자 동시에 그것을 들고 있단 병사들이 입에서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도적놈들이 병사들을 습격해! 반란이라도 하려는 것이냐!”

    구레나룻 사내도 열을 받아 손바닥을 수직으로 세워 허공을 갈랐다.

    휘잉!

    검은 마기 바람이 날카로운 발톱처럼 석천공의 머리로 떨어졌다. 주술문자들이 휘날리는 마풍의 냉기에 공기가 얼어붙고 있었다.

    눈빛에 불쾌감이 진해진 석천공이 손끝을 튕겼다.

    피슉!

    은빛이 그의 손끝에서 날아올라 검은 마풍에 구멍을 뚫고 그대로 구레나룻 거한의 얼굴로 날아갔다.

    안색이 달라진 거한이 뒤로 피하며 입에서 검은빛을 뿜어 은빛과 충돌하게 했다.

    차캉!

    검은빛이 두 동강 나며 새까만 비도 조각으로 변하고, 은빛은 멈추지 않고 구레나룻 사내의 머리를 뚫으려 했다.

    석천공은 정말 상대를 죽일 생각이었다.

    황자가 다른 곳도 아니고 야양성 입구에서 겨우 호위대장에게 이런 대접을 받다니 이런 치욕이 없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대로 혼을 내주지 않으면 그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3황자의 체면에도 흠집이 날 터였다.

    그 순간, 금빛이 날아들어 은빛을 뱀처럼 감쌌다.

    파칙!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은빛은 산산조각이 나서 흩날렸다.

    “하하하, 13번째 아우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그간 소식이 없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무사한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웃음소리 끝에 보라색 장포를 걸친 덩치 큰 청년이 나타났다.

    거구의 나철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근육이 솟아 있어 황금색 피부를 지닌 조각상 같았다.

    석천공은 그를 알아보고 표정이 가라앉았다.

    “진짜 13황자였나 봅니다!”

    “그러니까 어쩐지 백발인 것이 눈에 익다 했더니!”

    주변 구경꾼들이 수군거리며 석천공을 다시 보았다.

    동시에 그들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구레나룻 거한을 동정 반 흥미 반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서 그리 화가 난 것이야. 나철을 죽이려 하다니.”

    덩치 큰 청년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여덟째 형님, 저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자를 모욕했고,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무고한 사람을 끌고 가려 했습니다. 이게 죽을죄가 아니란 말입니까?”

    석천공이 냉랭히 말했다.

    ‘8황자…….’

    한립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는 길에 들은 바에 따르면 팔황자는 대황자 파에 속해 있었다.

    한립은 팔황자를 훑고 눈썹을 끌어올렸다.

    태을경 중기의 수행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태산과 같은 위압감을 주는 육체가 특이했다.

    마족의 황자로 태어나 천부적인 신체 능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공법과 수련자원을 아낌없이 지원받아 육체적인 능력만 겨룬다면 그도 이길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8황자 전하께 아룁니다. 저는 성주의 낙가구로 진입하려는 자들은 반드시 신분증명을 확인해야 한다는 엄명을 받아 그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저는 13전하의 얼굴도 모르는데 전하께서 이에 따라주시지 않으니 신분을 오해하여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나철은 8황자를 향해 급히 해명했다.

    “허허, 아우가 오해한 것 같구나. 나철은 네가 야양성을 떠난 다음 대장직을 맡게 되어 너를 몰라본 것이다. 그동안 충실하게 맡은 바 책무를 다했고 내 수하이기도 하니 이 형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봐주는 것이 어떠하냐?”

    “형님의 수하라고요? 부황께서 성을 지키는 병사들을 형님께 지휘하라 하셨단 말입니까?”

    “그래, 손이 가는 일이 많기는 하다만, 부황께서 친히 명을 내리셔서 나도 따를 수밖에.”

    8황자가 이를 씩 드러내고 웃자 석천공은 그저 굳은 얼굴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철, 어서 사죄를 드리거라. 열셋째 아우가 아량이 넓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13황자님, 제가 알아보지 못하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나철은 겉으로는 공손하게 사죄하는 듯 보였지만 입가에는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석천공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주위를 훑어보고 그냥 성안으로 들어갔다.

    8황자의 실력은 그보다 훨씬 위였고 3황자도 없는데 여기서 일을 키워봐야 상황만 더 나빠질 것이다.

    “잠깐.”

    한립이 담담히 그를 따라가려는데 8황자가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일입니까?”

    석천공은 한립과 함께 멈춰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우는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진선계 수사는 나와 잠시 가야겠네.”

    8황자는 예상대로 호의적이지 않은 눈빛으로 한립을 가리켰다. 기다렸다는 듯 나철이 손짓하자 자갑 병사들이 한립을 포위했다.

    그걸 본 한립의 눈빛에도 노기가 스쳤다.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은 제 호위입니다!”

    당연히 석천공도 크게 화를 냈다.

    “아우, 부황의 지엄한 명이 있었다. 아우야 황자니까 오랫동안 성역을 떠났다가 돌아왔어도 자유롭게 야양성을 출입할 수 있지만 진선계 호위는 아니지. 내 야양성의 안전을 위해 저 자에게 다른 목적은 없는지 알아봐야겠어.”

    8황자는 실실 웃는 얼굴을 하고는 석천공이 거절하지 못할 명분을 내걸었다.

    “형님, 이건 해도 너무 하십니다!”

    “난 맡은 일을 하는 것뿐이니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여봐라, 저자를 끌고 간다. 내가 직접 심문할 것이다.”

    8황자의 명에 굵직한 사슬들이 날아가 한립의 몸을 휘감았다.

    한립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팔이 사슬에 휘감기도록 꼼짝하지 않았고, 그걸 본 8황자는 왠지 모르게 실망한 눈치였다.

    상대가 반항하면서 병사들을 다치게 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때려눕혀 석천공에게 다시 한 번 수모를 줄 생각이었다.

    “끌고 가라!”

    이런 생각을 하며 8황자가 걸음을 돌렸는데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슬을 던진 자갑 병사들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끌어당기는데 한립은 바닥에 박힌 못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구경꾼들이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병사들을 보고 작게 비웃음을 흘렸다.

    “뭐 하는 것이냐! 나철 네가 끌고 오거라!”

    8황자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존명!”

    힘차게 답한 나철이 다른 병사들보다 몇 배는 굵은 보라색 사슬을 던져 한립을 휘감았다.

    한립은 이번에도 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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