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화. 끈질긴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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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80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솨아아-
먹처럼 새까만 바다 위에 높다란 섬을 등에 짊어진 거대 고래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평평한 섬에는 초목이 무성했고 정자와 누각들이 있었다.
그 중앙의 작은 산 위에 두 사람이 앉아 바닷바람을 맞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퍽 한가로워 보였다.
“우리 두 사람이 원유경도(遠遊鯨島)를 통째로 빌린 것은 좀 사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왼편에 푸른 청포를 입고 앉은 한립이 술잔을 들며 웃음 지었다.
“려 형도 참 이게 다 누구 때문인지 아시면서! 여기 펼쳐진 진법이 천지영기를 흡수하고 천지마기를 막아주기 때문에 제가 빌린 것 아닙니까.”
“좋기는 하지만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하, 우릴 막고 싶어도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막을 게 아닙니까.”
“수사의 큰형님과 다섯째 누님도 만만한 인물들이 아니니 그간 편히 왔다고 방심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들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이제 묵해역(墨海域)이 코앞이니 야양성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되겠지만 너무 몸을 사릴 것은 없지요.”
석천공은 맛좋은 술을 가득 따라 마시며 활짝 웃어 보였다.
크오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 아래의 거대 고래가 우렁차게 울었다.
석천공은 바닷속을 내려다보며 긴장했지만, 또 불길한 소리가 들어맞을까 봐 아무 말 없이 한립을 살폈다.
“물속에 사는 거대 요수에 불과합니다. 수행도 금선 최고봉 수준이고 그리 호전적인 성격도 아닌 듯싶어요.”
한립이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바다에서 부글부글 물거품이 올라오며 검은 물결이 치고 있었다.
새까만 물방울 속에서 나타난 하얀색 해파리는 그들이 탄 고래보다 몸집이 컸고, 반투명한 몸이 밝게 빛나 바다에 뜬 거대한 등불 같았다.
“명심수모(明心水母)! 흑해역 심해에서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쩐 일로 수면에…….”
석천공이 눈을 가늘게 뜨고 깜짝 놀라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한립은 당장에 안색이 달라졌다.
“이런, 어서 피해야 합니다!”
금빛을 일으킨 한립은 진언보륜을 급속도로 역전하며 어리둥절한 석천공을 잡아채 사라졌다.
그들이 고공으로 솟구쳤을 때 거대 해파리가 섬을 짊어진 거대 고래와 충돌했다.
콰앙!
밝은 빛을 발산한 해파리는 놀랍게도 그대로 폭발했고, 동시에 거대 고래의 체내에서 굉음이 들리고 크고 작은 뼈들이 살점을 뚫고 한립과 석천공을 향해 쇄도했다.
고공에서 몸을 가눈 한립과 석천공은 각자 주먹을 아래쪽으로 뻗었다.
쿠쿵!
푸른 거대 손과 은색 거대 손이 분홍 살점이 묻은 뼛조각들과 맞부딪쳐 고래의 뼈를 가루로 만들었다.
그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그 가루 속에서 하얀 인영이 빠져나와 손을 펼쳤다.
하얀빛의 장막이 한립과 석천공을 둘러싸고 음산한 귀기(鬼氣)가 흐르는 하얀 안개를 퍼트리고 있었다.
안가가 뿌연 와중에 멀리 하얀 백골 탑들이 솟아올라 그들을 향해 몰려들었고, 그걸 발견한 한립과 석천공의 안색이 대번에 달라졌다.
“네까짓 놈들이 노부를 가지고 놀았더냐. 너희들의 뼈를 갈아 마셔도 이 분을 씻어내지 못할 것이다!”
익숙한 목소리가 멀리에서 들렸다, 가까이에서 들렸다 하며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제길, 조골노귀가 쫓아왔구나. 끈질긴 노인네!’
석천공은 불평을 안 할 수 없었다.
한립도 누가 나타났는지 알고는 서둘러 구유마동을 일으켜 사방을 경계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광경이었다.
사방에 백골 탑이 서서 탑을 이룬 백골들이 뻥 뚫린 눈에서 음울한 귀화를 번들거리고 있었고, 여덟 개의 탑 꼭대기에는 고계 수사로 보이는 옥처럼 생긴 해골 머리가 박혀 있었다.
각각의 탑들이 괴이한 백골진법을 이루고 음산한 기운을 내뿜어 한립과 석천공의 체내 선령력 흐름에 영향을 끼쳤다.
분노한 대라경 수사를 앞에 두고 조금이라도 방심을 할 수는 없었다.
한립은 금색 빛의 장막을 퍼트려 수백 장 범위를 시간영역으로 만들었다.
하얀 안개의 흐름이 느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온이 서늘했고 시야는 어둑했다.
“오늘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노호성을 쫓아 고개를 숙인 한립은 아래쪽 안개 속에서 핏빛이 솟구쳐 거대한 지옥 불구덩이를 만들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용암 속에는 열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머리 없는 백골들이 겹겹이 쌓여 그 안에서 발버둥 치며 참혹한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여덟 개의 백골탑 지붕에는 각기 다른 해골 머리들이 불가의 주술문자 같은 것을 만들어내 움직이고 있었다.
덜그덕……. 덜그덕…….
해골의 턱뼈가 움직이며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려 형, 조골노귀의 백골영역은 조물경에 이른 매우 강력한 영역입니다. 어쩔 수 없이 기회를 살피다 흩어져 살길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상대도 우리가 달아날 것을 예측하고 있을 겁니다. 쉽지 않을 거예요.”
석천공의 말에 한립은 씁쓸하게 답했다.
조물경 영역은 예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조골진인의 영역이 주는 압박감은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옵니다.”
한립이 경고를 한 뒤,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핏빛 용암이 분출되어 무수히 많은 머리 잃은 백골을 품고 날아들었다.
그 안에서 백골들이 덜그럭덜그럭 뼈로 만든 병장기를 들고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역령? 화령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석천공이 놀라 소리치고 검은 장도를 꺼내 손에 쥐었다.
보랏빛 눈을 반짝이던 한립이 손가락을 움직여 은색 빛의 문을 열고 해 도인을 불러냈다.
“동천의 보물을 지니고 있구나! 그간 너희를 쫓은 보람이 있겠어.”
조골진인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기운으로 보아 저것들은 완전한 역령도 아니고 도병도 아닌 듯합니다.. 그보다는 역령의 도병이랄까요.”
한립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석천공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가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해 도인이 푸른 호리병박을 꺼내 뒤집어 내용물을 탈탈 털었다.
치지지직!
푸른빛이 금색 콩들을 휘감고 우수수 떨어져 내려서 보랏빛 뇌전을 뿜었다.
보라색 뇌전 문양이 들어간 금색 갑옷을 입은 도병들은 얼굴에도 문신이 있어 고운 생김새는 아니었지만, 눈빛에 약간의 생기가 어려 있었다.
파치칙.
도병들은 양손에서 자금색 뇌전을 일으켜 날개처럼 펼치고 그것을 뭉쳐 각양각색의 뇌전 병기를 만들어 냈다.
전투 준비를 마친 수천 마리의 도병들이 분분히 머리 없는 백골들을 향해 돌격했다.
콰콰쾅!
요란한 뇌전빛이 터지고 자금색 뇌전 수천 줄기가 도병들의 손을 빠져나가 검은 연기 속에 빛을 밝혔다.
한립은 뇌전빛이 반짝이는 곳마다 백골들이 해체되어 불구덩이 속 용암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허공의 하얀 안개 속에서 흐릿한 인영이 헛바람을 들이키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립이 예민한 감각으로 그걸 감지하고 눈길을 돌렸을 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상당히 교활한 자입니다. 대라경의 수행을 지녔음에도 먼저 우리에게 접근하지 않고 우리의 실력을 파악하고 있어요.”
“시간이 꽤 지난 만큼 우리에 대한 정보가 성역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을 겁니다. 조골노괴가 경계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요. 허나 그간 려 형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고 저도 최선을 다해 수련했습니다. 이 백골영역만 벗어나면 공간 비술을 사용해 수사를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의 전음을 듣고 석천공이 답했다.
“조물경 영역은 보통 영역과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조골노귀가 음지에 숨어 우리를 노리고 있으니 벗어나는 게 쉽지 않겠어요.”
“흠……. 려 형께서 어떻게든 백골 탑 중 하나만 허물어 주시면 제가 정혈 일부를 소모해서라도 강제로 비술을 발동해 틈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러는 수밖에 없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대오를 갖춰 싸우던 도병들이 흐트러진 것을 보았다.
뼈가 분리되어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던 백골들이 하나씩 원상태로 돌아가 도병들과 교전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불구덩이 속에서 덩치는 커다랗고 팔이 네 개나 달린 머리 없는 백골이 뼈마디에 핏빛 화염을 품고 음산한 문양이 드러난 장검 네 자루를 쥐고 일어섰다.
쿵!
팔이 넷 달린 거대 해골이 두 발로 허공을 박차고 도병들 틈으로 뛰어올라 네 자루의 장검을 휘둘렀다.
콰르릉.
찰나의 순간, 수백 명의 도병들이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한곳으로 뭉쳐 손에 든 병장기에서 자금색 뇌전을 동시에 분출했다.
거대 해골은 핏빛 화염을 갑옷처럼 입고 기괴한 역량으로 뇌전들을 막았다.
그걸 본 해 도인이 ‘제가 맡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 두 자루의 고풍스러운 검을 불러내 사라졌다.
다음 순간, 팔이 넷 달린 거대 해골 앞에 콰릉! 하고 해 도인이 나타나 두 줄기의 뇌전을 뿜었다.
해 도인과 끝없이 달려드는 도병들의 포위 공격에 대량의 자금색 뇌전이 동그란 뇌전 구슬을 이루고 쾅쾅! 터져 거대 해골을 그물처럼 뒤덮었다.
이때, 아래쪽 지옥불 속에서 강대한 기운을 품은 또 다른 거대 해골이 기어올라 왔다.
팔이 넷 달린 거대 해골보다 더 몸집이 커 보였다.
한립은 시간을 끌수록 분리해질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손짓해 18자루의 청죽봉운검을 백골 탑 중 하나로 날려 보냈다.
쉬쉬쉬쉭.
바람 소리와 함께 청죽봉운검의 검기들이 수천 자루의 뿌연 검 허상으로 흩어져 홍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립은 검결을 맺으며 의식으로는 조골진인이 어디에 있는지 수색했지만, 그의 영역 안에 있는 터라 의식이 제약을 받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검 허상의 홍수가 백골 탑을 휩쓸려는데, 녹색 귀화가 화륵! 일어나며 해골 입에서 녹색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수천 자루의 검 허상들이 안개에 휩쓸려 얼룩덜룩하게 침식되었다.
순식간에 수천 자루 검 허상들이 사라질 판이었다.
녹색 안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한립은 돌연 수결을 바꾸며 소리쳤다.
“터져라!”
강렬한 뇌전 빛이 폭발했다.
눈 부시는 금색 뇌전 빛이 녹색 연기 속에서 터져 수많은 뇌전실들을 방출해 녹색 안개를 갈라놓았다.
음살의 기운이 섞인 녹색 안개는 벽사신뢰와 완골금뢰가 융합된 뇌전 앞에서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후방의 백골 탑이 노출되었다.
“실력은 있다만 그걸로 되겠더냐…….”
그때 한립과 극히 가까운 곳에서 칭찬이 섞인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인상을 찡그린 한립은 정신을 분산시키지 않고 전력으로 남은 검 허상들을 백골탑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백골탑 지붕을 이룬 새하얀 해골 머리들이 분분히 떠올라 앞으로 튀어나와 공격을 피했다.
한립의 청죽봉운검들은 텅 빈 허공을 공격했고 뇌전을 더욱 퍼트려 해골머리들을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분리된 해골 머리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한립과 석천공을 향해 날아들었는데 시간영역의 범위에서도 그 속도가 엄청났다.
그걸 본 석천공이 도망용 비술을 멈추고 공간 신통으로 해골머리를 막으려는데 한립의 전음이 들려왔다.
“틈은 만들어졌습니다. 저것들은 제가 처리할 테니 비술을 멈추면 안 됩니다!”
그의 목소리에 석천공은 마음을 다잡고 비술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바로 검결을 푼 한립은 진언화륜경 공법을 일으켜 등 뒤로 눈을 찌를 듯한 금빛을 일으켰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진언보륜이 몸을 빠져나오기 전에 한립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선령력을 운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긴장한 한립은 뼈들이 통제를 벗어나 사지를 곧게 펴고 십(十) 자 나무 판에 못 박힌 사람처럼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석천공도 비술이 강제로 중단되어 입가에 피를 흘리며 똑같이 굳어 있었다.
해 도인과 뇌갑(雷甲) 도병들만이 특별한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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