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11화 (1,668/2,000)

1911화. 5품

*

사흘이 지나서야 서서히 속도를 늦춘 그들은 어느 산봉우리로 내려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들이 이쯤에서 멈춘 것은 안전하다 여겨서가 아니라 해 도인의 도병 제련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한립이 주술문자를 새겨 넣어야 할 시점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산 중턱에 급히 동부를 만든 한립은 석천공에게 주위를 살펴 달라 부탁하고는 화지동천 안의 약재밭 옆 죽루로 들어갔다.

죽루 2층에서 콰릉!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금색 뇌전이 만개해 1층에 들어선 한립이 완골뇌지를 떠올리게 했다.

“더 늦게 오셨으면 제힘으로는 감당이 안 될 뻔했습니다.”

해 도인은 드디어 한립이 들어오자 안도했다.

“죄송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하지요.”

한립이 바로 방 안에 펼쳐진 진법 안으로 들어가고 해 도인이 손을 거둔 채 문밖으로 나왔다.

* * *

3달 뒤, 한립은 주술문자를 각인하는 데 성공했고 수천 마리의 새로운 도병들이 탄생했다.

도병들의 관리를 해 도인에게 맡기고 화지동천을 나온 한립은 석천공과 다시 길을 떠났다.

황량역을 지나서는 십몽역(十夢域)이 있었다.

황량역에서 시작된 물길이 십몽역에서 18줄기의 거대한 강을 이루어 두 지역을 묶어 예부터 황량십몽이라 부르기도 했다.

마역의 면적은 선계보다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구역의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십몽역은 18줄기의 거대한 강을 중심으로 수백 개의 작은 물길이 교차하며 흘러 거미줄처럼 물길이 퍼져 있는 곳이었다.

어느 날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한 한립과 석천공은 얌전히 평범한 배를 타고 18개 강 중 유사강(流沙江)을 따라 북방의 난가성(爛柯城)으로 가고 있었다.

한립은 오랜만에 준수한 외모의 서생으로 변해 석천공과 똑같은 양식의 푸른 장삼을 걸치고 접선을 들고 있었다.

유사강 양쪽으로 비옥한 토지가 펼쳐졌고 복숭아나무들이 복사꽃을 만발해 분홍색 꽃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 진한 꽃향기와 풍경은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립은 한동안 경치를 구경하다 흥이 다했다는 듯 선실로 돌아가 앉았다.

“몽도림(夢桃林)이라 하여 뭔가 다를까 했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한립은 술동이 하나를 꺼내 들고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라 홀짝였다. 이에 석천공은 부리나케 다가와 알아서 호박(琥珀) 금잔을 꺼내 가득 따랐다.

“그건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십몽역의 10대 몽환경 중 하나가 몽도림인 것을요. 이곳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려 형의 의식의 힘이 강해서 미혹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눈앞에 선녀들이 날아다니고 오색 기린이 허공을 뛰어다니고 있을걸요?”

“제가 구경할 복이 없나 봅니다.”

“의식의 힘을 거두고 저항하지 않으면 똑같이 볼 수 있을 겁니다. 강을 따라가면서 몽천제(夢天梯)와 환화해(幻火海)도 보게 될 텐데 그때 시도해 보시던지요.”

석천공이 웃으며 말했지만 한립은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자양난옥을 이용해 연신술을 수행하면서 하루에 천 리를 가는 기분이었지만 아직도 연신술 5성을 대성하지는 못했다.

그는 술잔을 비우고 손끝으로 탁자를 훑어 특이한 형태의 유리 등잔을 불러냈다.

“연화를 시켜두신 겁니까?”

석천공이 유리 등잔을 보았다.

“서혼정은 자청 자매의 것이었던 터라 무슨 숨겨진 표식 같은 게 있을까 봐 연화를 시키지 않고 놔두었습니다.”

“이게 서혼정이라고요?”

“그 자매들이 사용하는 것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왜 그리 놀라시는지요?”

석천공이 눈을 부릅뜨자 한립이 물었다.

“음……. 려 형께서 연화시킬 생각이 없으시면 제게 파세요. 가격은 얼마든지 부르셔도 됩니다.”

“석 형, 장사하는 분이 맞습니까? 그리 말씀하시는데 제가 팔 것 같습니까? 이 물건의 내력이 무엇인지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지요.”

한립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역과 마역 상관없이 누구든 의식의 힘으로 조종할 수 있는 5품 의식 선기입니다. 어떤 위력을 내는지는 사용하는 사람의 의식의 힘에 따라 다르고요. 제가 팔라고 한 것은 농담이었습니다, 하하. 이걸 가장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려 형일 테니까요!”

“의식으로 살펴봐도 아무런 흔적이 없기는 했지만 마역에 특별한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연화를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김에 석 형께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 봐주시지요. 제가 연화를 시킬 수만 있다면 우리의 전력이 느는 셈 아닙니까.”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석천공이 서혼정을 받아 찬찬히 살폈다.

한참 후, 유리 등잔을 돌려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성역에도 은밀한 각인 방법이 있지만 서혼정에서 그런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안심하고 연화시켜도 되겠군요.”

“잠깐 만요, 여기 조각된 네 마리의 짐승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유리 등잔의 짐승들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도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뿔이 하나 돋은 녀석은 탐섭(貪攝) 혼백을 속박하는 것을 좋아하고, 두 눈에 불길이 있는 녀석은 봉유(封幽) 잔혼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두 귀가 막혀 있는 녀석은 불문(不聞)으로 의식을 연금하는 것을 좋아하고, 마지막으로 입안 가득 이빨이 자라난 녀석은 의식을 잡아먹지요. 각자의 특성이 서혼정의 네 가지 능력을 대표합니다.”

“그렇게 잘 알고 계시면서 처음에는 어째서 알아보지 못하신 겁니까?”

“어휴, 성역에 서혼정이 처음 나타났을 때 광원재가 확보를 했었습니다. 보고를 받고 직접 보기도 전에 보물을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접했지요. 이게 큰형님 수중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연화를 하며 주의할 점이 있겠습니까?”

“설명했듯이 네 마리의 짐승은 그리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보고 받은 바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연화를 시도했다가 도리어 저들에게 반격을 당해 의식에 손상이 올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석천공의 설명을 들은 한립은 이미 생각한 바가 있다는 듯 얇은 파란색 서책을 불러냈다.

표지에 ‘서혼정원’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자청쌍매가 연구해낸 보물을 조종하는 방법입니다. 앞부분에 어떻게 연화하면 되는지도 적혀 있고요.”

“어쩐지 그날 이걸 택하더라니, 정말 손해 볼 행동은 안 하시는군요.”

석천공은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는 동안 별다른 일이 없다면 서혼정부터 연화를 시켜보겠습니다. 쓸 데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아직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니 무기는 많을수록 좋지요. 제가 호법을 설 테니 마음 놓고 하세요.”

석천공의 말에 한립은 배에 진법을 펼치고 책자를 들어 올렸다.

* * *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는 강물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진작 몽도림을 벗어난 배는 아주 굴곡이 심한 몽천제 구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뱃머리에 선 석천공이 수시로 양옆의 거대한 절벽들을 주시하는 사이, 전방의 물길이 넓어지고 시야가 탁 트였다.

때마침 붉은 해가 떠올라 부드러운 빛을 강 위에 드리웠고 주홍색 빛깔이 점점 밝아지며 노랗게 변해갔다.

태양을 품은 강물은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석천공은 좌측의 절벽 사이로 햇살이 비추며 정상까지 이어지는 돌계단들이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하얀 구름까지 이어진 계단의 풍경은 절경이라 할 수 있었다.

석천공은 려 형이 이런 풍경을 놓친 것에 안타까워하다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수개월 동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한립이 갑자기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석천공은 얼른 진법 중앙의 유리 등잔을 보았다.

연꽃 모양 등잔 아래 네 마리의 짐승들이 눈에서 괴이한 붉은 빛을 뿜고 있었고 그걸 본 석천공도 머리가 윙! 울리며 벼락을 맞은 듯 숨이 막혀 왔다.

강제로 이상한 기분을 억누르고 공법으로 몸을 보호한 그는 네 마리의 짐승들이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원망의 감정이 치솟더니, 별안간 원치 않게 휘말린 형제지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과 그가 바라던 천하를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보물을 모으는 거상의 삶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대체 큰형님과 다섯째 누님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이런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들이 형제의 정을 저버렸으니 자신도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었다.

점점 이런 포악한 생각들이 차올라 석천공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그 목소리는 한립의 것으로 석천공은 바로 귀가 울리던 현상에서 벗어나 난색을 표했다.

그저 유리 등잔의 붉은 빛을 보았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다. 지금 그 붉은 빛은 한립의 의식으로 힘으로 제압당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이는 한립은 속으로 연신술 5성 구결을 외면서 전력으로 연신술을 운용하는 중이었다.

‘굳어라.’

그의 의식의 힘이 폭발적으로 새하얀 빛을 형성해 네 마리 짐승들을 봉인했다.

움직임이 느려진 짐승들은 한립이 숨을 고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데 캬! 하고 하얀빛에서 벗어나 울부짖었다.

한립은 의식세계를 가득 채운 포효소리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네 마리 짐승이 힘을 모아 의식공간을 철저히 제압하면 그는 꼭두각시와 다름없는 껍데기가 되고 말 것이다.

팟.

곤혹스러운 와중에 그의 머릿속에 보랏빛이 흘러들어와 의식의 힘을 보충했다.

힘을 낸 한립은 모든 의식의 힘을 한데 모아서 파도처럼 이수들을 압박했다.

동시에 의식세계를 억누르는 압박감이 거세지면서 언제라도 의식세계가 일그러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콰릉!

그런데 그때 부드러운 보랏빛이 크게 번지며 오랫동안 그를 애먹였던 연신술이 고난 속에 한계를 뛰어넘었다.

연신술 5성을 대성한 것이다.

한립은 기뻐할 틈도 없이 강력한 의식의 힘을 모아 거대한 의식의 검을 이루었다. 기이한 문양이 가득한 반투명한 검에서 강대한 의식 파동이 흘러나왔다.

막을 수 없을 것 같던 네 짐승 허상들이 의식 파동에 제압당해 한립의 의식세계에서 밀려 나왔다.

배 위에서 석천공이 자양난옥을 꽉 쥐고 이걸 한립의 머리에 두어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헉!’

그때 반투명한 수정빛이 한립의 미간을 빠져나와 기겁한 석천공의 미간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수정빛 속에 반투명한 작은 검이 떠올랐다.

급히 서혼정을 보니 네 요수의 눈에서 붉은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수정검이 한립의 미간 속으로 돌아 들어가고 그가 눈을 떴다.

“석 형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큰일을 당했을 겁니다.”

그는 자기 머리 위에 있는 자양난옥과 석천공이 든 또 다른 자양난옥을 보고 포권을 했다.

“예의 차리실 것 없습니다. 전부 려 형의 실력이 뛰어난 덕이지요. 그런데 잘 진행이 되다가 어찌 갑자기 서혼정이 반격한 것입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서혼정에 의식 정사를 주입한 뒤로 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안에 너무 많은 의식의 힘이 혼재되어 있어 짐승 조각들이 공격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위기의 순간 석 형이 자양난옥으로 제 의식을 보호해 주셔서 서혼정의 힘도 제압하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조금 전 반투명한 검은 또 어찌 된 것이고요?”

“의식의 검입니다. 연신술 5성을 대성하고 장악하게 된 새로운 의식 신통인데 위력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군요.”

한립은 망설였지만 대략 설명을 해주었다.

누군가의 신통에 대해 자세히 묻기도 그래서 석천공은 궁금한 것이 더 남았지만,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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