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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10화 (1,667/2,000)

1910화. 산골 마을

*

한립은 예전에 두병들을 담아 둔 호리병박을 꺼내 현천호리병에 넣어둔 것들을 옮겨 담았다.

그걸 전해 받은 해 도인은 살짝 흔들어 보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막 죽루로 들어가려다 무언가를 떠올리고 멈춰 섰다.

“며칠 전 약재밭에 묻어둔 뿌리에서 새싹이 난 것을 보았습니다.”

“뿌리요?”

한립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밝아져 약재밭으로 뛰어갔다.

그가 공터에 심어둔 나무뿌리에서 손가락 굵기의 연두색 새싹이 자라나 이파리 두 개를 펼치고 있었다.

빛을 머금은 이파리는 미세하지만, 사람의 혈관처럼 왕성한 생명력을 지닌 잎맥을 지니고 있었다.

“쪼그만 녀석이 그 많은 녹액을 받아먹더니 드디어 되살아났구나!”

그 옆에 쪼그려 앉은 한립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눈앞의 새싹은 진언문 유적에서 구한 양생수 잔뿌리에서 난 것이었다.

한립이 새싹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자 놀랍게도 새싹이 가볍게 흔들거리며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미간을 좁힌 그는 의식으로 이파리가 체내의 시간법칙의 힘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양생수 이파리를 만져 보았지만 그것 말고 다른 이상은 없었다.

똑.

한립은 암녹색 작은 병을 꺼내 그 안의 녹색 액체를 한 방울 떨구었다.

그의 손을 향해 기울어 있던 새싹이 돌아가고, 한참이 지난 뒤에 이파리에 기괴한 문양이 떠올랐다.

잎맥과 달리 눈에 익은 다른 문양이었다.

“시간도문과 비슷하지 않은가?”

문양은 몇 호흡이 지나기 전에 사라졌지만 한립은 수심이 깊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진언문 미라노조의 대제자 목연 양생수를 심고 기르는 동안 특수한 방법으로 시간법칙의 힘을 불어넣은 것일까? 아니면 양생수가 원래 시간법칙을 지니고 있던 것일까?

이 양생수가 살쇠의 겁을 넘기게 돕는 것과 연관이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만 많아져서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양생수 뿌리가 새싹을 틔운 것은 어찌 됐든 경사였다.

그는 약재밭의 다른 영초들을 돌아보고는 연못 옆 죽루로 돌아가 제혼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지 않고 1층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화앗.

상품 자양난옥을 불러내 손에 쥔 그의 몸에서 보랏빛이 흘러나와 죽루 1층을 같은 빛깔로 물들였다.

“의식과 혼백에 이렇게 큰 도움을 주다니, 자양난옥을 빼돌리기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할 만했어……. 연신술 수련을 자양난옥으로 보조하면 수련 속도를 높일 수 있겠어.”

눈을 감은 한립은 보라색 구름 아래에서 연신술을 수련을 시작했다.

* * *

유수와 같이 세월이 흘러 5년이 지나갔다.

황량역(黃粱域)의 길게 펼쳐진 비취색 산맥 안에 거의 외부와 단절된 작은 마을이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밭일을 마치고 돌아온 농부들이 머리에 뿔이 자란 푸른 소를 끌고 나무로 지은 집으로 돌아갔다.

돌을 깔아 만든 마을 중앙의 길에는 머리가 둘 달리고 팔은 넷인 마족 어린아이들이 재잘거리면서 뛰어놀았고, 멀지 않은 곳에 마족 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며 수시로 자신의 아이를 살펴보았다.

영리하게 생긴 한 아이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큰 친구의 등 뒤로 뛰어오르려다 마을 밖에서 두 사람이 석양을 맞으며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단일한 종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아이는 한눈에 두 사람이 낯선 외부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지만 두려워하기보다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마을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생겼지만 입고 있는 의복의 질이 무척 좋아 보였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중 평범한 청년은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주었고 나머지 백발 사내는 무표정했다.

그들은 침구역에서 오는 한립과 석천공이었다.

한립은 아이가 안 보는 척하면서 그들을 힐끔거리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처음 집을 찾아온 셋째 숙부를 보았을 때 자신도 저러지 않았던가!

“석 형, 마족들은 태어날 때부터 수행하는 삶을 사는 줄 알았는데 인족 범인과 마찬가지로 이런 평범한 이들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산맥 깊은 곳에 숨겨진 작은 마을이 제게는 오히려 선경처럼 느껴지는군요.”

“성역의 종족들은 혼백과 육신이 강한 편이라 수행을 하지 않아도 3, 4백 년은 거뜬히 삽니다. 그중에 수행을 위한 자질을 타고난 이가 많지 않아 원한다고 다 수행을 쌓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 마을의 종족들은 혈맥 기운이 약하지 않은데요. 평범한 마족은 아닌 듯합니다.”

“성역에서 몇몇 고등 종족들을 제외한 다른 종족들은 혈맥을 유지하는 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이런저런 혼혈도 많이 생기고 나중에 가서는 어느 종족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도 혈맥이 그럭저럭 정순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족이라 저도 모르겠군요.”

그들은 개구쟁이들과 그 어미들의 시선을 받으며 걸어가 마을 중앙의 노점으로 가 앉았다.

머리를 산발한 등이 굽은 노인은 찻물이 든 주전자를 내주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병 제련에 중요한 시점이라 이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립은 흙으로 만든 투박한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입을 열었다.

“뭐 급히 가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러시지요. 산맥의 천지영기가 진하지는 않아도 마기가 옅은 편이라 려 형이 편하게 도병 제련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석천공은 그저 찻잔을 보기만 하고 맛보지 않은 채 말했다.

쿠쿠쿠…….

이때 갑자기 땅이 크게 흔들렸다.

한립은 일어서면서 찻주전자와 잔을 들어 올렸지만, 석천공의 찻잔은 바닥에 떨어져 퍽! 하고 깨져버렸다.

두 사람이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고 있을 때, 아까 보았던 아이가 흥분해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산신 할아버지가 이사 간다!”

모여서 노닥거리던 덩치 좋은 여인들을 살피자 하나같이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앉아 지진이 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십여 초가 지나 지진이 멈추고 한립은 자리에 앉아 찻주전자와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앉아 있던 자리에 찻물이 엎어진 석천공은 한립 왼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진이 난 것이었지요?”

“아무런 파동도 느껴지지 않고 땅만 흔들렸…….”

한립의 물음에 석천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한립도 일어서지 않고 탁자를 잡아 삐그덕 거리던 탁자를 흔들리지 못하게 했고, 흔들림은 십여 초가 지나자 가라앉았다.

어둠이 내려와 등 굽은 노인이 누런 등롱을 들고 나왔을 때 두 손님은 보이지 않고 탁자에는 검은 마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작은 마을 밖에서는 한립과 석천공이 굳은 얼굴로 바삐 걷고 있었다.

“려 형, 확실한 것입니까?”

석천공이 입을 다물고 전음으로 물었다.

“확실합니다. 아까 그 노인은 마족이 아니라 선계의 악명 자자한 요수 반산융(搬山狨)이에요. 산을 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수행이 높으면 산맥을 지고도 움직일 수 있다 합니다.”

“어쩐지 찻잔이 깨져도 나와 보지 않다가 지진이 그치고서야 얼굴을 내민다 했습니다.”

“선계의 청엽선역(靑葉仙域)에서도 어느 선가의 장문 장로가 선기를 제련하기 위해 어린 반산융 한 마리를 죽인 일로 성년 반산융에게 여러 번 종문 전체가 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반산융을 격퇴하고 해결이 된 듯했는데 만 년이 되지 않아 종문이 있던 산맥 전체가 반산융에 의해 지맥이 훼손되고 통째로 바다로 옮겨졌다더군요.”

“그런 요수가 있었군요.”

한립의 설명을 듣던 석천공은 자기도 몰래 작은 마을을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의 태도로 보아 대대손손 이런 일을 겪은 듯합니다. 아까 본 반산융은 아직 대라경에 이르렀는지는 몰라도 수행을 어느 정도 쌓아 포악한 심성이 변한 것 같고요.”

“그래도 은거 중이니 들키는 것을 원치 않을 텐데, 우리에게 무슨 짓만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석천공이 이 말을 하자마자 산길 앞쪽에 마을에서 본 마르고 등이 굽은 찻집 주인이 나타났다.

“……석 형, 어떻게 입을 열 때마다 나쁜 일은 척척 맞히십니다.”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고, 석천공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때렸다.

“선배님, 저희가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범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한립이 먼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멀리 등 굽은 노인을 향해 예를 취했다.

석천공도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너희에게 악의는 없으니 걱정할 것 없다.”

뒷짐을 진 노인은 입술을 달싹여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무슨 일로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는지요? 분부가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한립은 그 말을 듣고도 마음을 놓지 않고 조심스레 물었다.

“분부랄 것은 없고 오랫동안 마역에 있다 보니 선계 사람이 오랜만이라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다.”

노인이 고개를 흔들자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주름 가득한 얼굴이 언뜻 보였다.

“제가 아는 것이라면 얼마든 답을 드리겠습니다.”

“넌 어디서 왔더냐?”

“흑산선역에서 왔습니다.”

한립의 거침없는 대답에 노인이 추억에 잠긴 얼굴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흑산선역이라……. 그곳에서도 한동안 있었지. 처참한 기억이 섞여 있다고 해도 마음이 가는 곳이야. 그래, 한운산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있더냐? 그곳은 지금 어떻더냐?”

“저도 그곳에서 한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혹시 선배님께서도 한운산에 머무신 적이 있습니까?”

“그래, 아주 오래전이라 산맥에 기거하는 이가 몇 되지 않았는데 후에 많은 이들이 찾아와 동부를 만들면서 조용하던 곳이 변했지.”

“한운산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곳에 은거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외부와 단절된 중립적인 장소였는데, 제가 떠날 무렵에 천정의 간섭이 시작되어서 많은 이들이 산을 떠난 것으로 압니다.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고요.”

한립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차피 오래전 일이니 변한 것도 당연하지……. 그래, 노부의 정체는 알아차렸겠지?”

노인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선배님의 정체는 제가 감히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고, 그저 수행이 아주 높으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간 긴장한 한립은 표정을 바로 하고 답했다. 공손한 그의 대답이 마음에 찼는지 등 굽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의 대화를 듣자니 도병을 제련할 만한 장소를 찾는 것 같더구나. 이 산맥 자락에 사람이 살지 않는 골짜기가 많으니 알아서 하거라. 누군가 간섭할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별것 아닌 도병을 제련하며 어찌 선배님의 비호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선배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따로 조용한 곳을 찾겠습니다.”

“그렇다면 인연이 없는 것이겠지. 우리는 앞으로 만난 적 없는 사이니라.”

“물론입니다. 저희는 선배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노인의 의미심장한 말에 한립이 포권을 했다.

“예, 저희는 아예 이곳에 왔던 적도 없습니다.”

석천공도 대화를 들으며 무슨 분위기인지 파악하고 장담했다. 그러자 노인의 시선이 석천공에게 잠시 향했다.

“부모를 잘 골라잡아 태어난 녀석이구나……. 그래, 가보거라.”

노인의 말이 떨어지자 한립과 석천공은 바로 인사를 하고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그들은 산맥을 벗어나자마자 그제야 한시름을 놓으며 산골 마을이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산맥 전체가 아래위로 흔들리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두 눈에 보랏빛을 일으킨 그는 산맥 아래에 희미하게 거대한 그림자가 등에 산맥을 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굽은 등이 거의 산맥과 하나가 되어 영목신통을 발동하지 않고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때 돌연 산맥 가장 앞쪽의 거대한 산이 천천히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거대한 황금 눈 두 개가 번득였다.

깜짝 놀란 한립은 즉시 구유마동을 거두고 석천공과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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