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화. 단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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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택역(山澤域)은 마역 남부 남황역과 인접한 이름 그대로 산과 호수가 많은 땅이었다.
동산성(東山城)은 그런 산택역 내의 별 볼 일 없는 작은 성으로 동망산(東望山) 자락 아래 서쪽으로는 봉호(逢湖) 호수를 끼고 있어서 배산임수의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날 새벽 봉호 위로 태양이 치솟고 마기와 함께 금빛이 떠올라 동산성 풍경을 더욱 독특하게 만들었다.
동망산에서 내려다보면 금빛과 마기가 어우러진 광경이 절경이었고, 저계 수사의 경우 체내의 마기가 공명을 일으켜 일정 부분 수행에 도움이 되었기에 많은 마족 수사들이 이른 아침부터 산 정상에 모여 있었다.
이날도 호수의 이상 현상이 사라지고 동망산 정상에 모여 있던 수사들이 흩어졌다.
등이 굽은 노인과 멍한 표정의 덩치가 큰 청년도 산 정상에서 돌계단을 따라 내려와 산 중턱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덩치 큰 청년의 표정은 멍했지만, 그의 눈빛만은 극히 맑았다.
“석 형, 어째서 특별히 이곳까지 와서 이상 현상을 본 것입니까? 수사의 수행에 큰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요.”
덩치 큰 청년이 뒷짐을 지고 걷는 등이 굽은 노인에게 물었다.
“수행 때문이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리 숨었다, 저리 숨었다 하느라 속이 답답하기에 좋은 풍경을 보고 답답함을 털어내고자 들른 것입니다.”
“줄곧 묻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날 천월후가 어째서 우리를 살려 보내며 초우성으로는 가지 말라고 귀띔까지 해준 걸까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은 참지 못하고 제가 먼저 달려들어 싸울 뻔했으니까요……. 셋째 형님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제 신분 때문에 그가 움직였을 리는 없으니까요.”
“겉으로는 대대적으로 전투를 벌이는 척하며 우리를 몰래 보내주느라 전송탑을 무너트리지 않았습니까.”
“그의 조언으로 확실히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초우성은 물론 야양성으로 통하는 전송진이 있는 성들은 어디든 갈 수 없다는 것을요.”
한립이 웃으며 하는 말에 석천공이 진지하게 답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급히 야양성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 당연히 손을 써두었겠지요. 일단 행적을 들켜 또 다른 대라경 수사를 마주친다면 달아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더 조바심이 납니다. 다른 성들끼리 연결된 전송진을 이용해 야양성까지 가는 길은 머니까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그렇게 되면 적들도 우리의 경로를 파악하기 불가능해진다는 장점이 있지 않습니까.”
“려 형도 그 때문에 성역으로 돌아갈 시기가 늦어지고 있으니…….”
석천공이 미안하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괜찮으면 며칠만 동망산에 남아 있지요. 제가 처리할 일이 있어 그 후에 다시 출발해야 할 듯싶습니다.”
손을 내저은 한립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하하, 안 될 이유가 없지요. 려 형이 일을 마치는 대로 출발합시다.”
두 사람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산 중턱에 있는 절벽에 도착했다.
절벽에 가까워진 석천공이 손을 저어 공간장벽으로 비교적 인접한 동굴 두 개를 뚫은 뒤, 두 사람은 인사를 하고 각자의 임시 동부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한립은 바로 은색 빛의 문을 열고 한걸음에 그 안으로 들어가 약재원 문 앞에 섰다.
해 도인이 진작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
“약재 밭 안의 도병들이 다 자랐습니다. 진법의 힘으로 억제를 해두고 수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한립은 해 도인을 향해 포권을 하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치직. 치지직…….
밭들 사이를 지나 도병이 자라는 구역에 도착하자 멀리서 억눌린 뇌전 소리가 들려왔다.
뇌택식토를 깔아 놓은 땅이 건조하게 말라서 쩍쩍 갈라져 있었다. 뇌전의 힘이 거의 바닥났다는 뜻이었다.
그 위로 자라난 도병수는 반대로 보랏빛 광채에 휩싸여 가지에 한가득 콩꼬투리를 맺고 왕성하게 보라색 뇌전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번엔 지난번보다 콩꼬투리가 많고 함유한 기운도 강했다.
십환산맥에서 그를 위해 호법을 서게 하다 지니고 있던 도병을 다 잃었는데 그걸 보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법을 회수해 주셔도 되겠습니다.”
한립이 미소를 띠고 하는 말에 해 도인이 수결을 맺어 바닥을 가리켰다.
웅!
도병수 주위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여덟 개의 금색 진법 원반이 빠져나와 해 도인의 손에 떨어졌다.
투명한 보호막이 사라지고 보라색 뇌전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뜻밖의 상황에 한립은 손을 저어 푸른 빛으로 도병수 주변에 빛의 장막을 만들어 보라색 뇌전들이 다른 약재 밭으로 튀는 것을 막았다.
콰르릉!
천둥소리가 울리고 도병수가 빠르게 시들어가면서 모든 역량이 콩알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파칙! 파치치칙!
부풀어 오른 콩꼬투리가 터져 보라색 뇌전 문양이 새겨진 황금색 콩들이 튀어나왔다.
한립은 즉시 현천호리병박을 불러내 입구를 기울였다.
호리병박 입구에서 녹색 소용돌이가 나타나 날아오른 콩들을 강력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였다.
약재 밭을 울리던 폭음이 사라지고 수천 개의 콩들이 현천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콩이 가득한 호리병과 금색 어미 콩을 들고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이번에는 모두(母豆)가 하나뿐이었다.
그는 콩을 양 손가락으로 집어 선령력을 주입해 보았다.
치지직!
보라색 뇌전 문양이 빛을 발하며 발산된 뇌전에 팔이 저릿했다.
“보라색 뇌전의 위력이 강하군요. 뇌택식토의 점성도 지닌 것 같고요.”
곁에서 해 도인이 입을 뗐다.
“도병으로 만들어 그런 속성을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 수사, 제가 알고 있는 자극염뇌진(紫極焰雷陣)이 명뢰쇄원진보다 이 도병들에게 적합할 것 같은데, 도병들의 제련을 제게 맡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해 수사가 맡아주신다면 걱정할 게 없지요. 현천호리병 안에서 잠시 배양을 하다 내어 드리겠습니다. 달리 필요한 재료가 있으면 목록을 주세요.”
한립은 웃음을 머금고 허락했다. 그 말에 해 도인은 아무 소리 없이 포권을 했다.
“아, 주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 제게 알려주는 것도 잊지 마세요. 이왕 마역까지 왔으니 마역 출신인 전 주인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그간 열심히 기억을 회복하려 노력했으나 잘되지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꽤 오래 머물러야 할 듯싶으니까요.”
이야기를 마친 한립은 약재 밭을 떠나 연못 옆의 죽루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자 침상 위에 제혼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그 위로 자양난옥 하나가 엄지손가락만큼 남아 있었다.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립은 묵묵히 다른 중품 자양난옥을 꺼내 제혼의 머리 위에 올려 두었다.
정신을 차리지는 못해도 기운이 점점 평온해져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야양성에서는 제혼을 깨울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할 텐데.’
* * *
두 달 뒤, 동산성 밖 어느 정자에 한립과 석천공이 마주 앉아 있었다.
“석 형, 생각을 해보았는데 동산성 안의 전송진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같은 성에 두 번 모습을 드러냈다가 성안의 매복이나 대황자의 수하를 만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큰형님의 정보력이 셋째 형님보다는 못해도 소식에 정통하기는 하니까요. 우리가 십환산맥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움직인 것만 보아도 그렇고요.”
“지도에 따르면 동산성 인근에 연봉성(連鳳城)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곳까지 가서 바로 칠택성(七澤城)으로 이동한 다음 잠시 쉬시지요.”
“불규칙적으로 움직여 큰형님 쪽에서 우리의 행적을 유추하기 어렵게 하자는 것이군요?”
“머리를 쥐어짜 봐도 그 방법밖에는 없을 듯합니다.”
“하하, 려 형답습니다. 수사가 없었더라면 벌써 조골진인에게 따라잡혔을지 모르지요. 이번에도 수사의 판단을 믿겠습니다!”
웃음을 터트린 석천공은 베틀 북을 꺼내 함께 이동했다.
* * *
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 검은 안개가 자욱한 원시삼림 위를 검은 베틀 북이 지나갔다.
그 위에는 푸른 장삼을 걸친 유생과 푸른 갑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 한립과 석천공이었다.
“산택역에서 옆의 침구역(沈丘域)으로 이동하는 데만 10년이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푸른 갑옷을 입은 석천공이 베틀 북을 조종하며 한탄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전송진을 이용하지 않고 비행을 하며 이동했으니까요. 수시로 마수의 습격을 받지만 않았어도 더 빨리 왔겠지만 말입니다.”
한립은 느긋하게 답했다.
“하하, 성역의 마수들은 성질이 포악하고 영역의식이 강해서 침입자가 있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행에 능하지 못한 마수를 마주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지난번에 마주친 단골마연(斷骨魔鳶)처럼 조류형 마수를 만나면 겨우 금선 초기의 수행을 지녔는데도 3달 넘게 피해 다녀야 하지 않았습니까.”
“남들의 이목을 피하려고 전력을 다하지 않아 그렇지요. 어쨌든 앞으로는 더욱 조심해서 강대한 마수들이 서식하는 지역은 피해야겠습니다.”
“머지않아 봉구성(封丘城)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성역 중부의 광경역(曠景域)으로 이동할 수 있고요. 그곳은 대부분이 큰형님의 기반이라 더욱 신중하게 움직여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봉구성에서 잠시 쉬었다 출발하지요.”
“좋은 생각입니다. 봉구성은 침구역에서 두 번째로 큰 성이라 교역이 활발해 필요한 자원을 보충하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입니다.”
석천공은 매매할 생각에 손을 비볐다.
논의를 마친 두 사람은 더욱 속도를 내서 봉구성으로 향했다.
성으로 들어간 그들은 선가 객잔을 찾아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평범한 별채 두 곳을 빌려 따로 머물렀다.
따로 상점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한 한립은 마역이라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많지는 않았지만 구뢰목과 비슷하게 뇌전의 힘을 지닌 물건들은 구할 수 있었다.
“뇌진주(雷塵珠)만 있으면 되는데…….”
한립은 상점 거리 끝의 꽃이 조각된 둥그런 문 아래에서 중얼거리다 다른 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녁이 되어서야 요수 마차를 타고 객잔으로 돌아온 그는 모든 금제를 발동하고 화지동천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연못 옆 죽루가 아닌 약재 밭 옆 죽루 밖에서 해 도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뇌진주 외의 물건들은 다 사 모았습니다.”
“마역에서 이렇게 많은 선역의 재료들을 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뇌진주는 두병의 뇌전의 힘을 격발하고 보충하는 데 중요한 재료라 꼭 필요합니다.”
“뇌진주의 역할은 그게 답니까?”
해 도인의 말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게 주요 역할이고 나머지는 다른 재료로 보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없어도 되겠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되지 않는 해 도인을 보고 한립이 웃으며 현천호리병을 꺼내 바닥 부분을 탁! 쳤다.
자금색 빛이 빠져나와 금빛 찬란한 콩알로 변했다.
그걸 들어 자세히 살펴본 해 도인은 콩알에서 폭발적인 뇌전의 기운을 느꼈다.
“뇌택식토만으로 이렇게 강력한 뇌전을 품은 두병을 재배할 수는 없었을 텐데요. 어찌 된 일입니까?”
“처음 두병들을 현천호리병 안에 넣어 배양했을 때만 해도 품질을 좀 높여 보려는 생각이었는데, 현천호리병 안의 청죽봉운검들이 두병과 공명해서 지난 10년간 뇌전의 힘을 흘려보냈습니다.”
“하늘이 도왔군요! 정말 뇌진주는 필요하지 않겠습니다.”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뇌전의 힘이 유실되어 청죽봉운검 배양에는 차질이 생겼으니까요.”
“만사가 다 좋을 수야 없지요. 청죽봉운검은 뇌전법칙의 힘을 지닌 데다 벽사신뢰에 완골금뢰까지 합쳐져서 세상에 다시없을 극양의 신뢰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 힘을 약간이지만 도병들이 흡수했다면 나중에 대규모 악귀나 음기를 품은 괴물들을 만났을 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해 도인이 오랜만에 길게 말을 이었고, 한립도 도병들을 이용해 진법을 펼치면 얼마나 강할까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났다.
“준비가 끝났으니 도병 제련에 들어가겠습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까?”
“3년 동안은 저 혼자의 힘으로 충분합니다. 마지막에 주술문자를 새겨 넣을 때 강대한 의식의 힘이 필요하니까 수사의 도움을 받아야겠지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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