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화. 용서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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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쾅!
분노를 이기지 못해 허공을 내리치던 조골 진인이 차차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어느 성을 거치든 초우성으로 갈 것 아니더냐. 내 그곳에서 기다릴 것이니, 살아서 남강을 떠날 생각은 하지 말거라.”
거의 동시에 남강역 남단의 웅거성 밖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평범한 외모와 체격을 지닌 두 사람은 진선경 후기의 형제로 보였지만 사실 다시 먼 길을 돌아온 한립과 석천공이었다.
사실 혈적후가 자신의 피로 가짜 한립과 석천공을 만들어 적을 류삼성으로 유인하자고 했을 때, 그는 그들이 사갑성으로 가서 전송진을 타고 초우성으로 가길 바랐다.
하지만 한립은 류삼성과 다른 성들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조골진인이 속은 것을 알면 여전히 그들을 쫓을 수 있다고 판단해 웅거성으로 돌아오기로 결정을 내렸다.
원래 웅거성과 임산성의 거리를 생각하면 더 일찍 도착해야 했는데 은신을 위해 수행을 억제해 이제야 웅거성에 이르렀다.
“셋째 형님이 석 형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혈적후도 스스로 미끼가 되어 대라경 수사를 유인하다니 충심이 대단하고요.”
한립은 길을 재촉하며 말했다.
“혈적후가 셋째 형님 휘하의 사람 중에 가장 강자는 아니더라도 그 충심만은 최고라 들었습니다. 직접 만나보니 과연 그렇군요. 야양성에 돌아가면 반드시 보답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석천공이 답했다.
그들은 통첩을 꺼내 검문을 통과하고 웅거성으로 들어가 마차를 빌려 성주부로 향했다.
“천월후에 대해 잘 모르지만 수사와 혈적후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개가 있는 인물 같았습니다. 다만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 웅거성으로 돌아온 것은 우리에게도 도박이었지요.”
“운산요에서 큰일이 벌어졌을 때 방관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모른 척 넘어가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만 해주어도 제가 천월후에게 신세를 지는 셈이고요.”
두 사람은 더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 마차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빠졌다.
성주부는 면적이 아주 넓었고 앞쪽의 웅장한 건물들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라면 뒤쪽은 천월후의 거처였다.
그 중간에 있는 7층 원형 탑이 웅거성의 전송대전으로 다른 곳처럼 엄격한 검문을 받아야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한립과 석천공도 성주부 쪽문에 도착하자마자 병사에게 가로막혔다.
“저희의 통첩입니다. 살펴주시죠.”
석천공은 한껏 웃음을 머금고 먼저 다가가서 통첩 두 개를 내주었다.
지금 두 사람의 신분은 마역 중부 침구역(沈丘域) 거대가문의 방계 자제인 여중염과 여중묘였다.
“침구역 여 씨 제자라면 증표가 있는가?”
중년 사내가 통첩을 보고 안색이 누그러져서 물었다.
석천공이 미리 준비한 원형 철패를 꺼내 거기 새겨진 ‘여’자를 보였다.
“틀림없군. 날개 달린 여애수(余涯獸) 문양이 맞아.”
“고맙습니다, 선배님.”
중년인이 영패를 살피고 돌려주자 석천공이 인사를 하고 한립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감응 진법이 붉은빛을 번쩍였으나 석천공의 품에서 둥근 거울이 빛을 반사해 사라졌다.
문을 지키던 병사들도 진법이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성주부는 경비가 삼엄해서 곳곳에 순찰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녔기에 두 사람은 땅만 쳐다보면서 7층 탑 아래로 향했다.
이미 그 앞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줄 끝에 서서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줄이 줄고 그들 차례가 되었을 때 18개의 용이 새겨진 기둥 사이에 마련된 전송진을 볼 수 있었다.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탑 안 오른쪽 붉은 책상 앞에 검은 장포를 입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선배님께 아룁니다. 초우성으로 가려 합니다.”
석천공이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말했다.
“운이 좋구나. 아직 초우성으로 갈 인원은 세 명이 남았다. 이제 한 명만 더 기다리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겠어.”
“얼마나 기다려야겠습니까?”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그걸 누가 알겠느냐. 운이 좋으면 함께 갈 사람이 금방 나타날 테고, 아니면 내일까지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
흑포 사내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한립과 석천공은 흑포 노인의 말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선배님, 저희가 사정이 있어 급히 떠나야 하는데 그냥 저희끼리 떠나도 되겠는지요?”
“그래도 되지만 원래 3명이 내야 할 전송비용을 너희 둘이 전부 내야 한다. 그래도 괜찮더냐?”
석천공의 말에 흑포 노인은 이미 예상했는지 눈썹을 끌어올렸다.
“비용은……. 너무 아깝지만, 가주께서 급히 시키신 일이 있어 어쩔 수가 없겠습니다. 어차피 거금을 들이는 것 빨리 가서 일을 성사시키는 것이 중요할 듯합니다.”
석천공은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한립을 쳐다보았다. 한립도 그 뜻을 알아듣고 맞춰주었다.
“임무에 실패하면 큰 벌을 받겠지만 아깝더라도 조금 더 비용을 지불하고 일을 성사시키면 가주께서 상을 내리실 테니 그게 나을 겁니다.”
“선배님, 송구스럽지만 바로 출발하게 해주십시오.”
석천공이 서둘러 공수하고 말했다.
“너희가 그리 결정했다면 나도 더 할 말은 없다. 비용을 지불하고 전송진 옆에 가서 기다리면 된다. 다른 무리들의 전송이 끝나면 너희 차례다. 통첩을 주면 기록을 해놓겠다.”
흑포 노인의 말에 석천공은 아까 사용한 통첩을 꺼내려는 한립을 막고 새로운 통첩 두 개를 꺼내 보였다.
그걸 받은 흑포 노인은 깜짝 놀라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낙형공(落衡公)댁 가시는 분들인 줄도 모르고 노부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하게 되었군요.”
“아닙니다, 선배님. 저희야 어르신의 잡다한 일을 돕는 가신일 뿐인데 어찌 이리 과한 예를 취하십니까.”
석천공은 급히 노인의 팔을 잡아 허리를 숙이려는 것을 막았다.
“성역에서 낙형공의 위명을 들어 보지 못한 이가 있겠습니까. 그분의 중용을 받으시는 두 분도 평범한 신분은 아니실 테지요. 앞서 노부가 했던 말은 잊어 주십시오! 지금 전송 중인 이들만 떠나면 바로 두 분을 위해 전송진을 준비하겠습니다.”
“저희 때문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허나 전송비용은 꼭 정해진 규정대로 다 받으셔야 합니다.”
석천공은 거들먹거리지 않고 미소를 머금었다. 흑포 노인은 상대가 자신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을 보고 얼음에 웃음꽃이 피었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낙형공이 누구기에 저 노인의 태도가 저리 달라진 것입니까?”
“낙형공이 바로 제 셋째 형님이십니다.”
석천공의 대답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셋째 형님께서는 이미 작위를 받으셨군요?”
“예, 부친께서 자식들에게 작위를 내리는데 신중하셔서 실질적인 전공이 없으면 아무렇게나 작위를 내리시지 않습니다. 형제 중에서 작위를 받은 이가 절반도 되지 않지요. 그 중 큰형님인 석참풍이 가장 높은 창릉왕(창릉왕)으로 봉해졌고, 셋째 형님이 낙형공, 다섯째 누님 석경연이 우림공(羽林公) 나머지는 후작이 많습니다.”
“흑포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수사의 셋째 형님인 낙형공은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는 것 같은데요?”
“특별하다기보다는 같은 공작이라도 봉토의 크기나 그 지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셋째 형님은 공작 중에서도 그 지위가 세 번째 안에 들고, 다섯째 누님인 우림공은 그보다는 급이 낮다고 할 수 있지요. 게다가 워낙 인품이 좋고 상벌이 분명하다고 알려져 있기에 성역 내의 많은 이들이 셋째 형님을 흠모합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이 전음을 나누는 사이 흑포 노인이 그들을 기록해 두고 전송진으로 안내했다.
그는 진법 원반을 들고 있는 수사들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한립과 석천공은 옆에 서서 전송진이 빛을 발하는 것을 지켜보다 시선을 마주쳤다.
“역시 따라 잡혔군요.”
석천공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혈을 심어 놓은 가짜였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래도 혈적후의 계획이 통했군요.”
한립도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하하, 노인네가 허탕을 치는 동안 우리는 초우성에 도착하는 즉시 떠나야 할 겁니다.”
“그나저나 혈적후가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는 대라경 수사인데요.”
한립의 걱정에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곧 먼저 도착한 세 사람의 전송이 끝나고 관리를 맡은 수사들이 전송진의 마석을 교환한 후에 그들이 들어갔다.
전송진 가운데 선 그들을 향해 수사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진법 원반을 들어 올렸다.
후우웅.
진법이 울기 시작하면서 은색 별빛들이 바닥에서 떠올라 밤하늘을 수놓는 반딧불이처럼 반짝였다.
막 전송이 되려고 할 때 이변이 발생했다!
펑! 하고 전송진 관리 수사의 진법 원반이 터져버린 것이다. 빛을 잃은 전송진이 멈추고 자금색의 화려한 빛이 대전 안으로 날아들었다.
진법 원반을 잃은 수사는 벌컥 화를 내려다 나타난 사람을 알아보고 바닥에 엎드렸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한립과 석천공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립은 자금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눈썹이 길게 뻗은 중년인은 콧등이 굽어 있었고 입술은 매우 얇아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그저 모른 척 해주실 수는 없었는지요.”
석천공이 쓴웃음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난 이미 한 번 눈감아 주었네. 다시 돌아와선 안 되었어.”
천월후가 탄식하듯 말했다.
“논의할 여지도 없겠습니까?”
“본 후가 죄인들을 잡으려 하니 상관없는 자들은 이곳을 떠나라.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바깥을 지키되 누구라도 안으로 들어온다면 용서치 않고 죽이겠다.”
천월후는 석천공의 말에 답하지 않고 서늘하게 명을 내렸다.
그의 몸에서 마기가 출렁출렁 새어 나와 숨 막히는 대라경 중기 수사의 기운을 내뿜었다.
전송진을 이용하려 기다리던 사람이나, 전송 대전에서 일하던 수사들은 심장이 멈춘 것처럼 깜짝 놀라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흑포 노인 역시 무척 당황하며 석천공과 한립을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바닥을 기어 나왔는지, 날아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전송 대전을 탈출한 이들은 호기심에 뒤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진동이 울리고 흑자색 마기가 용의 모습을 하고 하늘 높이 치솟아 하늘의 구름을 다 쓸어 버렸다.
콰르르.
그 아래 전송탑이 무너져 내려 가루가 되고 강력한 기운의 파랑이 주위로 퍼져나가 순식간에 위풍당당한 성주부 건물들을 무너트렸다.
성주부를 지키던 수사들이 이상을 감지하고 분분히 힘을 발휘해 간신히 성주부 전체가 훼손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군중들이 몰려들자 천월후가 홀로 폐허 속에서 날아올라 그들을 서늘하게 훑고 아무 말 없이 거처로 돌아갔다.
‘사, 살았다!’
흑포 노인은 성주의 질책을 받아 죽을까 봐 벌벌 떨다가 아무 일도 없자 급기야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 * *
3달 뒤, 추우성 성주부.
둥근 지붕의 웅장한 건물 안에서 거대한 전송진이 빛나고 몇 명이 나타났다.
전송진을 빠져나온 이들을 매서운 눈빛으로 주시하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조골진인이었다.
“조골 선배님, 벌써 3달째입니다. 찾으시는 이들이 여기로 오려고 했으면 벌써 도착했겠지요.”
곁에서 3달 동안 불편을 감수하던 금선 노인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놈들에게 또 당하고 말았어.”
조골진인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곁의 금선 노인은 조골진인이 찾는 이들이 누군지 몰랐지만 더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3달 전, 성주 대인은 조골진인이 무엇을 하든 막지 말고 도우라고 명을 내렸다.
“나를 대신해서 구양성주에게 고마움을 전해주게. 나중에 직접 찾아가겠다고 말이야.”
천천히 몸을 일으킨 조골진인이 분부를 내렸다.
“예, 꼭 그리 전해 드리겠습니다.”
금선 노인도 그를 따라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조골진인은 힐끗 전송진 쪽을 바라보다 소매를 펄럭이며 대전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