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화. 강적
*
석천공이 비행 보물인 베틀북을 이용해 전력을 내기 전에 전방에서 붉은빛이 날아들었다.
“태을경 최고봉……. 또 적이란 말인가?”
한립이 눈을 번득이고 석천공도 긴장한 낯으로 베틀북을 세웠다.
“13황자 전하, 3황자 전하의 명을 받들어 모시러 왔습니다.”
천 장을 사이에 두고 멈춰선 핏빛 그림자는 붉은 옷을 걸친 사내로 변해 전음을 보내왔다.
“증거는?”
한립과 시선을 마주친 석천공이 전음으로 답했다.
그 말에 홍의 사내는 붉은 물건을 꺼내 던져주었다.
머뭇거리던 석천공이 물건을 끌어와 보니, 반달 형태의 옥 조각에 무언가 잡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석천공은 바로 지니고 있던 나머지 반절의 옥 조각을 꺼내 맞춰보았다.
화앗.
두 옥 조각이 정확하게 맞물리며 부드러운 하얀빛 속에서 둥근 옥패가 되었다.
옥패의 문양들은 머리가 두 개 달린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었는데 원한이 가득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이 공존하는 얼굴이었다.
석천공이 얼굴을 풀고 기억에 잠겨 옥패를 쓸었다.
“셋째 형님이 보낸 사람이 확실합니다.”
석천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홍의 사내가 천천히 다가왔다. 젊은 청년은 눈꼬리가 길어 칼 같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저는 성혈이라 합니다. 3황자님의 명대로 13황자님을 야양성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가겠습니다.”
“혈적후(血適侯)가 아닙니까? 셋째 형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여성의 언파산맥에서 활동하시며 수많은 마수의 침략을 막으셨다고요. 형님의 오른팔과 다름없는 분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무언가 잘못 기억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저는 줄곧 남황역(南荒域) 북쪽의 낙진광연(落塵鑛淵)에서 머물렀습니다. 게다가 저 같은 사람이 어찌 3황자 전하의 오른팔이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움찔한 혈적후가 뒤늦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웃으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례했다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석천공은 거짓 정보를 던져 상대를 떠본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이리 신중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말을 마친 혈적후는 아주 흥미롭다는 듯 한립을 쳐다보았다.
“여기는 려 수사십니다. 저와 줄곧 동행하면서 여러 차례 저를 도와주셨지요.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석천공이 나서서 먼저 그를 소개해주었다. 이에 한립과 혈적후가 마주 보고 포권을 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전하?”
“임산성 내의 전송진을 이용해 초우성으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적의 수에 당해 전송진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초우성으로 갈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혈적후의 질문에 석천공은 조금 전 벌어진 일들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둔공전송진(遁空傳送陣) 때문에 초우성으로 가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남황역에서 유일하게 둔공전송진이 있어 야양성으로 곧장 갈 수는 없어도 가까운 포뢰성(蒲牢城)으로 갈 수 있을 겁니다. 성도로 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지요.”
“둔광전송진은 원거리 전송이 가능한 만큼 이용하는데 제약이 따르는 것으로 압니다. 보통 공작 이상의 작위를 지녀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막대한 비용이 들 텐데…….”
“난 작위는 없지만 광원재에서 중임을 맡고 있습니다. 그 신분으로 둔공전송진을 한 번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비용도 알아서 해결할 것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찌하면 초우성까지 갈수 있는가 입니다.”
“흠……. 초우성은 남강역 북단에 있습니다. 임산성 전송진이 망가졌다면 전송진이 있는 다른 성으로 가야 할 것인데 어디로 가든 10년은 걸릴 겁니다.”
침음하던 혈적후가 말했다.
“10년은 너무 깁니다. 그사이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고요.”
듣고 있던 한립이 입을 열었다.
“성역은 방대합니다. 가는 동안 조심만 하면 별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혈적후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아직 혈적후 수사가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번에 임산성에서 전송진을 파괴하게 만든 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석천공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누구였습니까?”
“화경입니다.”
“오공주 전하의 수하가 말입니까! 그분도 이 일에 나서시다니.”
“문제는 화경이 죽기 전에 스승이 조골진인이라면서 소식을 들으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 했다는 점입니다.”
“조골노귀는 남강의 지유곡(地幽谷)에서 오랫동안 폐관 수련 중이라 들었습니다. 총애하는 제자를 죽였으니 그가 쫓는다면 제가 목숨을 걸어도 전하를 안전하게 지키기는 어려울 겁니다.”
혈적후도 상황을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려 수사가 10년이 너무 길다고 한 겁니다.”
석천공도 한숨을 내쉬자 세 사람은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13황자,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시도를 해보시겠는지요?”
한참을 고민하던 혈적후가 입을 열었다.
“무슨 방법인지 들어나 보지요.”
석천공이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말했다.
* * *
2년 후.
마계 남강역 남부의 밀림 위를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핏빛 그림자가 쾌속으로 지나갔다.
핏빛 마차에는 세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 홍의 사내가 마차의 진법 원반에 자신의 피를 한 방울 떨구고 있었다.
세 사람은 한립과 석천공 그리고 혈적후였다.
“전하, 여기서 두 달만 더 가면 류삼성(硫森城)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와서 1년 이상 시간을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손을 거둔 혈적후가 말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수사가 정혈을 소모해가며 속도를 높이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이렇게 빨리 오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런 말씀은 안전하게 초우성에 도착해 전송진에 오른 다음에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석천공의 말에 혈적후가 손을 저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공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초우성에 가겠다고? 노부가 허락을 했더냐?”
물결친 허공에 무형의 장벽이 나타나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조골노귀입니다!”
혈적후가 인상을 찡그리고 말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결국 따라잡혔군요.”
큰 키에 수척한 얼굴을 지닌 조골노귀는 머리의 일부가 백골로 드러나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암녹색 도포를 걸친 모습이 마치 도사 같았다.
“내 제자를 죽이고 무사히 떠날 수 있을 듯싶더냐?”
“조골 선배님, 선배님의 제자가 먼저 13황자님을 죽이려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혈적후가 공수하고 나서서 사정을 설명했다.
“이유는 상관없다. 목숨값은 목숨으로 밖에는 치를 수 없지.”
수염을 쓸어내린 조골진인의 장포 자락이 펄럭이면서 공간 물결이 심해졌다.
“맞붙어서는 안 됩니다! 흩어져 달아나시죠!”
혈적후의 외침에 석천공과 한립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피부에 핏빛 주술문자를 일으킨 혈적후는 오히려 조골진인을 향해 달려들면서 등 뒤로 수많은 핏빛 마귀 허상들을 불러내 주먹을 휘두르게 했다.
“정녕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그를 비웃으며 조골진인이 주먹을 뻗었다.
혈적후처럼 엄청난 기세가 실려있지 않은 가벼운 움직임에 하얀빛이 흐르며 피부 바깥으로 기이한 금색 문양이 새겨진 뼈가 생겨났다.
쿠앙!
주먹의 충돌에 파랑이 사방으로 뻗어나가 주변 수풀의 나무가 뚝뚝 부러지고 암석들이 우수수 가루가 되었다.
혈적후의 거대 핏빛 마귀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했다.
그 충격에 혈적후의 한쪽 어깨가 부러지고 팔 절반이 너덜너덜해졌다.
퍽!
뼈 갑옷을 두른 조골진인이 튕겨 나가는 그를 쫓으며 주먹으로 혈적후의 왼쪽 가슴을 꿰뚫었다.
기이하게도 참혹한 지경에 이른 혈적후는 피를 전혀 흘리지 않고 살점이 저절로 흐물흐물 붙어 조골진인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이런 허술한 수법이 먹힐 줄 알았더냐?”
손에서 하얀빛을 일으킨 조골진인은 가시가 덕지덕지 붙은 낭아봉을 불러내 혈적후의 몸을 찢어냈다.
파앗!
그런데 허공에서 끔찍한 잔해가 합쳐져 다시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조골진인은 다시 살아난 혈적후를 보다가 벌써 멀리 도망가고 있는 한립과 석천공을 보고 눈빛이 가라앉았다.
화아앗.
그의 손바닥에서 하얀 빛덩이가 퍼져 거대한 영역을 만들어냈다.
흐릿한 하얀 안개로 가득 찬 영역에는 여덟 개의 탑들이 들어차 있었다.
뼛조각들로 이루어진 탑은 지붕에 도깨비불처럼 녹색 불꽃을 머금고 있었다.
“조물경(造物境) 영역…….”
혈적후가 중얼거렸다.
영역에 갇힌 혈적후는 뼈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백골 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급히 보호막을 방출해 육신을 지켰지만 조골진인의 손짓에 탑들이 다가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탑 지붕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그곳의 백골 머리의 뻥 뚫린 눈구멍에서 녹색 귀화(鬼火)가 번들거렸다.
혈적후의 피부 곳곳에 살이 벌어지고 하얀 뼈들이 튀어나와 육신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혈적후는 암홍색 영역을 발산해 자신을 에워싸고 짙은 핏물처럼 변해 튀어 나가려는 뼈들을 막았다.
이에 조골진인이 코웃음을 치고 무언가를 하려는데 어느새 제자를 죽인 원수인 한립과 석천공이 보이지 않았다.
돌연 손을 뻗어 자신의 피부를 찢고 좌우 늑골뼈를 분리해 던졌다.
펑! 펑!
폭음을 남긴 두 백골은 어느덧 십여 만리를 이동해 달아나고 있던 석천공과 한립을 따라잡았다.
한립이 표정이 달라져 뒤를 돌아보자 늑골뼈가 조골진인의 화신으로 변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딜 가려 하느냐?”
조골진인 화신이 달려들자 한립은 금빛을 강하게 일으켜 속도를 높였지만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코웃음을 친 화신이 손을 뻗어 허공을 찌르자 움푹 파인 자국이 생겨나 한립의 육체를 옭아매었다.
그 자리에서 멈춘 한립은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력에 고통스러워했다.
광소를 터트린 조골진인이 다른 손을 움직여 뼈로 이루어진 거대 손으로 그의 몸을 으깨 버렸다. 꼼짝하지 못하던 한립이 산산 조각나 흩어지려 했다.
그 모습에 조골진인이 좋아하다 얼굴이 굳었다.
파삭.
바스러진 한립의 시체가 쪼그라들어 갈라진 붉은 콩으로 변하더니 그 안에서 희미한 금색 피가 증발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무상맹 토끼 가면 하나가 서서히 떨어졌다.
이 같은 일이 석천공이 달아난 십여만 리 밖 다른 곳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분신을 회수한 조골진인이 사나운 얼굴로 탑에 둘러싸인 혈적후를 보았다.
암홍색 영역을 펼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그는 평온한 얼굴로 달아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감히 노부를 속이다니, 제법이구나. 내 기분이 썩 좋지 않으니 살고 싶다면 저들이 어디로 갔는지 말하거라. 사갑성이냐? 아니면 어량성? 그것도 아니면 고양성으로 간 것이냐?”
그가 말한 곳은 류삼성과 비교적 멀면서 초우성으로 갈 수 있는 전송진이 있는 성들이었다.
“선배님, 농담하십니까? 저는 대량의 정혈을 희생해 분신을 만들고 저를 미끼 삼아 선배님을 이곳까지 유인했습니다. 이제 와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밝힐 리 없지 않습니까.”
혈적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네 놈이 더이상 살기가 싫은 모양이구나! 어디 네 혼백도 그리 말하는지 들어보자!”
화를 참고 있던 조골진인이 백골영역을 급속도로 수축해 혈적후를 둘러싼 여덟 개의 백골탑에 푸른 불길을 일으켰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화륵!
영역으로 몸을 지키고 있던 혈적후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지더니 옥 부적을 꺼내 불사른 것이다.
팟.
옥 부적에서 더없이 강렬한 공간의 힘이 튀어나와 새까만 빛의 문을 만들고, 혈적후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 안으로 사라졌다.
조골진인이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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