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06화 (1,663/2,000)
  • 1906화. 화경

    *

    금색, 은색, 검은색, 붉은색이 격렬하게 충돌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일대 다수로 싸우는 한립이 불리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모습에 화경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콰콰쾅!

    그 순간 강력한 뇌전소리가 울리고 석천공과 나머지 둘이 떨어져 내렸다.

    선령력 소모가 극심한지 안색이 창백해진 한립이 다채로운 빛 속에서 나타나 심호흡을 했다.

    그걸 본 화경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가 연달아 수결을 맺어도 더이상 석천공 등을 조종할 수 없었다.

    “혼백을 봉인했군요. 어떻게 한 것입니까?”

    이제 화경의 얼굴에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걸 내가 알려줄 것 같습니까?”

    “어디 혼백을 뽑아 추혼술을 해도 알려주지 않을지 보겠습니다. 저들과 격전을 치르느라 원기가 3할밖에는 안 남았을 텐데요.”

    “당신의 화경 신통도 위력이 강한 만큼 기력 소모가 크다는 것을 압니다. 줄곧 나서지 않고 구경하는 척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겠고요.”

    한립은 상대의 말에 놀아나지 않고 느긋이 답했다.

    “…….”

    “당신에게 속아 오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둘뿐이니 제대로 붙어 봅시다.”

    한립은 화경을 향해 서서히 다가가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 소리를 들은 화경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

    “어디 오만한 소리를 할 실력이 되는지 봅시다!”

    화경은 두려움을 숨기고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노란 기운이 치솟아 커다란 짐승의 머리로 변했다.

    호랑이를 닮았으나 호랑이는 아니고 용을 닮았으나 용도 아닌 그런 기이한 짐승의 머리였다.

    노란 짐승 머리는 대뜸 입을 쩍 벌려 비단 같은 노란 빛줄기를 뿜었다.

    한립은 한 손을 들어 올려 대량의 금색 뇌전으로 두꺼운 뇌전 장벽을 이루고 노란 천을 막았다.

    엄청난 기운이 부딪쳤는데 굉음 대신 작은 소음만 들릴 뿐이었다. 두꺼운 뇌전 장벽이 노란 천에 뚫려 그 뒤의 한립을 공격했다.

    그는 미처 피하지 못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는데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 그곳에 남아 있던 한립의 잔영은 곧 흩어졌다.

    화경이 그걸 보고 흠칫 놀라 몸을 좌우로 흔들며 다섯 개의 노란 허상으로 흩어져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노란 허상들이 멀리 달아나기 전에 수많은 금색 검기들이 주변 수십 장을 뒤덮었다.

    이에 노란 허상들이 터져나가고 마지막으로 멀찍이 떨어진 허공에서 수정빛과 함께 화경이 나타났다.

    의복이 찢겨나가고 손발에 상처가 가득한 그는 안에 검은 갑옷을 입고 있어 중상은 입지 않은 듯했다.

    그저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던 가면이 날아가 고목처럼 쭈그러진 먹색 얼굴이 드러났을 뿐이었다.

    “감히 내 가면을 벗겨! 네 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얼굴이 드러난 화경은 흥분해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몸에서 노란빛이 흘러나와 십여 개의 노란 짐승 얼굴 허상들이 떠올라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열댓 개의 노란 천들은 검기들을 마구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금빛 검기들 속에서 한립이 나타나 사방팔방으로 대량의 금빛을 방출했고 동시에 청죽봉운검 18자루가 그의 몸에서 번개처럼 튀어 나가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시간영역!”

    화경은 금색 영역이 시간을 늦추는 것을 보고 놀라 서둘러 노란 수정빛을 내뿜어 수정빛 영역을 만들었다.

    수천수만 개의 꽃잎들이 나풀거리는 수정빛 영역은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웠다.

    그의 머리 위에 있던 거울이 밝은 빛을 발하며 노란 빛기둥으로 그를 둘러싸자 그 바깥으로 종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가 두 겹의 방어막을 치자마자 청죽봉운검 18자루가 번득 나타나 바깥의 종 그림자를 내리쳤다.

    쩡!

    종 그림자는 마구 떨리기는 했지만 깨지지 않았다.

    ‘뭐지?’

    종 그림자 속의 화경은 오히려 이상했다.

    비검들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위력으로는 이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 찰나, 종 그림자 위로 공간 파동이 일고 자금색 비늘로 뒤덮인 주먹이 떨어졌다.

    쿠앙!

    황토색 빛을 출렁인 종 그림자가 도자기처럼 깨져나갔다.

    공중에 나타난 삼두육비의 자금색 마신은 열반성체로 변신한 한립이었다.

    한립은 주변의 영역에서 괴이한 힘이 그의 오감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을 느꼈지만 방대한 의식의 힘으로 막으며 나머지 다섯 개의 주먹을 화경 주변의 노란 빛기둥으로 날렸다.

    쾅! 쾅! 쾅! 쾅! 쾅!

    웅대한 힘에 주변 수백 장 허공이 뒤틀리고 화경 주위의 노란 짐승 머리 허상들이 퍽퍽 터져나갔다.

    노란 빛기둥이 흔들리다 터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화경은 주먹에 직접 맞지 않았는데도 그 여파에 휩쓸려 날아가며 입에서 피를 뿜었다.

    겁에 질린 그는 그 힘을 이용해 멀리 달아나려 둔광을 일으켰지만 이미 시간영역에 갇혀 전력을 쏟을 수 없었다.

    다급해진 그는 입에서 정혈을 뿜어 거울에 흡수시켰다.

    웅!

    노란 거울에 핏빛이 맺히고 거울에서 수정빛이 빠져나와 화경의 몸으로 들어갔다. 화경은 피부가 붉게 물들며 몸이 근육질로 변해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동시에 그의 주변에 똑같이 생긴 노란 둔광들이 수십 개가 나타나 사방팔방으로 달아났다.

    기운이 똑같아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도망치게 놔둘 것 같으냐.”

    한립은 진언보륜을 등 뒤로 불러내 쾌속으로 회전시켰다.

    웅웅웅웅!

    금색 파문이 고리에서 흘러나와 모든 둔광들을 감싸 정지시켰다.

    한립이 안심하고 손을 쓰려는 와중에 왼쪽 전방의 빛줄기가 갑자기 방대한 빛을 폭발하면서 거의 대라경에 가까운 기운을 드러냈다.

    진짜 화경이 무언가 수를 써서 금색 파문을 뚫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

    놀란 한립이 서둘러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청죽봉운검 18자루가 금빛 검기를 방출하며 맹렬히 날아가 모든 둔광들을 쳐부수고 화경의 육체까지 터트렸다.

    화경의 신체가 산산 조각나며 증폭되었던 기운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흔들리던 금색 파문들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고 한립은 열반성체를 풀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단약 2개를 삼켰다.

    푸른 빛으로 화경의 잔해와 인근의 노란 거울을 불러들인 그가 눈을 반짝였다.

    상대의 본명 마보로 보이는 거울은 최면 법칙을 이용해 의식의 힘이 강한 그까지 최면에 걸리게 할 뻔했으며 본원의 힘을 폭발시켜 태을 후기 수사가 대라경의 힘을 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최근 연신술이 크게 늘지 않았으면 화경의 수에 당했을 것이다.

    한립은 비취색 빛으로 거울을 감싸 현천호리병 속에 넣어두고 화경의 잔해 속에서 노란 원영을 끄집어냈다.

    살기를 드러낸 그는 당장 원영을 으스러트려 죽이려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석천공을 살피고 참았다.

    한립은 손바닥에 은색 불꽃을 일으켜 노란 원영에 은색 주술문자를 새겨 넣고 남은 시체는 태워버렸다.

    재가 되어 사라진 화경의 시체에서 검은 갑옷과 노란 팔찌 그리고 노란 짐승 머리 조각상이 나왔다.

    그가 물건들을 정리해 넣자 금색 파문에서 벗어난 화경의 원영이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원영의 몸에 새겨진 은색 주술문자에서 화염이 일어 노란빛을 불살라 버렸다.

    “끄악!”

    화경 원영은 끔찍한 고통에 벌벌 떨어야 했다.

    “진염 금제를 펼쳐 놓았습니다. 또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즉시 죽게 될 테니 알아서 하시지요.”

    한립은 싸늘하게 말하고는 석천공이 쓰러져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저기, 수사 우리 좋게 말로 풉시다. 우리야 뭐 딱히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의 주인 때문에 싸우게 된 것 아닙니까. 석천공을 보호하며 보수를 얼마나 받기로 하셨습니까?

    마주 대인의 황자와 공주 중에서도 석천공은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저와 같이 다섯째 공주이신 석경연 전하의 휘하로 들어가시지요? 수사의 실력에 제 추천을 받으면 5공주 전하의 중용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석천공이 약조한 보수도 두 배로, 아니 세 배로 쳐주실 테고요!”

    화경 원영은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그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건 화경 신통을 푸시지요.”

    한립은 전혀 안 들린다는 태도로 말했다.

    “우리처럼 성족도 아닌 듯한데 진선계에서 마공을 좀 익혔어도 이곳 물정은 잘 모르실 것 아닙니까? 야양성에서 황자와 공주들 간의 쟁투가 아주 극심합니다. 성역의 수많은 세력이 그 황권 다툼에 끼어들어 있고요. 저희 같은 태을경 수사가 그런 일에 휘말려 봐야 뭐가 좋겠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다시 생각을…….”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화경 신통을 푸세요. 당신이 죽으면 화경 신통은 자연히 풀린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정 없는 한립의 말에 화경 원영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싫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냉소를 흘린 한립은 곧장 원영의 은색 화염 문자에 힘을 실었다.

    “끄악! 아, 알겠습니다! 풀면 될 것 아닙니까. 제발 살려 주십쇼.”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자 화경 원영은 재빨리 수결을 맺었다. 석천공 등 세 명의 이마에서 기이한 문양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걸 본 한립도 고개를 끄덕이고 화경 원영의 금제 발작을 멈춰주었다.

    파앗.

    그들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한 한립은 석천공을 시작으로 투명한 의식 사슬들을 거둬들이고 푸른 부적을 하나씩 붙여 주었다.

    천천히 눈을 뜬 석천공과 그 수하들은 부적의 힘에 겨우 기운을 내고 자리에 앉았다.

    “려 수사…….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석천공은 아직도 멍한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까만 얼굴 노인과 붉은 치마 부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렇지, 화경은요? 달아난 겁니까!”

    갑자기 기억이 떠올랐는지 소스라치게 놀란 석천공이 주변을 살폈다.

    “여기 있습니다. 수사가 묻고 싶은 것이 있을 것 같아 원영을 남겨 두었습니다.”

    한립은 손에 쥐고 있던 화경 원영을 석천공에게 넘겨주었다.

    석천공의 눈에 원한이 가득했다.

    “13황자, 저도 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런 겁니다! 5전하를 떠나 13황자를 따를 것이니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전하와 관련된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

    화경 원영은 싹싹 빌면서 회유하려 했지만 석천공은 들을 생각도 않고 다섯 손가락에 은빛을 일으켰다.

    “잠깐, 잠깐만요! 날 죽이면 큰일이 날 겁니다. 사존이신 조골진인께서 가만있지…….”

    화경 원영은 끝까지 발버둥 쳤지만 결국 비명을 지르고 노란빛으로 흩어졌다.

    그걸 본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석천공과 기 노인의 친밀한 관계를 생각했을 때 그를 최면 법칙으로 속여 자폭하게 만든 화경을 살려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려 수사 덕에 살았습니다.”

    석천공이 감정을 추스르고 일어나 정식으로 공수를 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그런데 화경이 마지막에 남긴 말은 그냥 넘길 수 없군요. 조골진인이라면 대라경 존재겠지요.”

    “그렇습니다. 상황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좋지 않습니다. 임산성도 안전하지 못하니 바로 떠나시지요.”

    석천공은 이런저런 단약을 꺼내 꿀꺽꿀꺽 삼켰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싸웠으니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럼 저들은…….”

    한립은 노인과 여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에 석천공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데 다른 이들을 돌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석천공보다 부상이 심해서 정신을 차린 뒤에도 움직이지 못했다.

    “저들의 목표는 납니다. 내가 임산성을 떠나기만 하면 이곳에서 쓸데없는 일을 벌일 가능성은 적겠지요. 이곳에 남아 부상을 치료하게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석천공은 보랏빛으로 노인과 여인 그리고 주변에 흩어진 기 노인 등의 시체를 거두어 어딘가로 날아갔다.

    한립이 그 자리에 앉아 공법을 운용해 단약을 연화시키는 동안 석천공이 돌아와 오신비사를 불러내었다.

    “출발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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