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05화 (1,662/2,000)
  • 1905화. 속다

    *

    검은 영역은 정염불새를 전혀 막지 못했고 새의 부리가 어느새 노인을 겹겹이 둘러싼 보호막에 닿았다.

    퍼퍼퍼펑…….

    여덟 겹의 보호막이 연달아 깨져 빛으로 흩어지고 정염불새는 그대로 까만 얼굴 노인을 꿰뚫었다.

    허리에서 둘로 갈라진 노인의 시체 조각이 은색 화염에 휩싸여 활활 타올랐다.

    “이럴 수가!”

    그걸 보고 겁을 먹은 붉은 치마 여인은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려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백 장도 가지 못한 채 수정 사슬들이 번개처럼 그녀를 둘렀고 인근에 한립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부인은 분홍 안개를 몸에서 퍼트려 급속도로 영역을 만들어냈다.

    수십 줄기의 연하고 짙은 향기가 분홍 영역 안을 맴돌면서 법칙의 힘과 융합되어 한립을 향해 다가왔다.

    동공을 수축한 한립은 금빛을 방출해 시간법칙으로 영역의 법칙의 힘을 막으면서 손가락을 튕겨 금빛 뇌전을 상대의 미간과 단전 등으로 날려 보냈다.

    파칙! 파칙!

    몸이 새까맣게 탄 부인은 몸을 바르르 떨다 기절했다. 그러자 자연히 그녀의 분홍 영역과 열댓 줄기의 기이한 향들도 흩어졌다.

    한립은 소매를 털어 녹색 빛으로 미향들을 불러 모아 챙겼다.

    쿵!

    그때 멀리 검진 속에서 푸른빛이 반작이고 기 노인의 원영인 푸른 소인이 무언가 비술을 사용해 교룡검진을 뚫고 나왔다.

    푸른 원영은 냅다 둔광을 일으켜 달아났지만 석천공이 그 앞을 막고 나타나 흑자색 거대 손으로 원영을 붙잡았다.

    “기 노인, 당신은 어머니 때부터 내 곁을 지켜온 사람입니다. 당신을 단 한 번도 홀대한 적이 없건만 내게 왜 그런 것입니까?”

    석천공은 주먹을 불끈 쥐고 물었다.

    “날 붙잡아 소주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거란 착각 마라!”

    푸른 원영은 석천공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강렬한 푸른 빛을 발산했다.

    “석 수사, 그자가 자폭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석천공이 무슨 소린지 모르고 있을 때 한립이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석천공은 거대 손에서 보라색 빛의 실을 뿜어 푸른 원영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쾅!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푸른 원영이 자폭해 태양과 같은 빛이 흩어졌다.

    콰릉!

    석천공은 급히 피했지만 너무 가까이 있던 탓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때 금색 뇌전이 하늘에서 떨어져 그의 앞을 막고 십(十) 자로 교차한 금색 비검으로 변했다.

    한립은 푸른 태양이 흩어지자 다가와 청죽봉운검 두 자루를 회수했다.

    “려 수사, 어찌 된 일일까요? 저들이 말하는 고풍은 또 누구고요.”

    석천공이 물어도 한립은 눈을 감고 무언가를 감응하느라 바빴다.

    펑!

    잠시 후 수백 장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광풍이 불고 노란 인영이 나타났는데 그 뒤를 쫓는 푸른 인영은 또 다른 한립이었다.

    한립이 손을 휘두르자 여섯 줄기의 금빛 청죽봉운검들이 날아가 노란 인영을 가르려 했다.

    “흥!”

    노란 인영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코웃음을 치며 화려한 수정 빛을 일으켰다. 그 안에서 희미하게 노르스름한 거울 같은 게 보였다.

    콰쾅!

    여섯 자루의 검이 튕겨 나오고 화려한 수정 빛도 폭발했다. 노란 인영은 그 틈에 멀리 피했고 노란 장포를 입은 사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가면을 쓴 상대는 노란빛으로 가려져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석천공은 안색이 달라져 그것을 지켜보았다.

    “제 추측이 맞다면 기 노인 등은 무슨 비술에 걸려들어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기습한 것 같습니다.”

    한립이 가면 쓴 사내를 주시하며 하는 말에 석천공도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립이 더는 노란 인영을 쫓지 않고 소매를 펄럭이자 석천공 옆에 서 있던 한립이 푸른빛으로 변해 그의 체내로 돌아갔다. 바로 그의 화신이었다.

    교룡검진을 이뤘던 청죽봉운검 12자루는 물고기처럼 하늘을 헤엄쳐 그의 소매 속으로 돌아갔고, 그 안에서 살점 사내 등의 시체가 떨어져 내렸다.

    “상황이 급박해서 제때 공격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한립은 미안한 기색으로 은색 화염에 둘러싸인 까만 얼굴 노인을 불러들였다. 허리에서 절반으로 잘렸던 몸은 붙어 있었지만 기운이 아주 약했다.

    금제에 걸렸는지 바닥에 떨어진 노인은 꼼짝하지 못하면서도 원한이 가득한 눈으로 한립과 석천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은색 화염이 몰려들어 불새로 변한 다음 한립의 체내로 들어갔다.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그걸 다 알아맞히시고요.”

    황포 사내는 한립을 위아래로 훑으며 손뼉을 쳤다. 그가 말을 하면서 노란빛을 거두자 은색 가면 아래로 하얀 턱이 드러났다.

    기껏해야 스물대여섯 살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볼에는 분을 칠하고 입술도 빨갛게 발라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화경, 네 놈!”

    석천공이 아는 자인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며 눈에 핏발이 섰고 기운이 언제라도 폭발할 듯 요동쳤다.

    한립이 그 옆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푸른 빛을 주입해 주고서야 그런 현상이 사라졌다.

    “석 수사, 무슨 마음인지는 알겠으나 지금은 상심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저자의 실력이나 법칙이 범상치 않은 것 같은데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석천공이 안정을 되찾자 한립이 전음을 보냈다.

    가면 사내의 수행은 태을 후기였고 지닌 마보(魔寶)도 강력해서 기 노인 등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화경이란 자입니다. 제 다섯째 누이인 석경연의 수하로 최면술과 비슷한 법칙을 익혀 부지불식간에 상대의 오감을 조종하죠. 기 노인 등은 수사의 추측대로 저 자에게 속아 넘어갔을 겁니다.”

    석천공은 심호흡을 하더니 전음으로 답했다. 그 말에 한립은 인상을 찡그렸다.

    십환산맥과 웅거성에서는 대황자 석참풍이 난리더니 임산성에서는 석경연이 수를 쓰다니 석천공의 마역 형제자매들은 하나같이 만만한 자들이 없었다.

    “다섯째 누님이 보냈겠지? 이유가 무엇이냐?”

    석천공이 앞으로 나서서 화경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아시면서 물으십니다. 다섯째 전하께서는 제게 라타비파와 전하의 머리를 갖고 돌아오라 명하셨습니다. 허나 곁에 이런 고수를 두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그냥 라타비파만 넘겨주시면 저는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어떠십니까?”

    화경은 힐끗 한립을 보고 태연히 웃었다. 그 말에 한립은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웃기는 소리! 임산성에 침입해 내 사람들을 이리 많이 죽여 놓고 무사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끌끌, 개 몇 마리 잡아 죽였다고 무얼 그리 화를 내십니까. 고귀한 혈맥을 지니신 분이 체면은 지키셔야지요.”

    화경은 입을 가리고 괴소를 흘렸다. 이에 석천공은 더는 대화를 나눌 마음이 없는지 몸을 날렸다.

    품에 라타비파를 불러낸 그는 열 손가락을 빠르게 튕겨 수백 줄기의 은색 바람의 칼날을 날렸다.

    은색 바람의 칼날이 어찌나 빠른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화경은 라타비파를 보며 탐욕을 드러내고는 바람처럼 몸을 뒤로 뺐다.

    그때 그의 등 뒤로 금색 비검 세 자루가 나타나 수많은 검 허상들을 만들어냈다.

    화경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황토색의 작은 종을 꺼내 들었다.

    댕!

    작은 종은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더니 거대한 종 그림자를 만들어내 그를 감쌌다.

    다음 순간 수많은 검 허상들과 은색 바람의 칼날이 종 그림자를 덮쳤지만 뚫지 못했다.

    얼굴을 굳힌 석천공이 수결을 변화시켰다.

    퍼득! 퍼드득!

    수백 개의 은색 바람의 칼날들이 제비처럼 황토색 종 그림자를 돌며 두 개의 거대한 초승달 모양 칼날로 뭉쳤다.

    콰르릉!

    화경이 은색 초승달의 위력을 느끼고 양손을 뻗어 종 그림자를 두 배로 두껍게 만들었다.

    노란 주술문자들이 흙 속성의 법칙의 힘을 품고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은색 초승달들이 강렬한 공간 파동을 일으키고 종 그림자를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들어갔다.

    “어떻게!”

    깜짝 놀란 화경이 허공을 박차고 피하려 했으나 한립이 종 그림자 뒤쪽에서 나타나 손바닥을 날렸다.

    쩡!

    웅웅거리던 거대종 그림자가 노란빛을 터트리며 깨지고 은색 초승달 두 개가 그의 몸을 갈랐다.

    화경의 몸이 공간법칙의 힘에 터지면서 잔해가 튀었다.

    “기 노인, 내 복수를 했으니 부디 좋은 곳으로…….”

    한숨을 내쉰 석천공이 중얼거렸다.

    “조심!”

    그를 도와 화경을 없앴던 한립이 갑자기 소리치자 석천공도 고개를 들고 안색이 달라졌다.

    흩어진 살점 조각들이 흐릿하게 사라진 것이다.

    두 눈에서 보랏빛을 반짝인 한립은 강대한 의식을 퍼트렸다.

    “13황자 이렇게 저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니 실망이 큽니다! 겨우 이 정도 능력밖에 없었다면 저는 아주 오래전에 죽었을 거라고요.”

    음산한 목소리가 수백 장 밖에서 들리고 화경이 나타났다.

    그의 머리 위로 노란색 거울이 떠 있었는데 한가운데 꽃봉오리와 그것을 둘러싼 올챙이들이 새겨져 있는 게 특이했다.

    한립은 거울을 보자마자 화려한 꽃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런.’

    퍼뜩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한립은 방대한 의식의 힘을 이용해 어느새 의식세계로 흘러들어온 붉은 그림자들을 밀어냈다.

    “호오, 의식의 힘이 이렇게 강대할 줄이야. 제 화경술에서 벗어나다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요…….”

    화경이 놀란 얼굴로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서늘해진 한립은 경계심을 높였다.

    쉬쉭!

    그때 하얀 그림자가 양쪽에서 날아들었다.

    무표정하게 기습을 피하고 보니 석천공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석 수사…….”

    “목숨을 내놓아라!”

    석천공은 살기등등하게 그를 노려보면서 라파비파를 튕겨 수많은 은색 바람의 칼날을 튕기고 있었다.

    방금 그를 기습한 백옥 자도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석 수사, 정신을 차리세요!”

    백옥 자가 휘리릭 돌며 궁전 크기의 빛덩이로 변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한립이 소리쳤다.

    천둥처럼 하늘을 울리는 그의 포효에는 불경소리와 같은 범상치 않은 힘이 실려있었다.

    이전에 익혀둔 불가의 사자후 신통이었다.

    그러나 석천공은 그걸 듣고도 아무런 반응 없이 다섯 손가락을 펼쳐 흑자색의 화염을 손톱처럼 내뿜어 한립의 목을 노렸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수결을 맺어 대량의 금색 뇌전을 석천공의 미간과 복부 등을 공격했다.

    파치칙!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떤 석천공은 몸이 새까맣게 탔는데도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양옆에서 검은 안개가 몰려들고 익숙한 향기와 함께 분홍색 안개 용이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된 거지?’

    금빛을 번득이고 피한 한립이 양쪽의 까만 얼굴 노인과 붉은 치마 부인을 발견했다.

    안색이 꺼멓게 변한 그들은 기운이 엉망이었는데도 남은 생명을 불살라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으하하, 화경 신통에 당한 이들은 내가 풀어주지 않는 한 아무리 중상을 입어도 죽을 때까지 움직이게 되지요.”

    화경이 이를 지켜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이 가라앉은 한립은 눈빛이 서늘해져서 청죽봉운검 18자루를 불러냈다.

    “가라.”

    그의 명에 18자루의 검들이 무섭게 날아가 강력한 뇌전법칙을 발산했다. 석천공과 나머지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열 손가락에 잔영이 남을 정도로 라타비파를 튕긴 석천공은 은색 바람의 칼날과 백옥 자를 융합해서 작열하는 태양을 만들어냈고, 까만 얼굴 노인은 입에서 벼루를 불러내 호수와 같은 깊은 검은 물을 응결했다.

    붉은 치마 부인은 하얀 두루마리 족자를 꺼내 펼쳐 사실적으로 그려진 하얀 수정 용 8마리의 그림을 선보였다.

    여인의 외침에 날아오른 용들이 분홍빛으로 물들면서 거의 태을경에 근접한 기운을 내뿜고 날아올랐다.

    붉은 치마 부인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갔지만 거침없이 수결을 맺고 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