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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04화 (1,661/2,000)
  • 1904화. 정염불새

    *

    일각이 지나 걸음소리가 들리고 기 노인이 돌아왔다.

    “어찌 되었는가?”

    “회답이 없습니다, 전하.”

    벌떡 일어났다가 자리에 앉은 석천공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주위 사람들은 전부 그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반나절만 더 기다려 보고 그래도 셋째 형님의 사람이 도착하지 않으면 더는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네.”

    석천공은 이렇게 말하고 기 노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 노인이 그걸 보고 다시 몸을 돌려 떠나고 한립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대청이 고요해지고 점점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 저를 따라가시지요.”

    석천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립과 다른 세 사람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대청을 떠난 그들은 저택 깊은 곳의 대전으로 들어가 원형의 새까만 제단을 마주했다.

    거대한 흑수정을 통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제단이었다. 기 노인이 대전의 문을 닫고 따라 들어왔다.

    “준비는 되었는가?”

    석천공이 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결을 맺어 대전 문으로 검은빛을 날렸다.

    쿠쿵!

    문을 시작으로 검은빛이 퍼져 대전 안이 대낮처럼 빛나고 바닥에서 거대한 은색 진법이 나타났다.

    백여 개의 새까만 수정돌이 박힌 마기가 진득하게 발산되는 전송진법이었다.

    진법 주위로 회색 의복을 입은 여덟 명이 금선 마족이 나타나 석천공을 향해 예를 올렸다.

    “석 수사, 어디로 통하는 전송진입니까?”

    한립이 입을 열었다.

    “백만 리 밖의 초우성(楚禹城)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황을 보아하니 셋째 형님이 보낸 사람은 도중에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이곳에서 기다리기보다는 일단 초우성으로 가서 다음 계획을 세우시지요.”

    “좋은 생각입니다.”

    석천공의 대답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 노인, 진법을 발동하지.”

    “예.”

    기 노인은 은색 영패를 들고 무언가를 하려다 멈칫했다.

    “왜 그러지?”

    석천공이 의아해하며 물었고, 한립도 고개를 돌렸다.

    기 노인은 대답 없이 허리를 굽혀 바닥의 진법에서 검은 수정돌 몇 개를 빼내 거두더니 다른 수정돌을 꺼내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발동하려고 보니 마원석 몇 개가 정순하지 않아 새것으로 갈아 넣었습니다.”

    석천공을 향해 미소짓던 기 노인은 한 걸음 물러나 양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웅.

    은색 영패가 빛나고 인근에 있던 8명의 금선 마족들이 꺼낸 영패가 잇따라 빛이나 은빛으로 연결되었다.

    “려 수사, 갑시다.”

    석천공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전송진에 오르려는데 별안간 손에 검은빛이 어린 기 노인이 그의 등을 노렸다.

    석천공의 얼굴에 놀람과 분노가 교차한 사이, 검은빛이 가볍게 그의 보호막을 찢고 들어왔다.

    뱀처럼 파고드는 검은빛을 석천공 허리춤에 걸린 보라색 옥패가 터지며 빛의 방패를 만들어 막았다.

    “기 노인!”

    드디어 정신을 차린 석천공이 노호성을 터트리며 옆으로 피했고, 그 순간 보라색 빛의 방패가 뚫려 검은빛이 그를 스쳤다.

    서걱!

    석천공의 허리에 기다란 상처가 벌어져 피가 샘물처럼 솟았다.

    기 노인이 손에 검은빛을 일으킨 순간 한립 옆에서도 금색 발톱이 달린 짐승의 손과 분홍색 연검, 그리고 새까만 고리가 날아들었다.

    쉬쉬쉭!

    세 개의 마기가 동시에 그를 덮치고 검은 얼굴 노인, 살점 사내, 붉은 치마 부인이 한립을 중간에 두고 몰려들었다.

    팟-

    하지만 한립의 신영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잔영!’

    세 사람의 안색이 달라졌을 때, 석천공의 피를 뿜던 허리의 상처가 점점 새까맣게 물들어 전신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죽어라!”

    기 노인이 흉악하게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뻗었다.

    석천공 머리 위로 푸른 소용돌이 3개가 떠올라 비처럼 날카로운 푸른빛을 떨구었다.

    진법 주변의 금선 마족 8명도 달려들어 석천공을 향해 보물을 날렸다.

    “기 노인……. 당신들…….”

    석천공은 분개한 표정으로 체내의 원영을 재촉해 대량의 보랏빛을 방출하며 흑자색 방패를 만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방패는 보라색 주술문자가 겹겹이 뭉쳐 있었다.

    콰콰콰쾅!

    방패가 만들어지자마자 푸른빛과 금선들의 마기가 쏟아져 격렬한 파동과 소음을 만들어냈다.

    부들부들 떨리던 방패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균열이 가고 펑! 하는 폭음을 남기고 터졌다.

    방패가 부서진 순간 석천공도 중상을 입고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그가 일어나기도 전에 수많은 공격이 그를 뒤덮었는데, 이때 흐릿한 금빛이 반짝이며 그를 데리고 사라졌다.

    바닥에 커다란 구덩이가 여러 개 생기고 온갖 파동이 휘몰아쳤지만 주변 벽에 어린 검은빛이 충격을 이겨냈다.

    이때, 흐릿한 금빛이 뒤쪽 벽을 찔러 들어갔다.

    퍽!

    검은 금제가 종잇장처럼 찢겨나가자 금빛은 벽을 뚫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금제가 부서진 벽이 더이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 위로 솟아오른 금빛 속에 한립이 석천공을 붙들고 서 있었다.

    폐허가 된 궁전을 보며 한립이 석천공의 어깨를 짚었다. 대량의 정순한 선령력이 그의 몸속으로 밀려 들어가 독을 억제했다.

    “고맙습니다, 려 수사.”

    마비가 풀린 석천공이 얼른 똑바로 서서 남색 단약을 꺼내 삼켰다.

    피부에 남색 문신 같은 것들이 퍼져나가며 허리춤의 상처를 봉합하고 검은 기운을 몰아냈다.

    “수하들이 배신한 것 같은데 어찌할 생각입니까?”

    한립은 차분히 물었고 석천공은 한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쿵! 쿵!

    바로 그때 연달아 굉음이 울리고 폐허 속에서 기 노인이 등이 날아올랐다.

    석천공을 힐끗 본 한립은 청죽봉운검 세 자루를 불러냈다.

    그의 손짓에 수많은 뇌전 줄기를 휘감은 검들이 믿기 어려운 속도로 날아갔다.

    기 노인은 강력한 뇌전법칙 파동을 감지하고는 안색이 달라져 괴성을 질렀다.

    포효하는 그의 입에서 푸른 소용돌이 3개가 다시 나타나 수많은 푸른 파문으로 두꺼운 장막을 만들어냈다.

    수많은 금빛 뇌전실들이 푸른빛의 장막에 떨어졌으나 소형 소용돌이들이 나타나 뇌전실들을 삼키려 했다.

    하지만 청죽봉운검이 변한 검사(劍絲)의 강도는 그의 예상을 초월해서 가볍게 소용돌이를 뚫고 들어가 그 뒤의 인물들을 덮쳤다.

    그러나 찰나의 시간이 그들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고 말았다.

    살점 사내가 비대한 손바닥을 펼쳐 허공을 때렸다.

    쩡!

    금속이 충돌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색 파문이 미친 듯이 퍼져나갔다!

    그에게 날아들던 금색 뇌전실 중 절반가량이 폭발하고, 남은 실들은 파문에 막혀 더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크하앙!

    살점 사내가 고함을 지르며 두 손으로 전방을 할퀴자 금색 파문들이 빠르게 집결해 사자 허상을 이루며 울부짖었다.

    금색 음파가 사자 허상에서 빠져나와 남은 뇌전 실들을 갈라 빛으로 흩어버렸다.

    동시에 두 눈에서 실체화된 검은빛을 쏘아 보낸 까만 얼굴의 노인은 몸을 회전하면서 대량의 검은 그림자를 뿜었다.

    기이한 한기의 법칙이 허공을 꽁꽁 얼려 금색 뇌전 실들은 검은 그림자와 충돌해 움직이지 못했다.

    붉은 치마 부인은 입에서 하얀 수정 반지를 꺼내 법결을 던져 넣었다.

    바람을 타고 부풀어 오른 반지가 거대한 하얀 고리가 되어서 그녀를 감싸고 급속도로 회전했다.

    하얀 고리가 펑! 터지며 하얀 구름으로 변해 금색 뇌전 실들을 가두었다.

    공격을 막아낸 기 노인 주변으로 금선 마족들이 다가와 약속이라도 한 듯 진법 형상을 이루고, 동시에 빛을 일으켜 거대한 꽃봉오리 형상을 만들어냈다.

    각종 빛이 하나로 합쳐져 꽃봉오리가 피어나자 잿빛이 아홉 사람을 감싸고 금색 뇌전 실을 막아주었다.

    한립은 적들이 금색 뇌전 실을 전부 막아낸 것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석천공에게 고개를 돌렸다.

    “석 수사,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상황이 악화될 겁니다!”

    “죄송합니다, 려 형에게 걱정을 끼쳤군요. 저들이 우리에게 살심을 품었으니 수사께서도 봐주실 것 없습니다!”

    석천공은 괴로운 표정을 지우고 단호히 말했다.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즉시 손을 뻗어 청죽봉운검 9자루를 날리며 하늘을 뒤덮은 뇌전 실들을 거두어 세 자루의 금색 비검으로 변하게 했다.

    총 12자루의 청죽봉운검이 합쳐져 눈부신 빛을 터트렸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양손으로 풍차처럼 휘저어 순식간에 대형 검진을 완성했다.

    바로 규룡검진이었다.

    쿠르릉.

    검진으로 인근 공간이 울리고 엄청난 압박감이 발생했다.

    까만 얼굴의 노인과 붉은 치마 부인이 놀라 좌우로 흩어지며 검진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속도가 느린 살점 거한이나 진법을 펼치고 있던 기 노인 등은 미처 달아나지 못해 금색 검진 안에 갇히고 말았다.

    안색이 달라진 살점 거한이 입에서 금빛을 뿜어 사자 허상에 불어넣었다.

    크앙!

    몇 배로 몸을 부풀린 사자 허상이 살점 거한을 품고 금색 반점이 가득한 몸을 드러냈다.

    금색 갑옷을 입은 건장한 무장 같아 보였다. 황금 사자는 검진 바깥을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기 노인 등은 회색빛의 진법을 발동해 잿빛 실들을 방출해 검진을 깨려 했다. 그걸 본 한립이 냉소를 흘리고 검결을 맺었다.

    쉬쉬쉬쉬쉭.

    날카로운 금색 검기가 폭발적으로 튀어나와 12마리의 거룡 허상을 이루고 금색 사자와 회색빛의 진법을 갈랐다.

    서걱서걱!

    무척 단단해 보이던 금색 거대 사자가 손쉽게 썰려 나가고 그 속에 숨어 있던 살점 거한마저 비술을 쓰려다 거룡 허상에 스쳐 수많은 살점 조각으로 흩어졌다.

    다른 쪽에서도 회색빛의 진법이 난도질을 당해 검기에 둘러싸인 기 노인과 8명의 마족이 참혹한 비명을 질렀다.

    “고풍, 이 악독한 놈! 멈춰라!”

    붉은 치마 여인이 눈을 부릅뜨고 분홍 허상으로 변해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화려한 분홍색 옥 부채를 불러내 화염을 일으켰다.

    한립과 석천공은 그녀의 말을 듣고 움찔했다.

    붉은 치마 여인의 옥 부채에서 열기가 어린 분홍색 안개가 흘러나왔고 까만 얼굴 노인도 검은 잔영으로 변해 달려들었다.

    노인은 검은 구름을 뿜어 몸을 가렸고 그 안에서 집채만 한 까만 거북이 나타나 여섯 개의 눈을 번득였다.

    거북의 눈에서 여섯 줄기의 검은 빛줄기가 공간을 건너뛰고 날아들었다.

    파치치칙!

    이에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대량의 금색 뇌전을 방출해 두꺼운 장벽을 세웠다. 금색 뇌전 장벽이 분홍 안개와 검은 빛줄기를 막았다.

    쾅! 쾅!

    비록 시간을 벌기는 했어도 그들의 공격에 실린 법칙의 힘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나른한 힘과 냉기가 뇌전의 벽을 통과해 그의 몸을 공격했다.

    극한의 냉기는 어느 정도 저항을 할 수 있었지만 나른한 기운은 구름처럼 스며들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함께 기이한 향기를 느낀 한립은 온몸의 힘이 빠져 추락할 뻔했다.

    ‘안 돼.’

    흠칫 놀란 한립은 즉시 법칙의 힘에 사람을 미혹하는 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뜻밖이기는 했지만 한립은 허둥거리지 않고 금빛을 강하게 일으켜 등 뒤로 고리를 띄웠다.

    웅!

    강력한 시간법칙이 파도처럼 두 가지 법칙의 힘을 쓸어냈다.

    문제는 아직도 기이한 향이 남아 있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이, 잘했네! 고풍, 이놈! 죽어라!”

    까만 얼굴 노인은 한립에게 음산한 웃음을 흘리고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의 주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집채만 한 까만 거북 다섯 마리가 더 나타나 괴이한 눈을 번쩍 떴다.

    휘휘휘휙…….

    총 여섯 마리의 까만 거북이 36개의 눈으로 가느다란 검은 광선을 분출했다. 검은 광선의 매서움은 한립의 청죽봉운검과 비슷했다.

    동시에 까만 거북 등딱지에서 새까만 얼음 가시들이 솟구쳐 섬뜩한 소리를 내며 한립을 노렸다.

    붉은 치마 여인도 수결을 맺어 소매 속에서 분홍 검기를 날렸다. 하늘을 뒤덮고 들이닥친 공격들을 보고 수결을 맺은 한립은 입에서 은색 불구슬을 내뱉었다.

    쿠쿵!

    그때 은색 불구슬이 확 번져 은색 불바다를 이루고 그를 가려주었다.

    화르륵.

    불바다 속에서 정염불새가 날갯짓을 했다.

    은색 화염 속에서 검은 광선은 녹고 분홍 검 허상들은 비검으로 돌아가 어둑하게 빛을 잃었다.

    붉은 치마 부인이 서둘러 비검을 회수하려 했지만 정염불새는 맛좋은 벌레를 발견한 것처럼 부리로 콕 집어 삼켜버렸다.

    비검과의 의식연계가 끊긴 부인은 신음을 흘리며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누이!”

    까만 얼굴 노인이 놀라 도움을 주려는데 정염불새가 은빛 그림자로 변해 그를 향해 쇄도했다.

    작열하는 열기에 노인 주변의 검은 그림자들은 눈처럼 녹아 하얀 증기를 내뿜었다. 그 모습에 기겁한 까만 얼굴 노인은 뒤로 물러나면서 검은빛을 방출해 그리 크지 않은 영역을 만들었다.

    극한의 법칙의 힘이 검은 영역 안을 가득 채워 그 안의 모든 흐름이 얼어붙었고, 노인의 주위로 보물 8개가 날아올라 그를 보호했다.

    그러나 정염불새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날개를 활짝 펼쳐 십여 개의 은색 빛덩이를 날렸다.

    화악!

    은색 화염이 빛덩이들 속에서 분출되어 정염불새의 속도가 배로 빨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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