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화. 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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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공 금제가 없는 성안에는 날아다니는 이들이 많아 그들도 자연스럽게 섞여 이동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거대 저택 앞에 내려선 그들을 병사들 대신 장삼을 걸친 선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 맞이했다.
“소주께서 무사히 도착하시니 이 늙은이는 이제야 안심입니다.”
청삼 노인이 서둘러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기 노인도 그간 잘 지냈는가!”
석천공이 웃으며 수결을 맺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려 수사, 이쪽은 제 어머니를 모시던 기 노인이라 합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라 신뢰할 수 있지요. 기 노인, 예전에 말한 적 있는 려 수사일세.”
석천공이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기 수사.”
한립은 변신을 풀지 않고 기 노인을 향해 공수했다.
그의 눈빛이 언뜻 달라졌다. 기 노인은 수행을 숨기고 있었지만 이미 태을경에 이르러 있었고, 마기 속에 혼재된 선령력이 느껴졌다.
“려 수사, 소주를 모시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기 노인도 정성스럽게 공수를 했다.
“수고라니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에이, 려 수사가 남도 아니고 그럴 것 없어. 불필요한 예의를 차려봤자 서로 서먹하기만 하지. 려 형,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나 나누시죠.”
석천공이 그런 그들을 보고 기분 좋게 웃었다.
“13황자님!”
“전하, 이제야 돌아오셨습니까!”
“가신 일은 잘되셨는지요?”
기 노인의 안내를 받아 저택으로 들어가자 시종이며 시위들이 석천공에게 몰려들어 앞다투어 문안을 올렸다.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일일이 대답해주는 석천공은 전혀 황자의 거만함이 보이지 않았다.
“큼, 다들 그만하게. 먼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실 터이고 하셔야 할 일도 많으실 것이야.”
기 노인이 헛기침해 위엄있게 하인과 시위들을 쫓았다.
“하하, 불편하시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불편하긴요. 석 수사께서 환영을 받는 모습을 보니 감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석천공과 한립은 곧장 기 노인을 따라 대청으로 들어갔다.
“기 노인, 내가 성역을 떠나 있는 동안 임산성을 관리하느라 고생 많았네. 오는 길에 보니까 상호도 늘고 성안을 오가는 이들도 많아졌어.”
“과찬이십니다. 저야 그저 소주께서 가시기 전에 계획하신 대로 따랐을 뿐인 것을요. 오가는 이들이 늘었지만 그 안에 별별 인사들이 다 섞여 있어 골라내려 해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주께서 직접 관리하시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지요.”
석천공의 칭찬에 기 노인이 부끄럽다는 듯 답했다.
“억누를 수 없다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방법이지. 굳이 입가에 다가온 먹이를 삼키지 않으면 도리가 아니잖나?”
“예, 맞는 말씀이십니다.”
한립은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석천공이 싸움보다 상도(商道)에 훨씬 능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셋째 형님에게서는 소식이 있는가?”
석천공이 셋째 형님을 떠올리고 급히 물었다.
“3황자 전하께서 사람을 보냈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보름 내로 도착할 거라 합니다.”
기 노인이 소식을 전했다.
“누구를 보냈는지도 아는가?”
석천공의 눈이 반짝였다.
“그건 알려주시지 않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누구든 셋째 형님의 사람과 함께라면 훨씬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겠지. 그때까지 저는 상가의 일을 처리할 것이니 려 수사는 휴식을 취하시지요.”
“그러지요.”
석천공의 말에 한립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났다.
기 노인은 푸른 시녀 복장을 한 10대의 어린 소녀를 불러 그를 거처까지 안내하게 했다.
“소주, 려 수사라는 분은 믿을 만한 분입니까?”
그가 나가고 기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심해도 되네. 성역 사람은 아니지만 선역에서 사귄 벗으로, 서로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됐고 수차례 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일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태을 초기의 수행으로 소주를 지키기는 무리가 있을 테니 제가 호위를 몇 명 더 준비하겠습니다.”
“그건 되었네. 내 휘하의 고수가 적지 않지만 실력으로 려 수사와 맞먹을 자는 하나도 없어. 려 수사와 셋째 형님이 보내주신 사람이면 충분하네. 괜히 인원이 많아져 봐야 오히려 눈에만 띌 테고.”
석천공은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고, 기 노인은 미간을 좁혔지만 더는 권하지 않았다.
“이제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예.”
석천공이 화제를 돌리자 기 노인도 고개를 끄덕이고 업무 관련 보고를 시작했다.
한립은 시녀를 따라 정원이 딸린 고즈넉한 느낌의 별채로 걸어갔다.
“이곳이 선배님께서 머무실 곳입니다. 제가 바깥에 있을 것이니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어린 소녀가 얌전히 말했다. 한립은 별채의 환경이 퍽 만족스러웠다.
“이름이 무엇이냐?”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순간 흐릿하게 빛이 어렸다.
“연아라 합니다.”
청의 시녀는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약간 멍한 목소리로 답했다.
“13황자는 어떤 사람이지?”
“권력 다툼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오직 상업에만 관심이 있으신 분입니다. 일찍이 야양성을 떠나셨지요. 저희 같은 하인들에게도 아주 잘 대해 주셔서 임산성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좋아합니다…….”
한립은 그녀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하고 눈동자에 어린 빛을 거두었다.
“좋다, 가보도록 해라.”
“예.”
청의 시녀가 나가는 것을 보고 한립은 침음했다. 그녀가 말한 내용과 석천공의 이야기가 일치했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의식을 퍼트려 별채를 샅샅이 수색하고 진법 깃발들을 날려 푸른 보호막을 펼친 다음 안으로 들어가 가리를 잡았다.
화앗.
잠시 후, 침실에 앉아 가부좌를 튼 그의 몸에서 다섯 가지 빛이 발산되었다.
<수미감응편>으로 엮어낸 <대오행환세결>을 수련하면서 머릿속으로 연신술 5성을 운용하고 있었다.
보름이란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돌연 눈을 뜬 한립의 눈빛에 희색이 어렸다.
낯선 곳에서 언제 위험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겨우 보름의 수련만으로도 수확이 적지 않았다.
특히 세살지에서 이미 고비를 넘은 연신술 수련은 그렇게 순조로울 수가 없었다.
“이쯤인 듯한데.”
한립이 혼잣말을 하며 별채의 금제를 거두고 걸어 나오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급히 예를 올렸다.
“선배님, 13황자 대인께서 찾으십니다.”
“안내하거라.”
시녀를 따라가니 금방 이전에 가보았던 대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석천공, 기 노인 외에 세 사람이 더 있었다. 사내 둘과 여인 하나가 전부 태을경 수사였다.
그중 푸른 갑옷을 걸친 까만 얼굴의 노인은 수시로 눈알을 굴려 교활하다는 인상을 주었고, 좌측의 비대한 체구를 지닌 거한은 살덩이로 만든 작은 산 같았다.
마지막으로 30살쯤으로 보이는 여인은 꽤 고운 얼굴을 지녔고 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으나 머리에 화려한 꽃을 꽂고 있어 치장이 과해 보였다.
“려 수사, 이리로 앉으시지요.”
석천공이 웃으며 그를 맞이하자 한립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소개하지요. 이 세 사람은 본 성의 객경장로인 묵 수사, 노 수사, 화 수사입니다. 제 심복이라 할 수 있지요.”
석천공이 세 사람을 소개했다.
“저는 려비우라 합니다.”
한립이 공수를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한립은 3황자가 보낸 사람들이 언제 도착할지 묻고 싶었으나 심복이라는 세 사람을 보고 망설였다.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셋째 형은 시간 약속을 칼 같이 지키는 분이니 오늘 내로 반드시 올 겁니다.”
석천공이 한립의 마음을 읽고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제게는 중요한 사람들이니 서로 얼굴을 익히면 좋겠다 싶어 모셨습니다. 좋은 술도 준비해 두었고요, 하하.”
석천공은 자홍색 술단지를 가리키면서 웃음 지었다. 단지를 여니 기이한 향기가 퍼졌다.
“저희는 전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아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검은 얼굴 노인이 잔잔하게 웃음 지었다.
“맞습니다! 전하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 거절하지 않고 수행할 겁니다!”
살점 거한도 가슴을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하하, 13황자님께서 저희에게 너무 예의를 차리시네요.”
홍의 부인도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감사합니다.”
석천공은 기분이 무척 좋은지 술단지를 들어 모두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려 수사, 술에 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술도 꽤 독특한 재료를 써서 만든 것이라 마실만 할 거예요.”
“잘 마시겠습니다.”
석천공의 설명을 듣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간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확실히 향이 특이해서 이전에 선계에서 마셨던 것과는 달랐다.
정순한 마력이 담긴 술은 미약하지만 그의 구유마동의 자양분이 되어 줄 듯했다.
“좋은 술입니다.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홍심주(虹葚酒)라 합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빚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석천공이 대수롭지 않게 옥간을 하나 꺼내 건네주었고, 한립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내용을 확인했다.
재료가 2, 30가지 필요했는데, 마역의 재료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아도 홍심과(虹葚果)라는 것이 주재료인 것 같았다.
“홍심과의 산지가 어딘지 아십니까?”
“성역의 북극 지방에서 납니다. 왜요, 정말 홍심주를 빚으려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괜찮으시면 광원재를 통해 재료를 수집해 주시지요. 가격은 개의치 않으셔도 되고요.”
“알겠습니다. 홍심과는 구하기 쉽지 않아 시간이 약간 걸릴 겁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한립은 그저 연구해볼 요량이라 마음이 급하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셨습니까? 하하, 그렇다면 우리 둘은 쉽게 친해질 수 있겠습니다. 저도 술을 즐기니까요! 자, 한 잔 쭉 드시죠!”
살점 사내가 호탕하게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한립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에 한립도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손을 피하지 않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살점 사내의 성격이 워낙 호방하다 보니 갑작스러운 접촉이 의외는 아니었다. 아마 검은 얼굴의 노인이 손을 뻗어왔다면 무의식중에라도 피했을 것이다.
석천공이 함께한 덕인지 모두 긴장을 풀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술잔이 채워지고 비워질 때마다 분위기는 더욱 좋아졌고, 나중에는 서로 수련 상의 깨달음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전부 태을경에 이른 이들로 석천공의 수행이 조금 못 미쳤지만 살쇠를 거치고 태을경을 한 걸음 앞둔 상태라 도움이 되는 내용도 많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거의 반나절이 지나갔음에도 3황자가 보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립은 슬쩍 석천공의 기색을 살폈다.
그가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며 검은 얼굴 노인과 교역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립도 시선을 거두고 살점 사내와 수련 상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살점 사내가 익힌 공법은 <범성진마공>과 비슷한 바가 있어서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하늘이 차차 어두워져 가는데도 3황자의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셋째 형님이 약속을 어길 리 없습니다. 분명 사고가 있을 겁니다.”
석천공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한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는 도중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 노인도 인상을 찡그렸다.
“기 노인, 이 일을 셋째 형님께 알리고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게.”
“전하, 이전에 3황자님과 연락을 취했을 때 무슨 바쁜 일이 있으신 듯했습니다. 답변이 늦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렇단 말인가? 어찌 되었든 일단 물어봐 주게.”
“예.”
기 노인이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고 석천공은 의자에 기대앉아 심각하게 무언가를 고민했다.
이 모임의 주최자나 마찬가지인 석천공이 그러고 있자 한립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더는 떠들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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