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902화 (1,659/2,000)

1902화. 탄공술(呑空術)

*

성안을 내달리던 마차가 낯익은 작은 상점 앞에서 멈추었다.

거기서 한립과 같이 내린 석천공은 평범해 보이는 벽의 어느 벽돌을 꾹 눌렀다.

철컹.

안에서 기계음이 들리고 숨겨져 있던 문이 열렸다.

문 뒤쪽의 밀실은 엉망이었고 망가진 작은 진법 옆에 점원으로 보이는 청년이 죽어 있었다.

몸에 별다른 상처 없이 동공이 풀린 시체였다.

“혼백의 힘을 남김없이 빨아들여 죽였군요. 자청쌍매의 소행입니다.”

“이러면 서신도 남길 수 없겠습니다.”

“웅거성을 떠나면 어디로 향할 생각입니까?”

“임산성(稔山城)으로 갑시다. 웅거성보다 그곳에서 머문 세월이 길어 제게는 또 다른 집과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 또 다른 전송진이 준비되어 있고요.”

석천공이 심호흡을 하며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어째서 처음부터 그곳으로 가지 않은 것입니까?”

“그곳에 오래 머무른 만큼 그 사실을 아는 이들도 많습니다. 누군가 매복해 있을까 봐 꺼렸는데, 이제는 별수가 없습니다.”

“대황자가 소식을 듣고 웅거성으로 사람을 보냈으면 임산성은 아직 안전할 수도 있겠군요.”

“그래야 할 텐데요. 늦기 전에 출발합시다.”

두 사람은 밀실을 나와 웅거성을 빠져나왔다.

성벽을 지나자 석천공은 오신비사를 불러냈다.

* * *

진선계 모처의 산맥.

황금처럼 빛나는 암석들로 이루어진 산맥 위를 하얀 빛줄기가 놀라만 한 속도로 지나갔다.

평범한 태을경 수사를 넘어서는 속도였다.

둔광 속에는 거대한 하얀 짐승이 보였고 새하얀 옥돌을 조각한 것 같은 짐승의 머리에는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등에 열일고여덟 살로 보이는 금포를 입은 소녀가 앉아 금발을 어깨까지 늘어트리고 아름다운 얼굴로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녀의 품에는 어울리지 않게 사람 키만 한 금색 낫이 들려있었다. 금포 소녀와 하얀 거대 짐승은 한립과 헤어진 금동과 비휴였다.

둘 다 이전보다 기운이 강해져 금동은 태을경 중기, 비휴는 태을경 초기였다. 그들의 표정은 신중했고 비휴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온 힘을 다해 나는 중이었다.

그들 뒤 수십만 리 밖에서 붉은 구름이 태양을 가리면서 그들을 쫓고 있었다.

붉은 구름 속에는 말을 탄 병사들이 셀 수 없이 많았고 불꽃 모양이 새겨진 붉은 제단에는 새빨간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앉아있었다.

금관을 쓴 중년인의 장포에는 다섯 개의 발톱을 지닌 황금룡이 새겨져 있어 속세의 제왕이나 풍길 법한 위엄이 느껴졌다.

호랑이 같은 눈으로 노기등등하게 전방을 주시하던 그가 손을 저어 붉은 구름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더 빨리!”

그걸 본 금동이 초승달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금색 낫으로 비휴의 등을 탱! 하고 때렸다.

비휴가 아프다는 듯 울더니 몸 양쪽에서 거대한 하얀 날개를 펼쳤다.

비휴의 속도도 무척 빨랐지만 붉은 구름에 비해서는 느렸기에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붉은 구름 속 홍포 거한이 눈을 번득이고 수결을 맺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런데 그때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하늘에 있던 태양이 수십 배로 커져 인근의 온도가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화륵!

허공이 지글지글 끓고 주변 만 리의 산맥에 불이 붙어 나무는 재가 되고 황금 암석은 녹아내렸다.

“흰둥아!”

금동의 외침을 들은 비휴가 머리에서 ‘왕’ 자 문양을 빛내며 입을 벌렸다.

쿠콰콰쾅!

하얀 짐승의 입에서 나온 은빛이 전방 천리 허공을 부숴 뱃속으로 빨아들였다.

비휴의 배가 산달이 다가온 여인의 배처럼 부풀고 공간이 무너진 자리에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흡입력에 비휴가 쉭! 하고 하얀 환영으로 변해 열 배는 빠른 속도로 작열하는 태양의 범위에서 벗어나려 했다.

“멈춰라!”

극도로 분노한 홍포 거한이 수결을 맺은 손으로 다시 태양을 가리키자 태양의 하얀빛이 비휴과 금동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 엄청난 열기에 휩싸인 비휴는 움직임이 훨씬 느려졌다.

금동이 동공을 수축하며 한 발을 박차 전신에서 수많은 무형의 검기를 터트렸다.

이어서 그녀의 입에서 금빛 냉기가 빠져나와 주위의 하얀 열기와 충돌했다.

퍼퍼퍼펑!

금빛과 하얀빛이 충돌해 하늘의 색이 달라지고 있었다.

금빛 한기는 기운이 부족한지 부들부들 떨렸지만 비휴는 그 틈에 어렵게 하얀 열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괘씸한!”

홍포 거한이 수결을 바꾸었다. 하얀 태양이 더 커져 운석처럼 금동과 비휴를 향해 떨어졌다.

주변 허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기다랗게 균열이 나타나고 있었다. 비휴의 몸을 둘러싼 하얀빛이 거의 사라지고 날개도 사라져 풍등처럼 휘날렸다.

화아앗!

산맥으로 떨어질 듯하자 금동이 서늘한 눈으로 금빛을 방출해 등 뒤로 거대한 금색 인영을 불러냈다.

흐릿해서 모습이 잘 보이지는 않아도 거대한 낫 형태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금동이 든 금색 낫도 요란하게 빛나며 수많은 주술문자를 날렸다.

콰르릉!

주변의 천기영기들이 요동치며 하늘이 어두워지고, 천지영기들이 금색 낫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 금동 등 뒤의 허상이 금빛으로 변해 낫으로 스며들었다.

웅웅웅!

더없이 강력한 기운이 주변을 압도했다.

“가라!”

금동은 다가오는 태양을 직시하면서 양손으로 거대 낫을 쥐고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눈을 찌를 듯한 초승달 형태의 금빛이 낫을 빠져나가 하얀 태양과 충돌했다.

스스슷!

하얀 태양이 둘로 갈라져 금동과 비휴를 사이에 두고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에 뒤따르던 홍포 거한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두 번의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고 둘로 갈라진 태양이 떨어진 산맥은 하얀 화염에 둘러싸여 모든 것이 거품처럼 터져버렸다.

그 충격으로 폭풍에 휘말린 비휴는 방향을 틀면서 입에서 무언가를 뿜었다.

쉬이잉!

입에서 거대한 공간 폭풍이 빠져나오고 팽창했던 배가 잘록해진 비휴는 쏜살같이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그 속도는 아까 공간을 삼킬 때보다 더 빨랐다.

공간폭풍이 노한 파도처럼 그들을 쫓던 핏빛 구름을 덮쳤고 이에 홍포 거한은 난색을 표했다. 이때 금동과 비휴는 최선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비휴의 등에 탄 금동은 엄청난 공격을 해놓고 기운이 쇠해 금빛이 어두웠다.

가부좌를 튼 그녀는 금색 낫을 허벅지 위에 놓고 반짝이는 선기들을 하나씩 꺼내 씹어 삼켰다.

“누님, 이렇게 도망치기만 해서 되겠어요? 이러다 구원관(九元觀) 색명귀에게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주인님이랑 의식연계가 회복된 걸 보면 진선계로 돌아오신 것 같은데 연락을 취해서 도와달라고 해요, 우리.”

비휴가 열심히 도망치며 나불거렸다.

“아냐. 우리가 벌인 일은 우리가 책임을 져야지.”

눈을 동그랗게 뜬 금동이 하는 말에 비휴가 대놓고는 따지지 못하고 궁시렁거렸다.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아뇨, 어떻게 하면 저놈을 따돌릴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었어요.”

“우리가 어떻게 도망치는지 저놈도 알았으니 더 위험해질 거야. 흰둥이 넌 아저씨를 찾아가.”

“누님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빨리 태을경에 이르지 못했을 거예요. 당연히 탄공술(呑空術)도 익히지 못했을 거고요. 제가 겁이 많기는 해도 그런 누님을 두고 어딜 가겠어요?”

시선을 거둔 금동의 말에 비휴가 움찔하더니 진중하게 말했다. 금동이 놀랐다는 듯 비휴를 힐끗 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달아나요! 또 따라오고 있어요!”

비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는 두 날개를 펼쳐 하얀빛을 발산했다.

* * *

몇 달 후, 한립과 석천공은 하얀 흙으로 가득 찬 고원지대에 도착했다. 건조한 기운에 광풍이 불어 검은 모래바람이 가득한 땅이었다.

여기까지 오자 석천공은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고 한립도 한숨을 돌렸다.

두 사람은 웅거성을 떠나자마자 주변 지리에 익숙한 석천공의 말에 따라 여러 번 경로를 바꾸면서 이동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어떤 성의 전송진도 이용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추격자를 만나지 않았지만 석천공의 셋째 형님의 소식도 전해 들을 수 없었다.

원영기 미만의 수사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모래바람에 시야가 가려지고 커다란 암석들이 날아다녔지만 한립과 석천공에게는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검은 성이 있는 산봉우리 사이의 평지에 도착하자 포악한 바람이 그쳤다. 특수한 금제가 모래바람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이곳이 임산성이라고요? 마기도 진하지 않고 지리적인 여건도 좋지 않은데 어째서 이곳을 택해 성을 지은 것입니까?”

“제가 건설한 건 아닙니다. 사이족(沙坨族)이 머물던 땅인데 수만 년 전에 그들이 이주할 때 제가 땅을 샀지요. 그 후 고생 끝에 지금의 임산성을 이룬 겁니다. 환경이 좋지는 않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만한 천연의 장벽도 없지 않습니까?”

석천공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게 다가 아니겠지요. 수사가 내준 마역 지도를 보니 임산성은 여러 성이 통하는 경로에 있고 십환산맥과도 그리 멀지 않아 교역하기에 적합한 위치가 아닙니까.”

“하하, 저를 잘 파악하고 계십니다.”

“수사의 기반이 있는 곳이라지만 떠난 지 오래인데 그냥 들어갔다가 문제가 생기지는 않나요?”

“진작 성안의 심복에게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성안에 아직 아무 변고가 없다는 소식입니다.”

한립의 걱정에 석천공이 웃음 지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날아갔다.

높다란 두 산봉우리보다는 낮아도 그사이의 성도 규모가 상당했고, 선박과 배들이 수시로 날아다녔다.

육로를 통해 온 대형 마차들도 사방팔방에서 몰려들어 흑유성보다 훨씬 번화해 보였다.

석천공은 성을 눈앞에 두고 숨길 수 없는 흥분과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오신비사의 속도를 줄이고 임산성 인근으로 향했다.

“출입구 8개가 미어터지는군요. 드나드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요. 나중에 성문을 몇 개 더 만들어야겠습니다.”

석천공은 길게 늘어선 성문 앞을 보다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비행법기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임산성 주변에서 순찰하던 회색 갑옷 병사들이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정체를 밝히시지요!”

작은 부대의 대장이 외쳤다.

오신비사를 거둔 석천공은 대답하지 않고 마족 문자 두 개가 적힌 보라색 영패를 꺼내 보였다.

“성주부의 귀빈이셨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들어가시지요.”

보라색 영패를 본 순찰 대장은 공손히 예를 올리고 검은 영패를 꺼내 주문을 외웠다.

파앗.

영패에서 나온 빛이 성을 보호하는 검은 보호막에 넉넉한 입구를 만들어 주었다.

석천공은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립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