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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901화 (1,658/2,000)

1901화. 두 개의 혼백

*

“수사를 어찌 불러드리면 될까요?”

자의 여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목숨을 걸고 싸우기 마련인데, 선자를 앞에 두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립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주인께서 원하시는 것은 섬에 있는 분입니다. 수사와 같은 인재를 아끼시는 분이니 섬의 일을 모른 척 피하시면 청릉 언니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대로 당신께 주인의 선물을 전하지요.”

“이것 참 제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여인과 한립의 미소가 짙어졌다.

“괜찮으시면 저희를 따라 야양성으로 가셔서…….”

환하게 웃음 짓던 보랏빛 치마 여인이 말을 하다 말았다.

쿠쿠쿵.

멀리서 폭음이 들리고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 작은 섬에 화려한 빛이 어리고 산봉우리처럼 거대한 은색 부적문자가 떠올라 강렬한 공간파동을 일으켰다.

호수의 뽀얀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별채 사이의 대나무 숲이 요동쳤다.

굉음의 정체는 은색 주술문자에 둘러싸인 섬이 호수 속으로 가라앉는 소리였다.

안색이 달라진 자의 여인이 한립을 돌아보고 소리를 지르려는데 그 앞에 금색 고리가 나타났다.

금색 광채에 움직임이 느려진 그녀를 향해 한립의 미간에서 수정빛이 날아갔다. 투명한 수정사슬 몇 개가 검은 주술문자를 품고 뻗어 나가 여인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다음 순간 의식세계로 들어선 사슬이 보랏빛 혼백을 가두었다.

한립은 고공에 뜬 여인이 꼼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진언보륜을 거두었다.

은색 빛의 문이 열리고 화지 공간 안에서 석천공이 걸어 나왔다.

“자신의 여인들을 다 보내 저를 죽일 생각을 하고 큰형님도 독하신 분입니다. 려 형과 미리 상의하지 않았으면 저는 분명 자청쌍매(紫靑雙妹)의 손에 죽었을 거예요.”

석천공이 보랏빛 치마의 여인을 알아보고 가슴이 서늘해져 말했다.

“저들을 아십니까?”

“제가 혼백 한 줄기를 미끼로 섬에 남겨 놓고 수사가 직접 나서 둘을 갈라놓지 않았으면 저들을 쉽게 잡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서둘러 없애시죠.”

“혼백이 제게 구금된 상태니 반항하지 못할 겁니다. 직접 하시지요.”

고개를 끄덕인 한립의 말에 석천공이 나서려는데 이변이 발생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보랏빛 치마 여인의 입꼬리가 쓱 올라간 것이다.

이어서 푸른 혼백이 그녀의 어깨에서 튀어나와 표독스럽게 그들을 노려보고 몸속으로 뛰어들었다.

보랏빛 치마 여인의 몸에 푸른빛이 번져 검던 머리카락이 절반은 푸른색, 나머지 절반은 보라색으로 변했다.

두 눈동자도 괴이하게 보라색과 푸른색으로 변해있었다.

한립은 강력한 혼백 파동을 느끼고 의식 사슬로 상대의 반항을 막으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한 몸에 혼백이 두 개였구나!”

깜짝 놀란 한립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예전에 쌍둥이인 자청쌍매가 협공해 합체기 수행으로 대라경 수사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설마 일체쌍혼(一體雙魂)일 줄이야! 그럼 아까 섬과 함께 붕괴한 것은 누구란 말입니까?”

석천공도 크게 놀란 얼굴로 피했다.

“신외화신 같은 속임수를 쓴 것이겠지요. 두 혼백을 하나로 융합한 뒤에 대라경 수사에 상당하는 기운을 내뿜고 있습니다. 조심해야…….”

한립의 말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끊겼다.

마치 날카로운 창이 한립과 석천공의 의식을 꿰뚫은 듯 선령력 흐름이 무질서하게 변해 둘 다 추락하기 시작했다.

한립은 의식세계에서 전해지는 극통을 참으며 연신술 5성 공법을 운용해 무형의 힘으로 빛의 방패를 만들고 이상한 목소리의 습격을 막았다.

부지불식간에 당한 석천공은 그대로 수풀로 떨어져 기절했는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주인께서 네 놈에게 살길을 열어 주시려 했으나, 자화(紫禾)의 말을 듣지 않은 네 놈도 석천공과 함께 저승길로 보내주마!”

보랏빛 치마 여인의 목소리가 탁하게 변해있었다.

이번에는 청릉으로 불리는 언니가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정신을 차린 한립은 대답 대신 연신술을 극성으로 발동하며 청죽봉운검 18자루를 날려 보냈다.

자의 여인은 서늘하게 웃으며 입을 달싹였고, 그녀가 구결을 중얼거리는 동안 눈앞이 뿌옇게 변한 한립은 암흑세계에 빠진 듯 시야가 어둑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는 허공에 거대한 눈 두 개가 떠서 보라색과 푸른색 파동을 내뿜고 있는 것을 보았다.

파동에 휩싸인 그는 고통스럽기는커녕 따스한 봄바람을 맞는 듯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고 의식세계의 혼백 소인은 푸른빛과 보랏빛에 겹겹이 휩싸여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태을경 수사가 아닌 한립의 의지력과 의식의 힘은 자의 여인의 예상을 초월했다.

자꾸 고개를 저으며 통제에서 벗어나 의식을 찾으려는 그를 보고 자의 여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겨우 태을경 중기 수사가 그녀의 혼백 공격에 버틴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언니, 저자의 혼백을 잡아먹으면 한층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겠어요!”

온화한 목소리의 자화가 말했다.

“방심하지 마. 상대가 지닌 혼백의 힘은 태을옥선의 경지를 넘어섰으니까. 귀한 화신을 잃었는데 석천공의 머리를 갖고 돌아가지 못하면 주인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총애하신다고 해도 큰 벌을 내릴 거야.”

자의 여인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이자 청릉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언니 말대로 할게요.”

그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립은 공중에서 몸을 가누고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정신을 차리다니…….”

자화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한립은 혼백 공격에 당한 여파를 억누르고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서 자의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 청죽봉운검 18자루가 앞서고 있었다.

“근접전으로 승부를 보겠다? 헛꿈 꾸지 말거라.”

청릉이 소리쳤다.

그녀를 난도질하려던 청죽봉운검들은 열 장 앞에서 괴이한 힘에 붙들려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한립이 두 눈에 보랏빛을 일으켰다.

구유마동을 발동한 그의 눈에 청죽봉운검들이 머리카락처럼 얇은 의식 정사에 붙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자의 여인이 몸에서 발산된 수정 실들이 장검 한 자루 한 자루를 옭아매고 있었다.

‘의식을 실체화시키다니!’

놀란 한립이 청죽봉운검에서 금색 뇌전 형태로 뇌전법칙의 힘을 방출했다.

츠즈즛!

검을 휘감은 의식 정사들이 흩어지자 검들은 자의 여인을 향해 쇄도했다.

“가만두지 않겠다!”

자의 여인의 입에서 자매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리고 수결을 맺은 양손이 합쳐져 기괴한 모양을 이루었다.

“잘려라!”

반투명한 영역이 펼쳐져 청죽봉운검을 감싼 순간 한립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와 비검 사이의 의식연계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뇌전이 사라지고 청죽봉운검 18자루가 주인 없는 보물처럼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손을 움직여 또 다른 청죽봉운검 한 자루를 불러내 금빛 뇌전을 일으켰다.

‘의식으로 발동시키는 것만 아니면 비검의 신통이 유지되는구나.’

내심 안도한 한립은 연신술을 익히는데 시간을 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우리와 싸우면서 딴생각을 해?”

한립이 생각에 잠긴 것을 눈치채고 자화가 소리를 지르자 곧이어 유리 등잔 하나가 전방에서 떠올랐다.

흉악한 짐승 네 마리가 등을 맞대고 서서 두 손으로 연꽃무늬 등을 받치고 있는 고풍스러운 등잔이었다.

등잔에 기름이 없는데도 콩알만 한 녹색 불꽃이 타고 있었다.

불꽃을 쳐다본 순간 한립은 온몸이 굳었고 온 정신이 불길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의 의식세계에 등불 허상이 떠올라 네 마리의 짐승이 입을 벌렸다.

의식의 힘이 빠르게 유실되어 연기처럼 짐승들의 입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감지한 한립은 깜짝 놀랐다.

콩알만 하던 등잔의 녹색 불꽃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서혼정(噬魂灯)이 의식 속에서 타고 있으니 의식의 힘이 곧 흩어질 것이다. 저놈의 혼백을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문제니 일단 석천공을 죽여 주인의 명에 따르자.”

“그래요, 언니!”

자의 여인은 혼잣말을 하듯 대화를 주고받더니 석천공이 떨어진 곳으로 하강했다.

이때 아직도 바닥에 엎어진 석천공은 혼백 파동이 아주 미약했다.

자청쌍매는 보라색과 푸른색이 섞인 금속 밧줄을 뻗어 석천공의 머리를 갈겼다.

퍽!

석천공의 머리가 수박처럼 쪼개졌다. 자청쌍매의 얼굴 절반이 희희낙락하는데 반대쪽은 의문을 드러냈다.

“어째서 원영이 보이지 않지?”

청릉의 말을 들은 자화의 절반 얼굴도 웃음기가 가셨다.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땅속에서 두 줄기의 은색 빛기둥이 솟구쳤다.

은빛이 간결한 진법을 이루고 그 가운데에 고색창연한 은색 거울 두 개가 떠올랐다.

거울에서 물씬 새어 나온 공간 파동이 자청쌍매를 공중에 가두었을 때 머리가 터진 석천공 시체 아래서 누군가 기어 나왔다.

진짜 석천공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그는 아직도 눈빛이 맑지 못하고 서 있는 모양새도 엉성했다.

혼백에 중상을 입고 떨어지는 그를 몸에 지니고 있던 혼백 관련 보물이 깨운 것이다.

그는 곧장 반격하지 않고 아예 기절한 척 한 뒤 가짜 육체에 혼백 한 줄기를 남겨 두고 숨어 땅속에서 열심히 진법을 준비했다.

석천공은 힘껏 고개를 저으며 한립은 쳐다보지도 않고 수결을 맺었다.

은빛이 고공의 유리 등잔으로 날아갔다.

파삭!

주인이 은색 거울에 붙들린 등잔 법보는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와 동시에 한립의 의식세계에서 빛을 발하던 유리 등잔 허상도 사라졌다.

한립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해 쾅! 충돌하며 커다란 구멍을 남겼지만 금방 창백한 얼굴로 땀을 흘리며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왔다.

석천공과 그가 멀리서 시선을 마주치고 쓴웃음을 지었다.

“석 형, 그런 보물이 있었으면 진작 꺼내 썼으면 좋지 않습니까.”

“셋째 형님이 늘 지니고 다니는 은소쌍경이라는 보물입니다. 저를 돕기 위해 며칠 전에야 전송진법을 통해 행각재로 보내주었지요. 연화를 할 수 없어 진법의 힘을 빌려 겨우 발동시킨 겁니다.”

한립의 타박에 석천공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자청쌍매부터 처리하고 이야기하지요. 저들이 다시 빠져나왔다가는 우리 둘 다 죽은 목숨입니다.”

“석천공! 우릴 죽이면 주인께서 너의 혼백을 뽑아 갈기갈기 찢고 온몸을 으스러트려 죽일 것이다!”

자의 여인은 은색 금제 속에서 저주를 퍼부었다. 입술도 움직일 수 없어 의식 파동으로 허공을 진동해 내는 소리였다.

“큰형님의 노리개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그리 모른단 말입니까? 게다가 당신들을 죽이지 않는다고 석참풍이 날 놔줄 것 같습니까?”

차갑게 반문한 석천공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두 팔을 교차해 진법을 가리켰다.

진법의 거울이 위치를 바꾸더니 위로 향하던 은빛이 왜곡되어 그 안에 갇힌 자청쌍매가 진흙처럼 일그러져 사라졌다.

몸속에 숨어 있던 그녀의 원영들도 공간과 같이 허물어졌고 은색 빛기둥이 가시고는 푸른빛과 보랏빛이 흩어져 땅에 흥건히 피와 살점만이 남았다.

“이렇게 강한 혼백은 정말 드문데 말입니다. 혼백이 파편이 되었는데도 잔혼이 완전히 흩어지지 않다니요.”

한립은 혀를 차며 손바닥을 그러쥐어 잔혼을 모았다.

비검들을 불러들인 그는 수풀에 떨어진 유리 등잔을 가져와 잔혼을 불꽃 속에 털어 넣었다.

푸른 등잔의 주술문자가 밝게 빛나며 별빛들이 잔혼을 감쌌다. 기다려 보아도 불꽃이 다시 일지 않자 한립은 일단 그것을 넣어 두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석천공은 살점 더미 속에서 보라색 저물탁을 꺼내 들었다.

내용물을 바닥에 쏟아내니 마기로 발동해야 하는 법보와 혼백에 도움이 되는 단약과 재료가 꽤 들어있었다.

“려 형에게 법보들은 도움이 안 될 테고 단약이나 재료는 쓸 만하겠습니다.”

석천공이 내용물을 훑고 말했다.

“수사도 혼백 손상이 심하니 단약과 재료는 똑같이 나누고, 법보나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가시지요. 저 작은 책자는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한립은 얇은 푸른색 고서를 가리켰다.

서혼련원(噬魂練元)이라 적힌 고서를 보고 망설이던 석천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술인지 모르겠지만 려 형이 원한다면 챙겨 가시지요.”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필요한 물건을 나누고 단약을 복용한 뒤 그 자리에서 잠시 기운을 보충했다.

“이렇게 소란을 피웠는데도 내다보는 이가 하나 없군요.”

한립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큰형님의 세력이 크니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조용히 일을 처리했다면 천월후도 그냥 모른 척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되었느니 그도 어쩔 수 없이 누구의 편에 설지 선택하게 되겠지요.”

석천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웅거성에도 더는 머물 수 없다는 말씀이군요.”

“휴식을 취하는 대로 바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3황자 쪽의 원병은…….”

“하아,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서신을 남기고 떠나야겠죠.”

석천공이 한숨을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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