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화. 적린공경(積鱗空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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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담을 나누다 석천공이 돌아가고 한립은 별원의 금제를 다시 펼치고 2층으로 올라가 따로 금제를 펼쳤다.
은색 빛의 문을 열고 화지공간 안으로 들어서자 죽루 2층 마광이 머물던 곳에 붉은 옷을 입은 소녀, 제혼이 누워있었다.
그녀의 몸 위에 자양난옥들이 떠서 부드러운 파동을 발산했다.
한립은 하품 자양난옥들을 중품 자양난옥으로 교체를 했지만 그래도 제혼의 본원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은 막을 수는 없었다.
아직 상품 자양난옥 2개가 남아 있지만 자양난옥으로는 제혼을 깨울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한 수사,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이때 해 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이 1층으로 내려가 보니 해 도인이 안으로 들어와 탁자에 앉아있었다. 그가 마주 앉았는데도 해 도인은 머뭇거리는 얼굴로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해 수사, 왜 그러십니까?”
“최근에 머릿속에 늘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전주인께서 남긴 유언과 연관이 있는 듯하고요.”
“어떤 말입니까?”
“적린공경(積鱗空境).”
“적린공경…….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립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수시로 떠오를 뿐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전혀 모르겠어요.”
“어떤 비경 비슷한 곳을 부르는 이름 같은데, 적린공경이 이전 주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어찌 안 것입니까?”
“마역에 들어온 뒤로 머릿속에 옛 주인에 대한 기억이 떠돕니다. 아무래도……. 옛 주인도 마역 출신이었던 것 아닌가 싶어요. 적린공경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수사의 옛 주인이 마족이란 소립니까?”
한립은 놀라면서도 그렇구나 싶었다.
그가 처음 해 도인을 만난 것도 하계 마역의 마원해가 아니었던가.
“적린공경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더 떠오르는 기억이 있으면 수시로 알려주시고요. 옛 주인의 심원을 이루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말을 지킬 겁니다.”
한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해 도인은 곧장 죽루를 떠났다. 혼자 죽루 안에 앉은 한립은 마음이 복잡했다.
진언문 유적을 나선 이후로 늘 혼란스러운 상황과 마주해서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앉아 수련하는 것도 사치였다.
세살지의 기연으로 연신술 5성의 고비를 넘겼는데도 아직 5성을 대성하지 못한 것만 봐도 그랬다.
진언문의 시간공법 5가지 중 진언화륜경을 익힌 것 외에 다른 네 개의 공법들은 깊이 있게 연구할 틈도 없었다.
북한선역에서 <진언화륜경>과 <환진보전>, <수연사시결>이 연관되어 있다고 여겼는데 후에 <동을고영경>과 <단시류화집>을 얻고는 확신이 생겼다.
다섯 가지 시간공법은 분명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잠시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면 나머지 공법들을 수련해 보는 것이 좋겠군.”
눈을 감은 한립은 몸의 기운을 정돈했다.
잠시 후, 그의 머릿속에 열환선존이 남긴 <단시류화집>의 공법이 떠올랐다.
9성으로 이루어진 공법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심오한 시간법칙의 힘을 담고 있었다.
환진보전처럼 ‘환진사경’과 비슷한 ‘단시화경(斷時火鏡)’을 완성하면 시간정지를 일으킬 수 있었다.
시간정지는 말 그대로 절대적인 시간의 정체로 범위에 한계가 있어 더 높은 경지에 이를수록 더 방대한 범위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바로 수련을 시작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동을고영경> 구결이 금빛의 작은 글자로 떠올랐다.
자세히 살펴보니 시간법칙의 힘을 수련하는 내용이기는 해도 적을 공격하는 방법은 아니고 동을신목(東乙神木)을 만들어내는 법에 가까웠다.
동을신목을 심으면 일정 범위 내의 사계절과 초목의 성쇠를 통제하고 초목을 근간으로 자라난 요물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정염불새가 있어 초목 출신의 요물들을 상대하는 데 충분한 한립은 앞부분에 관심이 갔다.
일정 범위 내의 사계절을 다스린다는 것은 잘만 이용하면 초목들을 더욱 빨리 성장하게도 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그렇다면 약재밭에 동을신목을 심어 영약들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병의 녹액보다 효과가 좋지 않아도 그 범위는 훨씬 클 것이다.
공법을 살피던 중 한립은 환진보전에서 이해가 가지 않던 부분을 떠올렸다.
과거에는 공법에 쓰인 수련법으로만 연구했지만 단시류화집을 읽다 보니 여기 적힌 방법으로 환진사(幻辰沙)를 응결해 봐도 좋을 듯했다.
몇 시진 후, 눈을 뜬 한립의 얼굴에 희색이 어렸다.
이 다섯 가지 시간공법은 각각 오행의 속성을 지녀서 하나로 결합하면 소위 남들이 말하던 <대오행환세결>을 이루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한립은 다섯 공법의 연관 관계가 더욱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는 다섯 공법이 하나같이 익히기 어렵고 깊이 들어갈수록 머리가 굳어버려 더는 알기 어려웠다.
‘됐다, 일단 <단시류화집>과 <동을 고영경>부터 익히다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겠지…….’
계획을 세운 한립은 더는 주저하지 않고 단약을 하나 꺼내 삼킨 다음 <단시류화집>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로 잔잔하게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3달 뒤, 화지공간의 한립은 진작 수련을 마치고 죽루를 나섰다.
연꽃 연못의 왕성한 천지영기가 주변에 가득 차서 더없이 상쾌했다. 한립은 난간에 기대 연못의 연꽃을 보면서 넋을 잃었다.
3달 동안 <단시류화집>과 <동을고영경>을 익히려 했지만 <수연사시결>과 달리 한 걸음을 떼기도 어려웠다.
시간법칙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다섯 가지 공법이 서로 모순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 체내의 선령력 흐름이 <단시류화집>, <환진보전>과 호응할 때는 <수연사시결>과 충돌하고 <진언화륜경>, <수연사실결>과 어우러질 때는 <동을고영경>과 충돌했다.
한립은 퍽 답답했지만 정 안 되면 다섯 공법을 따로따로 익히면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진언화륜경>만이라도 대성할 수 있다면 다른 길이 생길 것이다.
그때 갑자기 <진언화륜경> 9성 공법이 적힌 청옥 죽간에 이상하게 <수미감응편>이라는 내용이 덧붙어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지, 내가 그걸 까먹고 있었다니!”
한립은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청옥죽간을 꺼내자 그 위에 금전문으로 적힌 작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나날이 도를 익히고, 천지간의 인연과 법도를 익힌다.’
손끝으로 그 글자들을 훑은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죽루로 돌아갔다.
* * *
폐관을 한 채 또 몇 개월이 지나갔다.
그간 석천공이 한 번 찾아왔다가 그가 폐관 수련 중인 것을 알고 돌아갔다. 가기 전, 해 도인에게 출관하자마자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그 후, 드디어 죽루의 문이 열리고 한립이 상쾌한 얼굴로 걸어 나와 기지개를 켰다.
겨우 수천 글자밖에 안 되는 <수미감응편> 때문에 몇 달 동안 애를 먹었지만 결국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수미감응편을 시간공법과 연관된 공법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수련용이 아닌 진언환륜경을 포함한 다섯 가지 공법의 수련 순서를 서술하는 내용이었다.
시간법칙은 선계 삼대 지존법칙인 만큼 그 뜻도 깊었다.
만물에 때가 있듯 시간 역시 만물과 공생 혹은 공멸해 그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 오행 법칙의 각도에서 시간법칙을 익히는 것이 그 대도를 이해하는 첫걸음이었고, 진정한 <대오행환세결>이었다.
대라노조가 이렇게 공을 들어 대오행환세결을 분리해 두지 않았으면 진언문의 경전은 세상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한립은 두 달 넘게 수미감응편에 기술된 대로 새롭게 다섯 공법을 배치해서 <대오행환세결>의 9성 공법을 이루었다.
세부적으로 다듬을 구석이 있기는 해도 그럭저럭 완성된 셈이었다.
한립은 이미 그중 몇 개의 공법을 익히고 있었기에 <대오행환세결>의 3성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진언보륜, 광음정병, 환진사, 단시류화 그리고 동을신목을 완성하면 바로 6성에 이를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확실히 태을경 중기에 이를 것이다.
수련에 제대로 매진하려면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런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은색빛의 문을 빠져나오자 해 도인이 청소원 누각 안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려 수사, 며칠 전 석 수사가 와서 출관하는 대로 뵙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갔습니다.”
“그 간 옛 주인에 대해 떠오른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저 적린공경이라는 네 글자만 머릿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더군요.”
한립이 그동안 거처를 지키느라 수고했다 인사를 하자 해 도인은 빛의 문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화지 동천을 닫고 누각을 나와서 대나무 숲이 자란 길을 따라 유하원으로 걸었다.
유하원은 호수 가운데 섬에 있는 별채로 주위에 연잎들이 가득 피어있었다. 그가 호수를 가로질러 난 다리에 이르렀을 땐 석천공이 미리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언제 오시나 했습니다.”
“석 형, 섬 전체를 빌리신 겁니까? 제가 다리에 도착하자마자 알아채시고요.”
“감응진법은 섬에만 펼쳐져 있는데 호수에 관란어(觀瀾魚) 몇십 마리를 풀어놓은 덕에 그들이 분출하는 파동으로 수사가 온 것을 알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석천공의 주도면밀한 준비에 한립이 섬을 관찰하며 물었다. 여러 진법에 새와 벌레들이 쫓겨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며칠 전 행각재를 통해 셋째 형님의 서신을 받았습니다.”
“뭐라고 적혀 있던가요?”
“좋은 소식도 있고 나쁜 소식도 있었습니다. 좋은 소식은 형님이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큰형님도 우리의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입니다.”
“흑유대왕이 거짓 정보를 흘려 5, 6개월 시간을 끌어줄 거라 했으니 그럴 때도 되었지요. 수사의 큰 형님이 우리의 행적을 알았다면 원군이 먼저 도착할지 아니면 살수들이 먼저 도착할지가 관건이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기다린 겁니다.”
“운산요 객잔의 규모를 볼 때 배후세력이 있을 테지요? 우리는 손님이니 그들의 비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작심하고 오는 자들이라면 운산도 막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이곳을 떠나면 괜히 더 고생이고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니 그냥 머무시지요.”
“만일을 위해 우리도 몇 가지 준비를 하기는 해야겠습니다.”
“어디 무엇인지 자세히 들어볼까요?”
마주 앉아 해가 저물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한립은 청소원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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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름 남짓한 시간이 지나갔다.
깊은 밤 청소원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한립이 눈썹을 꿈틀하고 몸을 날려 대나무 숲 위에서 호수의 섬을 응시했다.
이때 푸른빛과 보랏빛이 접근하다 섬 인근에서 둘로 갈라져 푸른빛은 섬으로 보랏빛은 한립에게로 날아들었다.
속이 비칠 듯 말 듯한 보랏빛 치마를 입은 절색의 여인은 선녀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한립 앞에 이른 여인은 눈빛 속의 혐오감을 감추고 겉으로만 웃음을 흘렸다.
한립처럼 통찰력이 뛰어난 이가 아니면 알아채지 못했을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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