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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99화 (1,656/2,000)

1899화. 문

*

반나절 후.

한립은 줄곧 춘수전에 앉아있었다.

그동안 아무도 말을 걸거나 하지 않고 궁녀 복장을 한 아름다운 시녀들만이 그의 찻잔을 채워주었다.

겉모습은 평안했으나 속으로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의 인내심이 점차 한계에 이르려는데 석천공과 흑유대왕이 화담을 나누면서 걸어 들어왔다.

“육수궁에서 지내는 동안 주인으로서 귀한 손님에게 할 도리를 다할 것이네. 웅거성으로 돌아가는 일도 걱정하지 말고 있게.”

“감사합니다, 흑유 선배님.”

이렇게 한립과 석천공은 흑유대왕의 안배에 잠시 육수궁의 어느 편전에서 머물게 되었다.

* * *

한립은 흑유대왕을 만난 뒤 그간 일어난 일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으나 먼저 묻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갑자기 태을경에 이른 것이 마수요왕의 주의를 끌었나 생각했는데 그들이 노리는 것은 석천공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흑유대왕이 석천공을 대우하는 것은 그의 신분과 관련이 있었기에 석천공이 설명해줄 생각이 없다면 그도 함부로 캐묻기 어려웠다.

십환산맥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석천공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사흘 후, 한립과 석천공은 흑유성과 웅거성을 잇는 은밀한 교역 통로를 통해 웅거성으로 출발했다.

* * *

몇 달이 지나, 마역 남방의 기다랗게 펼쳐진 가파른 산맥.

산맥은 십환산맥과 봉광평원(封廣平原) 사이를 막고 있었고 그 중간의 비교적 낮은 산봉우리 위에 거대한 성벽이 건설되어 있었다.

복잡한 주술문양이 새겨진 벽돌을 쌓아 만든 성벽은 옅은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거대한 편액에 적힌 ‘웅거성’이라는 세 글자는 똑똑히 보였다.

편액 아래 거대한 둥근 문이 있고 그 양옆으로 작은 쪽문 2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중간의 거대한 문과 왼쪽의 쪽문은 닫혀 있는데 오른쪽 문만 열려있고 그 양쪽에 새까만 갑옷을 입은 갑옷 병사들이 서 있었다.

지나다니는 이가 드물어 적막한 가운데 성벽 멀리 잡초가 우거진 땅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다가왔다.

푸른 갑옷을 걸친 사람은 새까만 피부에 우람한 피부를 지니고 이마 중간에 검은 뿔이 자라나 있었고, 인족과 비슷한 체구를 지닌 나머지 한 사람은 두 뺨에 금색 비늘이 자라나 마족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석 형, 흑유대왕의 상인들과 같이 들어가지 않고 중간에 갈라져 따로 웅거성으로 들어가는 이유가 있습니까?”

두 뺨에 금색 비늘이 자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웅거성과 흑유대왕의 거래는 암암리에 이루어집니다. 우리처럼 특수한 신분을 지닌 이들이 그 무리에 끼어들면 일이 복잡해지겠지요.”

덩치 큰 사내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십환산맥에서 온 한립과 석천공이었다.

“통첩(通牒)을 보여주시지요.”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성문에 이르자 늑대를 닮은 마족 병사가 손을 뻗었다. 석천공은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 크기의 검은 옥패 두 개를 꺼내 주었다.

“유산백부(幽山伯府)에서 발행된 통첩이군요. 웅거성과는 아주 먼 곳인데 어째서 이리 먼 곳까지 온 것입니까?”

“대인의 심부름을 하는데 멀고 가깝고가 어디 있습니까?”

마족 병사의 질문에 석천공이 싹싹한 미소를 띠고 답했다.

“통첩은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시죠.”

“고맙습니다.”

안으로 들어간 석천공은 옥패 하나를 한립에게 주었다.

“앞으로 쓸 일이 많을 테니 각자 하나씩 지니고 있지요.”

“통첩에 쓰인 유산백부는 무엇입니까?”

“성역은 선계와는 달리 각 지역의 세력이 따로 있지만 대체로 제 부친께서 성역의 주인이시고 그 아래로 왕, 공, 후, 백의 작위가 내려집니다. 유산백도 그중 하나이고요.”

“그럼 마주의 아들인 수사는 왕급의 작위를 받았겠군요?”

“성역 안에서는 혈통도 중요하지만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왕의 봉호를 받으려면 수행이 적어도 대라경에는 이르러야 하고 어느 정도 배후 세력이 갖춰져야 하지요. 저는 봉토(封土)도 없고 봉호도 없는 처지라 광원재 자원 밖에는 이용하지 못합니다.”

“그랬군요.”

쓴웃음을 짓는 석천공을 보고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의 두꺼움은 상상을 초월해서 성안으로 통하는 동굴이 백 장은 되었다.

성문의 동굴을 벗어나자 빛이 들어오면서 눈앞이 밝아졌지만 한립은 불편한 느낌에 얼굴을 찡그렸다.

웅거성 안은 마기가 바깥보다 몇 배는 짙었다.

북쪽으로 오는 내내 점점 마기가 짙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다.

“웅거성을 지을 당시 성역의 진법종사를 초청해 천지마기를 모을 수 있게 설계를 하였습니다. 성을 떠나 더 북쪽으로 가면 이렇게 마기가 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웅거성에 비하면 확실히 십환산맥은 마기가 희박한 만황구역이 맞군요.”

“많이 불편하시면 제게 쇄기단(鎖氣丹)이 있습니다. 복부에 머물러 마기를 흡수하는 걸 막아줄 거예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석천공의 물음에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제 태을경에 이르셨으니 마기의 영향을 훨씬 덜 받기는 하겠습니다.”

드넓은 광장을 지나 돌판이 깔린 대로 양쪽으로 빼곡하게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성 중앙으로 갈수록 더 높은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웅거성의 건축양식은 독특한 면이 있어서 선계에서 널리 쓰이는 산봉우리 모양의 지붕 대신 둥근 지붕과 뾰족한 첨탑 지붕이 많았고 벽과 처마에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도 많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각종 기이한 외형을 지닌 짐승 조각들과 틈틈이 보이는 날개 달린 여인 조각상이었다.

성문 근처의 상점들은 한산한 것과 달리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행인들이 많아졌다.

“성주부에 가까워지는 듯합니다. 바로 전송진을 이용할 생각입니까?”

“급할 것 없으니 웅거성 안의 광원재 분점으로 먼저 가시지요.”

석천공의 대답에 한립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요수들이 갇힌 우리로 가서 요수 마차와 마부를 고용해 대로를 내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나무들이 어우러진 높다란 건물들이 보였다.

“저곳이 성주부인지요?”

“그렇습니다. 천월후가 현재 성주를 맡고 있고요.”

“천월후요?”

“보통 성주는 강용백, 청린백처럼 백작급인 경우가 많습니다만 남쪽 만황을 지켜 십환산맥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 웅거성의 경우에는 그 책무가 막중해서 후작이 상주하지요.”

“그렇군요.”

마차는 왕주부를 돌아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으리으리한 대로 양쪽으로 높게 편액을 달은 웅장한 상가들이 법보나 단약 등을 팔고 있었고 이제 마차들도 속도를 늦추어 양쪽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마부는 이런저런 상점을 추천해 주려다가 덩치 큰 손님이 웅거성에 대해 꿰고 있는 것을 보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석 형, 어떻게 웅거성에 대해 이리 잘 아십니까?”

“광원재에 들어가 장사를 배울 때 웅거성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십환산맥의 상황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던 것이고요.”

석천공은 전음으로 대답했다.

“이곳이 석 형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군요.”

“하하,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7층 누각 앞에 이르렀다.

화려한 조각과 문양으로 치장된 누각에는 광원재라 크게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한립은 목적지에 이른 것을 알고 석천공을 바라보았는데, 상대는 마부를 시켜 광원재 대문을 그냥 지나치게 했다.

“안 들어가십니까?”

한립은 전음으로 물었다.

“그게…….”

“석 형과 함께 야양성으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돌아가는 길이 하나는 아닙니다. 제게 숨기는 것이 있다면 차라리 따로 가는 것이 났겠습니다.”

“사정이 있습니다. 제가 조금 있다 설명할 수 있게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두 사람은 침묵하며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다.

석천공은 마차를 세우고 한립을 안에서 기다리게 한 뒤 홀로 내려 어느 작은 상점으로 들어갔다.

이렇다 할 깃발이나 편액도 없이 누런 천에 행각재(行脚齋)라고 적힌 곳이었다.

얼마 뒤 다시 마차에 이른 석천공은 마부에게 동쪽으로 길을 틀게 해 운산요(雲山繞)라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성 동쪽의 후미진 곳에 있었으나 주위에 고목이 가득하고 객잔의 양식도 고풍스러웠다. 비용을 치르고 마차를 돌려보낸 석천공은 객잔의 칠이 벗겨진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간 한립은 공간 파동을 느끼고 눈앞의 풍경이 확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개울물이 졸졸 흘러 하얀 김이 올라오는 호수로 접어드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었다.

“요기를 하려 하십니까, 아니면 묵어가려 하십니까?”

인족과 똑같이 생긴 예쁘장한 여인이 왼쪽 정당에서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유하원(幽荷院)과 소류원(梳柳院)은 비어있는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유하원은 비어있는데 소류원은 다른 분이 오랫동안 머물고 계십니다. 괜찮으시면 청소원(靑蕭院)도 비어있는데, 그곳도 머물기 나쁘지 않으실 겁니다.”

“아, 청소원을 잊고 있었군. 그럼 그곳으로 주게.”

석천공은 안내를 해준다는 시녀를 물리고 직접 한립을 데리고 오솔길을 지나 별원으로 접어들었다.

진법이 펼쳐져 외부와 차단된 곳이었다.

2층으로 된 청소원에 도착한 한립은 운산요 객잔에서 내준 영패로 금제를 풀고 석천공과 같이 들어갔다.

한 층에 접객할 수 있는 공간 하나와 두 개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석 형, 이제 설명을 해주시지요.”

한립은 1층의 탁자에 앉아 방음 결계를 따로 치고 말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금서대왕이 우리를 죽이려 한 것부터 시작해 보시지요. 처음에는 제가 태을경에 이르며 나타난 천기현상 때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아니더군요.”

“휴, 려 형의 추측대로입니다. 금서대왕의 목표는 접니다. 큰 형의 지시를 받아 우리를 죽이려 했던 것이에요.”

“큰형이라면 마주의 장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자가 어때서 수사를…….”

“성족의 전승과 관련된 일이라 상세하게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큰형은 제가 지위를 전승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금서와 손을 잡고 싹을 뽑으려 했겠지요.”

“형제를 죽이려 했단 말입니까?”

“속세의 황실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흔한 일이지요. 게다가 저와 큰 형은 아버지만 같고 어머니가 다르니까요.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닌데, 이전에는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겨우 금선인 제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을 테니까요.”

자조적으로 웃은 석청공이 답했다.

“뭔가 수사의 존재가 위협될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겠군요.”

“아마……. 제가 라타비파를 가지고 돌아가면 큰 공을 세우게 되고, 아버지께서 막대한 자원을 들여 저를 회계에서 구출해 주셔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제 느낌에는 후자의 비중이 클 거라 생각됩니다.”

“그럴 지도요. 자식들이 위기에 처해도 아버지가 직접 나서주신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아마 그 일로 아버지가 저를 아낀다고 오해해 경계하는 듯싶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대황자 뿐은 아니겠고요. 우리가 성안에서 사고를 쳤음에도 흑유대왕이 웅거성까지 호송해준 것도 수사를 눈여겨본 탓이 아닙니까?”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려 형의 눈은 못 속이겠습니다. 확실히 흑유대왕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멈칫하던 석천공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황자가 살심을 품었으니 금서를 회수하는 것으로 그칠 리 없습니다. 웅거성까지 와서 바로 전송진을 이용해 야양성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곳으로 가야 가장 안전할 텐데요. 혹시 성주인 천월후를 신뢰할 수 없어서입니까?”

“제가 웅거성에 있을 때 성주는 천월후가 아니었습니다. 광원재를 지나치며 확인하니 숨겨놓은 표식이 사라져 제가 심어둔 심복들이 교체된 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런데 어떻게 성주를 믿겠습니까?”

“그럼 바로 성을 떠나야지 이곳에는 왜 온 겁니까?”

“큰형님이 흑유대왕에게 연락을 취해 우리를 죽여달라고 했지만 흑유는 우리를 탈출시키고 거짓 정보를 흘렸습니다. 큰형님이 우리가 아직도 십환산맥에서 달아나는 중인 줄 안다면 웅거성은 잠시 안전하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곳에 머문다는 것은 기다리는 원병이 있다는 뜻이겠군요. 아까 들른 상점에서 소식을 전달했고요.”

한립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석천공을 살폈다.

“셋째 형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도와줄 사람이 오기 전까지 운산요 객잔에서 잠시 쉬고 있으면 됩니다.”

“수사의 셋째 형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큰 형과 달리 같은 어머니를 둔 친형제로 과거에 제가 셋째 형님의 목숨을 구해준 일도 있습니다. 셋째 형까지 믿지 못하면 성역 안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믿을 만한 분이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런 일들을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마땅히 이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니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와 려 형이 함께 지낸 시간도 있고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역경을 거치지 않았습니까. 한배를 탄 처지니 저는 수사를 믿고 있습니다.”

석천공은 의자에서 일어나 한립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석 형, 제 마음을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형제들 간의 다툼에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야양성까지 돌아가기 전까지는 생사를 함께해야 하니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어떤 일도 제게 숨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립도 자리에서 일어나 진지하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더는 숨기는 일도 없을 겁니다. 야양성에 도착하면 이전에 약속드린 일들도 반드시 지킬 것이고요.”

석천공은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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