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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98화 (1,655/2,000)
  • 1898화. 돌파

    *

    백포 청년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막 입을 열려 할 때 왜소한 중년인 병사가 옆으로 와서 뭐라고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어느새 백포 청년은 한립과 석천공 앞에 나타났다.

    그의 몸에서 핏빛이 안개처럼 흘러나와 진한 구름을 이루고 하늘의 태양을 가릴 기세였다. 간담이 서늘한 기운은 분명 법칙 파동이었는데 무슨 법칙인지 알 수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한립과 시선을 마주친 석천공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는 흑유성의 규칙에 따르기 위해 더 늦기 전에 성을 떠날 생각입니다.”

    “우리 십환산맥 사람은 아닌 듯하니 저희도 성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따지지는 않겠습니다. 허나 흑랑에게 얻은 자양난옥은 돌려주셔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우연히 가게를 지나다 물건을 고르던 중이었을 뿐 아직 어떤 물건도 사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저들을 죽였으니까요.”

    백포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석천공은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렇다면 두 분이 지닌 저물법기를 전부 조사해야겠습니다. 자양난옥이 없다는 것만 확인되면 그냥 보내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말을 못 들으셨습니까? 흑유군은 원래 이리 방자하단 말입니까?”

    백포 청년의 목소리가 가라앉고 석천공도 노기를 드러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흑유군 수사들이 다시 그들을 포위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요. 자유 거래를 장려한다는 흑유성에 직접 와보니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때 한립이 냉소를 흘리며 끼어들었다.

    “뭐라는 것입니까! 감히 아버지를 멸시하기라도 하는 겁니까!”

    백포 청년이 안색이 확 달라져 소리를 높였다.

    “귀하의 부친께서 십환산맥에 흑유성을 세우고 오랜 세월 공들여 통치해 명성을 얻었는데 그 명성을 오늘 흑유군이 망치고 있으니 어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흥, 오늘 일은 당신들이 도난당한 자양난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면 사과드리지요.”

    서늘하게 말을 마친 청년은 두 사람을 향해 핏빛 안개를 날려 보냈다.

    핏빛 안개들이 출렁거리며 대량의 핏물을 이루고 한립과 석천공을 잠식하려 했다.

    그걸 본 한립은 입을 벌렸고, 금빛이 번쩍하는 순간 백포 청년 앞에 이르렀다.

    그 속도에 놀란 백포 청년은 핏빛 한 줄기를 소매에서 뿜어 믿기지 않는 속도로 금빛을 감았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핏빛 천은 딱 보기에도 비범한 보물인 듯했다. 하지만 그때 흐릿해진 금빛이 12자루의 작은 검으로 분리되어 미세한 뇌전들을 방출했다.

    그 모습에 백포 청년의 표정이 달라져 뭐라고 하려 했지만 12자루 금색 비검들이 동시에 뇌전 속성의 법칙의 힘을 파도처럼 터트렸다.

    파치칙!

    핏빛 천이 갈라져 천 조각으로 변하고 12자루 검들이 번개처럼 지척의 청년을 향해 쇄도했다.

    “려 형, 그자를 죽이면 안 됩니다!”

    석천공이 소리쳤다.

    “악!”

    당황한 백포 청년은 핏물을 거둬들여 몸에 두르고 다른 보물을 불러내려 했다. 그러나 청죽봉운검들이 핏물을 너무 가볍게 뚫어 보물을 꺼낼 기회도 없었다.

    사지에 구멍이 뚫려 피를 쏟은 백포 청년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립은 겁에 질린 백포 청년은 쳐다보지도 않고 전광석화처럼 몸을 돌려 손가락을 튕겼다.

    푸른 검이 그의 소매를 빠져나가 전방의 허공을 갈랐다.

    챙!

    한립을 노리고 떨어지던 금색 검빛이 소리 없이 나타나 푸른 검빛을 가로막았다.

    두 검빛은 대등하게 겨루며 허공에 멈추었고 그 뒤로 청의 여인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나타났다.

    “검은 쓸 만하다만 네 수행이 아직 부족하구나.”

    한립은 코웃음을 쳤고 청의 여인은 갑자기 의식세계에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불로 달군 못이 머리에 박힌 듯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그때 손가락 하나가 흐릿하게 그녀의 미간을 가리키자 금빛 뇌전이 날아들었다.

    치칙!

    “끅!”

    청의 여인은 벼락 맞은 나무처럼 전신이 새까맣게 타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자 그녀의 금색 보검이 바닥에 떨어져 황금색 검신을 드러냈다.

    주변의 흑유군들은 한립이 그들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에 한립은 코웃음을 쳤고 흑유군들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쉬쉬쉬쉭!

    한립의 손에서 날아간 금빛 뇌전들이 정확히 흑유군 한 명 한 명 위로 떨어져 모두가 새까맣게 타서 쓰러졌다.

    연달아 경신자를 써 의식의 힘을 소모한 한립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고르고 있는 백포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

    백포 청년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입을 뻐끔거렸지만 한립이 그에게도 금빛 뇌전을 날려 기절시켰다.

    “려 수사, 수단이 고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허나 잠시라도 더 이곳에 머물 수는 없겠습니다.”

    석천공이 감탄을 하며 말했다.

    “목적은 이루었으니 당연히 떠나야겠지요.”

    한립은 바닥에 떨어진 잡다한 마기 보물이나 저물법기들은 건들지 않은 채 담담히 웃음 지었다.

    한립과 석천공은 흑유성 중앙 대로를 지나 북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너무 눈에 띌 것을 걱정해 걸어가는 길이었다.

    “앞으로도 추격을 걱정하며 다녀야겠습니다.”

    한립이 걸음을 재촉하다 입을 열었다.

    “하필 흑유군을 만난 게 죄지요. 하루빨리 십환산맥을 벗어나야겠어요.”

    석천공도 풀이 죽어 탄식했다.

    말을 마친 그들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전방을 응시했다.

    오가는 사람들 속에 문인들이 쓰는 방건을 쓴 청수한 인상의 젊은이가 서책 한 권을 말아 쥐고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친 한립과 석천공은 서로의 눈빛에서 곤란함을 떠올렸다. 그들을 향해 유유히 다가오는 이는 명성이 자자한 흑유대왕이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상대가 먼저 진짜 문인처럼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13황자가 멀리 흑유성까지 찾아주었는데, 미리 나가 마중을 하지 못했군.”

    석천공도 굳은 얼굴을 풀고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띠고 마주 예를 올렸다.

    “선배님께서 너무 환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립은 말없이 그를 따라 예만 취했다.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에 그리 적합하지도 않고 귀한 손님을 바깥에 세워두는 것도 흑유성의 법도에도 어긋난다네. 괜찮으면 나와 같이 육수궁(毓秀宮)에 잠시 앉았다 가지 않겠는가?”

    그들이 공손하게 나오자 흑유대왕의 얼굴에 진심이 어렸다.

    “그럼 폐를 좀 끼치겠습니다.”

    흑유대왕의 청을 그들이 거절할 수 없었다. 석천공의 대답을 들은 흑유대왕은 권하는 자세를 취하며 그들을 검은빛으로 감쌌다.

    주변 풍경이 휙휙 바뀌고 다음 순간, 그들은 아주 넓은 녹음이 푸른 화원에 도착했다.

    귀한 화초들과 기암괴석들이 가득한 화원에는 울창하게 대나무가 자라 고즈넉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자아냈다.

    밤하늘의 별처럼 곳곳의 정교한 누각과 정자들이 반짝거리고 새와 벌레 소리가 들려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지극히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화원 깊이 들어간 세 사람은 생기 넘치던 봄에서 갑자기 눈이 내리는 겨울 풍경으로 접어들어 그 안의 기이한 짐승들과 마주했다.

    “흑유 선배님, 이곳이 흑유성의 남성원(攬腥園)인가 봅니다.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경을 모두 즐길 수 있다니 듣던 대로 대단합니다.”

    석천공이 후배로서 반걸음 떨어져 걸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시골의 정원이 야양성의 번화한 풍경만 하겠는가?”

    흑유대왕은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눈빛에 흡족한 기색이 스쳤다.

    두 사람은 흑유군과 충돌했던 일을 언급하지 않고 그를 따라 한가롭게 정원을 구경하다 붉은 건물들로 걸어갔다.

    “13황자, 우린 종령전(鍾靈殿)에 잠시 머물고 려 수사는 춘수전(春水殿)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기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나?”

    유리 찻잔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붉은 건물 앞에서 흑유대왕이 멈춰 섰다. 한립이 석천공을 보자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유 선배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석천공이 미소를 보이며 말한 뒤 한립은 아름다운 시녀의 안내를 받아 홀로 춘수전으로 향하고 석천공은 흑유대왕을 따라 육수궁 쪽으로 갔다.

    춘수전에 자리를 잡은 한립은 궁녀의 시중을 받으며 차를 즐겼다.

    한편, 종령전 안.

    대전의 문이 닫히고 석천공은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거대한 대전 안은 평범한 의사 대전과 달리 속세 귀족의 서가처럼 3분의 2의 공간에 귀한 목재로 만들어진 책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책장에 보관된 수십만 권의 책들은 대부분은 시와 문집 그리고 속세의 소설이었고 불가나 도가의 경전도 섞여 있었다.

    서가 곳곳에 시나 불가나 도가의 성인들이 남긴 명언이 적혀 있었는데 필체는 평범해서 명필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서책을 모으시는 고아한 취미를 지니셨군요. 서체도 힘이 있습니다.”

    석천공은 긴장감을 숨기고 서가를 칭찬했다.

    “이런 만황 구석에는 피에 미친 자들뿐이라 13황자 같이 안목이 높은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지. 오늘 만나 이야기를 나눠 역시 좋구만, 하하…….”

    “아, 일전에 성에서 선배님의 자제분과 있었던 일은 정말…….”

    석천공이 사과를 하려는데 흑유대왕이 손을 저어 막았다.

    “그런 사소한 일은 개의치 않네. 13황자를 육수궁으로 청한 이유가 겨우 그 일 때문인 줄 알았는가?”

    “그게 사소한 일이라면 중요한 용건은 무엇일지요?”

    의미심장한 흑유대왕의 눈빛에 석천공도 눈을 반짝였다.

    “하하, 총명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시간을 아끼는 법이지! 야양성이 지금 ‘전승’ 문제로 혼란스럽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야. 크고 작은 세력들이 선택에 직면해 있고. 우리 십환산맥과 같은 시골구석은 평소에 다른 이들의 중시를 받지 못하나 때가 되면 역시 영향을 받게 될 테지. 그래서 난 앞으로의 풍파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미리 결정을 내려 두려고 하네.”

    흑유대왕은 책장 중 하나로 다가가 들고 있던 서책을 제자리에 두었다.

    “전승에 관한 이야기는 성족의 금기나 마찬가지이고, 저는 그것을 위해 경쟁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성역을 떠나 떠돈 지 오래라 오랜만에 돌아왔을 뿐입니다.”

    “귀한 구슬이라면 어디에 있든 빛나기 마련이네. 13 황자께서 돌아오시지 않았어도 누군가는 황자를 눈여겨보았겠지.”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상대가 뜻하는 바가 있음을 알아챈 석천공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모두 성주의 13명의 아들 중에 대황자 석참풍의 세력이 가장 크고 그와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이가 자질이 가장 뛰어난 세 번째 황자 석파공이라 한다네. 그리고 3황자와 같은 어머니를 둔 자네는 분명 그의 휘하에 들어갈 거라고 짐작하고 있지.”

    “알겠습니다, 흑유 선배님께서는 저를 통해 셋째 형에게 판돈을 걸어보시려 하는 것이군요.”

    “대황자가 추살령을 내리기 전에는 그런 마음이었으나, 그가 내건 보상이 아주 후해서 고민이 되더군. 그런데 자네와 자네의 수행원이 금서의 장수 둘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네.”

    석천공은 흑유가 한립의 신분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고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한립이 금서의 추격에서 벗어날 때 강대한 기운을 느꼈다고 한 말도 떠올랐다.

    “혹시 흑유 선배님께서 저희가 금서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신 것입니까?”

    “그렇네. 그 전부터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거든. 원래는 서로의 피해가 가장 심할 때 나서서 어부지리나 얻고자 그랬던 것인데, 13황자가 두 번이나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자네들을 보호해 3황자에게 줄을 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었지. 그런데 오늘 보니…….”

    흑유대왕은 말을 하다 말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석천공을 훑었다. 긴장하던 석천공은 마음을 편히 하고 솔직한 시선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 더 나쁜 일이 생길 것도 없었다.

    “하하하! 직접 만난 뒤 난 바로 13황자 자네에게 판돈을 걸기로 결정을 내렸네.”

    흑유대왕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석천공은 자신의 두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잠시 후에야 입을 뗐다.

    “제게요? 대체 왜 그런 결정을…….”

    “13황자가 혜안을 지녔기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졌다면 믿을 수 있겠나?”

    웃음을 거둔 흑유대왕이 진지하게 말했다.

    “선배님, 그건…….”

    “13황자는 막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네! 그저 지금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고. 곁에 대단한 실력을 지닌 자가 따른다는 것과 대황자가 어떤 대가도 불사하고 죽이려 드는 것만 보아도 내 판단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지.”

    “흑유 선배님의 패기와 원대한 뜻에는 그저 탄복할 뿐입니다.”

    석천공은 웃음이 나오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13황자가 이견이 없다니 구체적인 사안을 이야기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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