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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97화 (1,654/2,000)

1897화. 진면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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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마른 장궤는 푸른 물빛의 금제를 펼쳐 외부와 내부를 차단했다.

“나름 쓸만한 금제라 태을경 실력자도 이곳에서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없답니다.”

장궤가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고 앉으며 말했다.

“금제는 확실히 나쁘지 않군. 허나 거래를 하려면 본인이 나서야지, 중요한 귀빈을 상대하는데 괴뢰가 나선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군.”

한립은 자리에 앉지 않고 마른 장궤를 응시하며 씩 웃음 지었다. 그 말에 석천공와 흑랑이 표정이 변해 장궤를 다른 시선으로 훑었다.

“허허, 안목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이번 거래가 더욱 기대되는군요.”

침묵이 감돌던 방의 다른 문이 열리고 또 다른 마른 장궤가 웃음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조금 전까지 그들을 상대하던 장궤는 눈빛이 멍하게 풀려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수사의 공혼술(控魂術)이 뛰어나군요. 비슷한 비술을 익힌 적이 없다면 저도 못 알아챘을 겁니다.”

한립은 상대를 암암리에 훑으며 웃는 낯으로 답했다.

마른 중년인은 겉보기에는 금선경 수사였지만 보물로 기운을 가려 진선경인 척하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앉으시지요.”

진짜 마른 중년인이 등장하자 한립과 석천공은 자리에 앉았는데 흑랑은 여전히 서 있었다.

“또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없고 당신 얼굴을 한 번 보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싶어서 말입니다.”

흑랑이 돌연 묘한 미소를 짓자 마른 장궤가 안색이 변해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관 형, 아주 오랜만에 봅니다.”

흑랑이 수결을 맺어 검은 촉수 같은 기운으로 몸을 뒤덮었다.

그는 어느새 까무잡잡한 피부에 길쭉한 얼굴을 하고 흉흉한 눈빛을 지닌 청년으로 변했다.

몇 달은 굶은 이리 같은 눈빛이었다.

흑랑은 외모만 변한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탁하고 날카롭게 달라졌으나 이미 알고 있던 한립과 석천공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흑랑! 네가 살아 있었더냐!”

마른 중년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살아 있고 말고요. 그나저나 관 형이 흑유성에 남아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흑유군이 도처에서 우리의 행적을 찾고 있는데 아주 대담한 선택이에요. 역시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일 수 있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나 봅니다!”

흑랑은 웃음을 흘렸지만 마른 장궤는 살기를 드러냈다.

“미리 말해두는데 이상한 마음은 먹지 마시지요. 제가 실력은 약해도 머리는 쓸만합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한 시진 내로 내가 상점에서 살아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흑유군에 모든 일을 고할 이를 고용해 두었습니다. 게다가 여기 두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흑랑은 유유히 의자에 앉고는 정말 걱정 하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른 장궤도 태연해 보이는 한립과 석천공을 보고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허허,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제가 여기 온 목적을 모르실 리가요. 이 두 분께서 흑유성에 자양난옥을 구하러 오셨기에 소개나 드릴 겸해서 모셔 왔습니다.”

“자양난옥같이 귀한 보물은 이런 작은 상점에서는 구할 수 없습니다. 자양난옥을 구하려고 오셨다면 큰 상점들부터 가보시지요.”

마른 장궤가 흑랑의 말을 듣고 한립과 석천공을 향해 냉담히 말했다.

“관 형, 빙빙 돌리지 말고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세요. 그 자양난옥을 구할 때 저도 목숨을 걸었고, 일석과 일사 수사는 그 일로 정말 목숨을 잃었습니다.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잠시 몸을 피한 것은 이해하겠지만 혼자 그걸 독차지할 심산이라면 끝이 좋지 못할 겁니다!”

말을 하면서 흑랑의 눈빛이 형형하게 번득였다.

“흑랑, 그게 무슨 말이냐? 당시 너희 셋이 죽은 줄 알고 나도 괴로웠다. 허나 맹세를 저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발설하다니!”

마른 장궤의 목소리가 음산해졌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관 형이 가장 잘 알 겁니다! 우릴 먼저 팔아먹어 놓고 지금에서야 맹세를 들먹거리는 겁니까?”

“어차피 오해가 깊으니 그 일은 더이상 논할 것 없고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하거라.”

마른 장궤가 흑랑 일행을 보다가 화를 가라앉혔다.

“관 형이 그 많은 자양난옥을 지니고 흑유성을 떠나지 못한 것은 잡힐까 봐 몸을 사린 것도 있지만 적당한 판매처를 찾지 못해서일 겁니다. 여기 두 분은 십환산맥 사람도 아니고 재산도 넉넉하니까 이 가격으로 자양난옥을 거래하세요. 그 대가로 받은 마원석을 절반만 제게 나눠주시면 그간의 은원은 깨끗하게 잊어 드리겠습니다.”

흑랑은 준비해온 옥간을 던졌고, 마른 장궤는 빠르게 내용을 확인했다.

“자양난옥을 파는 것은 이견이 없습니다만 그 전에 두 분이 약조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말해 보시지요.”

침묵하던 장궤의 말에 한립이 답했다.

“거래가 끝나는 대로 흑유성을 떠날 것이며, 오늘 있었던 일을 제3자에게 발설하지 않겠다고 심마를 걸고 맹세해주세요.”

“좋습니다. 저희도 자양난옥을 사고 싶은 것이지 복잡한 일에 휘말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한립과 석천공은 지체없이 장궤의 요구대로 심마를 걸고 맹세했다.

“두 분께서 성의를 보여주셨으니 저도 약조를 이행하겠습니다. 물건을 확인해 보십시오.”

마른 장궤는 그들이 심마를 걸고 맹세하자 얼굴을 풀고 보라색 팔찌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한립도 저물반지 두 개를 탁자에 내려놓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마른 장궤와 흑랑은 각자 저물 반지 하나씩을 들어 확인하고는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거래도 끝났겠다 그만 가시지요.”

마른 장궤는 재빨리 반지를 넣어두고 축객령을 내렸다.

한립과 석천공이 곧바로 자리를 뜨려는데 흑랑이 제일 먼저 방문을 나섰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 위 허공에서 금색 검기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흑랑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검빛에 몸이 절반으로 갈라져 사방으로 피를 뿌리며 즉사했다.

깜짝 놀란 한립과 석천공이 방 안으로 물러나는데 마른 장궤가 겁에 질린 얼굴로 수결을 맺고 있었다.

방 안의 보호막이 다시 펼쳐지기도 전에 금빛 검기가 번득 날아들어 방을 두부 자르듯 잘랐다.

쉬쉬쉭!

열댓 명의 흑갑 병사들이 그들 셋을 둘러싸고 나타났다.

“흑유군!”

한립은 그들이 흑유대왕 휘하의 정예병인 걸 알아보았다.

전부 금선경의 실력자들이었다.

그 뒤로 두 명이 더 내려섰다.

젊고 잘생긴 청년은 하얀 장포를 입고 문인들이 Tm는 사각 관인 방건(方巾)을 쓰고 부채를 부치고 있었고, 푸른 의복을 걸친 여인은 눈이 보이지 않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여인은 얼음 조각처럼 서늘한 표정을 지었고 그녀의 금색 장검에서는 환영처럼 금빛이 방출되었다.

두 사람 모두 태을경 존재였다.

마른 장궤가 그들을 보고 기겁하며 소매를 펄럭였다.

검은 화염이 솟구친 그는 삼두육비의 검은 화염 거인으로 변해서 기이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퍼트렸다.

맷돌 크기의 여섯 개의 주먹이 뻗어 나가 흑갑 병사들을 공격하고, 세 개의 머리는 입에서 검은 화염을 뿜어 허공의 두 사람을 공격했다.

마른 장궤는 즉시 노란빛을 반짝이며 지면으로 흐릿하게 녹아들어 사라졌다.

그러나 백포 청년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청의(靑衣) 여인의 손이 미세하게 움직이더니 금빛 검기가 불가사의한 속도로 사라졌다.

세 줄기의 검은 화염이 검기에 갈라져 백포 청년과 여인을 비켜 지나갔고 땅속으로 파고들던 마른 장궤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어 바닥을 기고 있었다.

허리가 잘린 그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3공자,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가 욕심에 눈이 멀어 자양난옥을 훔쳤습니다. 전부 돌려드릴 테니 제발 목숨만……. 공자와 노예 계약을 맺어 평생 공자를 모시며…….”

마른 장궤가 빌었지만 백포 청년은 멸시의 눈빛으로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쉭!

그의 손끝에서 핏빛이 날아가 비수로 변해 마른 장궤의 미간에 박혔다.

장궤의 목소리가 뚝 끊기고 그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져갔다. 백포 사내의 손짓에 핏빛이 검은 소인을 가둬 장궤의 미간을 빠져나왔다.

마른 장궤의 혼백이었다.

“너 때문에 부친께 질책까지 들었는데 살려달라고? 네 놈의 혼백을 만 년간 불에 지져 죽이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흉흉한 웃음을 흘린 청년은 검은 혼백을 입속에 집어넣고 꿀꺽 삼켜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한립과 석천공을 내려다보고는 그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짧지만 격렬한 공격이 오갔는데 두 사람은 그 한 가운데 서서 투명인간처럼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두 분은 누구십니까? 관승, 흑랑과는 무슨 관계고요?”

백포 사내는 꽤 예의를 차리며 물었다.

“저희는 상점에서 물건을 사러 들린 손님일 뿐 그 둘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립은 백포 청년에게 공수하고 석천공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백포 청년이 그걸 보고 눈빛이 매서워졌다.

“무엄하다! 공자께서 어떤 분이신 줄 알고 그따위로 말하는 것이냐!”

체구가 큰 흑갑 거한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비켜라.”

걸음을 멈춘 한립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 이놈! 죽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포박을 당하거라!”

금선경 흑갑 병사는 겨우 진선경 수사 두 명이 방자하게 굴자 당황했으나 백포 청년의 명령이 없어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했다.

“공자, 저 둘은 관승, 흑랑과 함께 있었습니다. 한패가 분명하니 잡아가서 조사를 해봐야 합니다.”

“맞습니다. 광맥에 숨어든 도둑이 한두 놈이 아니었습니다! 흑유대왕께서는 성안에서 함부로 사람들을 잡아들이지 못하게 하시지만, 우리 흑유성의 보물인 자양난옥을 훔쳐 간 도둑놈들이라면 안 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다른 병사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백포 청년은 그 말을 듣고 흑갑 거한을 향해 작게 고갯짓을 했다. 그걸 본 흑갑 거한이 두 눈에 살기를 머금고 두 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휘잉!

그러자 발톱이 기다란 검은 짐승발 두 개가 한립과 석천공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검은 허상들이 스친 그들의 몸이 사분오열(四分五裂)되었으나 시체는 그 자리에서 흩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그들의 잔영에 불과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바깥 허공에 파동이 일고 한립과 석천공이 나타나 천천히 바깥쪽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 모두가 안색이 달라졌고 백포 청년도 동공을 수축했다.

맹인으로 보이던 청의 여인은 언뜻 미간을 좁히고 ‘공간법칙’이라고 중얼거렸다.

흑갑 거한이 머뭇거렸으나 백포 청년의 눈치를 살피고는 검은빛을 방출해 몸집을 키웠다.

“어디서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이냐!”

체구가 몇 배로 커지고 검은 털이 자라난 거한은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은 반요(半妖)의 상태로 바닥을 박찼다.

검은 거한이 소리를 내지르며 두 주먹을 날렸으나 한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 손으로 다가오는 주먹을 향해 날렸다.

콰득!

“윽!”

거한의 방대한 몸이 날아가 주변 건물에 부딪혀 먼지가 일었다. 신음을 흘린 그의 몸에서 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모습에 흑유군 수사들은 대경실색했다.

가벼운 일장에 반요화된 금선경 흉수를 무력화시키는 일은 평범한 태을경 흉수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야 그들은 한립과 석천공이 특별한 방법으로 수행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다들 백포 청년만을 바라보았고 한립은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석천공과 나란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청의 여인과 흑유군 수사들 모두 그들의 앞을 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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