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95화 (1,652/2,000)

1895화. 대량구매

*

푸른 말이 끄는 마차의 속도가 꽤 빨랐고 주변 풍경도 휙휙 달라졌다.

“노해, 흑유성의 비행 금지령 말고 다른 규정은 없느냐?”

한립은 풍경을 구경하며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있습죠! 성안에서는 싸움을 엄히 금하고 있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투를 벌여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흑유군이 끌고 가서 수행을 폐해 버리거든요. 그리고 밤에는 통금이 있어 성 밖으로 나가거나 객잔에 묵어야지 멋모르고 성안을 돌아다니다 붙잡히면 엄벌을 받습니다.”

노해는 심각한 얼굴로 경고했다.

“통금도 있다고?”

비행과 싸움을 금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낮과 밤에 별다른 차이를 두지 않는 수도자들에게 통금은 정말 이상했다.

게다가 흑유성처럼 상업이 발달한 곳에서 밤에 활동을 금지한다면 거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모두 흑유대왕께서 정하신 규정입니다. 밤에는 집에 돌아가 쉬어야지 괜히 돌아다니면 사고나 친다고 통금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사고를 친다고?”

흑유대왕이 통금령을 내린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속세의 성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에 한립은 할 말을 잃었다.

“우리에게 흑유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보거라.”

석천공이 끼어들어 물었다.

“예! 흑유성은 총 9구역으로 나뉩니다. 중심의 3구역은 흑유대왕과 휘하의 흑유군이 거주하는 곳이고, 나머지 6곳 중 3곳은 평민들이 거주하지요. 면적이 아주 넓지만 하급 종족들이 머무는 곳이라 가보셔도 볼 게 없을 겁니다. 나머지 2구역은 선배님들 같은 고등 종족들이 머물고, 마지막 교역구에 모든 고급 상가들이 모여 있습니다. 성에서 생산되는 최상급 재료나 마기들은 전부 그곳에서 거래할 수 있습니다. 그저 교역구로 들어가려면 비용을 내야 하는데 선배님들께 무리가 될 금액은 아니고요.”

노해는 더이상 흑유대왕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되자 안심하면서 줄줄 흑유성 소개를 늘어놓았다.

“오, 우리가 이번에 흑유성을 찾은 것은 자양난옥을 구하기 위해서다.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느냐?”

“자양난옥이요? 자양난옥은 흑유성의 특산물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 중 하나라 구하려 한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저 같은 마차꾼이 알 수 없는 정보이니 성에서 규모가 가장 큰 상점 몇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석천공의 물음에 노해가 언뜻 얼굴이 굳어 미안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 안내해 보거라.”

석천공도 마부 신분인 노해가 그런 귀한 정보를 알거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 시진이 흘러 마차는 흑유성 깊은 곳의 어느 거대 성문 앞에 멈춰 섰다.

성의 각 구역은 외곽의 성벽보다 낮은 성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낮은 성벽 너머로 높고 화려한 상점들이 가득했고,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곳이 흑유성의 교역구였다.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그들의 마차를 막아섰다.

“교역구로 들어가려면 1인당 상품 마석 1개씩 내야 합니다. 세 사람이니 상품 마석 3개를 내시면 됩니다.”

흑갑 병사 중 하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노해가 민망한 기색으로 한립과 석천공을 보았다.

보통 이런 비용은 승객이 내기 마련인데 출발하기 전에 설명하지 않아 한 소리를 들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석천공은 아무렇지 않게 검은 수정돌 3개를 꺼내 흑갑 병사에게 던져 주었고 병사들은 길을 터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노해가 인사를 하고 마차를 교역구 안으로 몰았다.

잠시 후 5층 건물에 도착했는데 외관이 그리 화려하지는 않아도 드나드는 이들이 많았다.

누각에는 부금각(浮金閣)이란 명패가 걸려 있었다.

“성에서 가장 큰 상가 중 한 곳인 부금각입니다. 외관은 평범해 보여도 만 년 넘게 운영을 하고 있어 인맥과 재력에서는 손에 꼽히는 곳이지요. 저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들어가 살펴보십시오.”

“그래, 알겠다.”

노해의 설명을 듣고 석천공이 내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도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고 그를 따라갔다.

대문에 발을 들이는 순간 미약한 마기 파동이 번지고 눈앞이 뿌옇게 변한 그들은 어느새 거대한 대청 안에 들어서 있었다.

수미공간을 이용한 상점이라니 과연 평범한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방금 마기 파동이 번질 때 한립은 은연중에 그의 수행을 파악하려는 느낌도 받았다.

그러나 석천공과 그의 수행에 비술을 써서 기운을 감추었으니 이런 간단한 검사로는 수행을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대청 양쪽에 커다란 진열장들이 들어서 있고 왼쪽에는 원재료, 오른쪽에는 단약과 마기 같은 완성품들이 놓여 있었다.

물건들은 질서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각 진열장 옆에는 녹색 장삼을 걸친 시종들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었다.

시종들은 짐승의 모습이 아닌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금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희는 진선경 선배님들을 접대할 자격이 되지 않으니 귀빈실로 자리를 옮기시면 주사(主事) 대인을 모셔오겠습니다.”

녹색 자삼을 걸친 시녀가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

“길을 안내하거라.”

석천공은 당당하게 말했다.

녹의 시녀는 그들을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으로 안내해 진귀한 과일과 향기로운 차를 대접했다.

“십환산맥에서 나는 오과(烏果)과 무천차(霧泉茶)입니다. 려 수사, 입맛에 맞는지 드셔보시지요.”

석천공이 과실과 차를 알아보고 권했다. 한립은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맛을 보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분홍색 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왔다.

“귀빈을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저는 부금각의 주사, 매란이라 합니다.”

여인은 흉수족의 모습을 감춘 채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들어와 그들을 보고 활짝 웃음 지었다.

사뿐사뿐 걸어오는 그녀에게서 그윽한 향기가 번졌다.

한립은 상대의 수행이 태을경을 앞둔 금선 최고봉이고 본체는 무시무시한 나무 요수인 것을 알아보고 눈썹을 끌어올렸다.

이렇게 높은 수행을 지닌 여인이 겨우 상점의 주사라니 의아한 일이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수행이 높고 아름다운 여인이 상점을 맡고 있으면 여러모로 거래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수에 놀아날 리 없는 한립과 석천공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맞이했다.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매란은 두 사람이 태연한 것을 보고 내심 놀라며 맞은 편에 앉았다.

“부금각이 흑유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상점 중 하나라 듣고 거래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건 계약금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시지요.”

석천공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저물탁 하나를 꺼내 던져 주었다.

매란은 의외라는 얼굴로 팔찌를 받아들고 깜짝 놀랐다. 그 안에는 무려 마원석 50만 개가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두 분과 거래할 수 있다면 부금각의 영광일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거래하시기를 원하시는지요?”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립의 눈빛에 웃음기가 어렸다.

매란은 그녀의 수행과 미모로 승기를 잡으려 했지만 초장부터 석천공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저희가 이번에 찾아온 것은 상품 자양난옥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양난옥이요?”

“왜 그러십니까? 거래할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까.”

“오해는 말아 주십시오. 저희는 당연히 거래하고 싶지만 자양난옥이 귀해서 상품은커녕 중품도 보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렇게 희귀하다면 이렇게 하시지요. 자양난옥의 가격이 얼마든 저희가 3할을 더 주고 매입하겠습니다. 그저 품질만 좋은 것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석천공이 침음하다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가격을 흥정하기 위해 그냥 드린 말씀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흑유성의 상황을 이리 모르시는 것을 보면, 두 분은 흑유성 분이 아니시겠지요? 자양난옥은 생산량이 극히 적고 그마저도 대부분이 흑유대왕께서 관리하셔서 외부로 흘러나오는 물량은 극히 적습니다. 저희가 흑유성에서 가장 큰 상가 중 하나라도 자양난옥은 몇 개 밖에 보유하고 있지 못하고 그마저도 전부 하품입니다.”

매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립과 석천공이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구할 방도가 전혀 없겠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물건이라면 몰라도 자양난옥은 저희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괜히 곤란하게 해드릴 수는 없지요.”

석천공이 탁자의 저물탁을 거두자 그걸 보던 매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매란 주사, 아까 말씀하신 하품 자양난옥이라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침묵하던 한립이 입을 뗐다.

“그러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가져와 보여드리겠습니다.”

매란이 희색을 드러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 수사, 매란의 말이 사실일 듯싶습니까?”

한립은 석천공과 둘만 남자 방음결계를 치고 물었다.

“몰래 통심(痛心) 비술을 사용했는데 상대의 말이 허언은 아닌 듯했습니다.”

“상품 자양난옥을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뜻이군요.”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했습니다. 자양난옥은 상중하 품으로 나뉘는데 그 격차가 심해서 하품은 구해 봐야 혼백을 보양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상품이든 하품이든 제혼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놓칠 수 없습니다.”

석천공은 흥미가 없어 보였으나 한립은 제혼의 회복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한립은 손을 저어 방음 결계를 없앴고, 방안으로 들어선 매란은 보라색 네모난 옥함을 내려놓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드렸습니다. 이게 저희가 보유한 자양난옥 전부이니 보시지요.”

옥함을 열어본 한립은 2, 30개의 예쁘장한 보라색 수정돌을 살폈다.

보랏빛이 은은하게 어린 수정들은 이곳저곳에 상처가 있고 약간 색이 혼탁했지만 손을 대니 따뜻한 기운이 머리로 흘러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하품이기는 해도 품질이 나쁘지 않습니다. 어떠십니까?”

매란은 한립이 자양난옥 한 개를 들고 말이 없자 먼저 의중을 물었다.

“이건 가격이 어떻게 됩니까?”

한립은 자양난옥을 내려놓고 물었다. 매란은 상대를 훑고는 시장가보다 1할 높게 가격을 불렀다.

“거래하지요.”

가격을 들은 한립은 흥정하기도 성가셔서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래를 수락했다. 철우 등을 죽여 얻은 저물법기에 마원석이 많이 들어있어서 이 정도는 지불할 수 있었다.

그는 보라색 옥함을 거둬들이고 저물반지를 매란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

매란은 저물반지를 의식으로 훑고는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거래를 마치자 그들은 바로 부금각을 떠났고, 매란은 그들을 대문까지 배웅하고 들어갔다.

“선배님들 일은 잘 보셨는지요?”

근처 골목에 마차를 세워놓고 기다리던 노해가 얼른 다가왔다.

“신경 쓰지 말아야 할 일을 묻는구나. 어서 다음 상점으로 안내하거라.”

석천공이 힐끗 쳐다보며 냉랭하게 명하자 노해가 급히 답하고 입을 다문 채 다음 상점으로 향했다.

한립과 석천공은 높은 탑 안으로 들어가 반 시진 만에 나왔다.

“다음.”

한립의 담담한 명령에 마차가 출발했다. 이렇게 그들은 7개의 대형 상점에 들어가 자양난옥을 모조리 사들였다.

그날 밤, 어느 객잔 안.

한립은 진법 깃발들을 방 곳곳에 날려 몇 겹의 금제 보호막을 펼치고 은색 빛의 문을 열었다.

화지 공간 안의 누각에 들어서자 제혼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채 침상에 누워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제혼은 피부가 투명하게 변해 검은 기운이 미약하게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한립은 상태가 더욱 나빠진 제혼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어 평정을 되찾고는 소매를 저어 탁자 위에 크고 작은 옥함들을 꺼내 놓았다.

그 안에는 자양난옥 2백 개가 들어있었다.

중품 하나 없이 전부 하품 자양난옥들이었지만 이만한 양이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워낙 상업이 활발한 도시기는 해도 이렇게 많은 자양난옥을 사들였으니 누군가의 눈에 띌 수도 있었기에 그들은 날이 밝는 대로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