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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94화 (1,651/2,000)

1894화. 호랑이를 피하려다 늑대에게 잡히다

*

전방의 한립이 요행을 바라지 않고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 시간법칙의 힘으로 최고의 속도를 내자 놀랍게도 금서대왕 어차와의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기뻐하던 석천공은 한립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그가 무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번쩍번쩍 하늘을 가르던 한립이 시간영역을 얼마 유지하지 못할 무렵 아래쪽 산맥의 지형에 변화가 일어났다.

검푸른 수풀이 줄어들고 커다란 교목과 덤불들이 자라는 구불구불한 구릉지대가 펼쳐졌다.

“이제 곧 흑유대왕의 영역입니다. 그와 금서의 사이가 좋지 않으니 어차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서게 두고 볼 리 없습니다. 그때가 우리에게는 기회가 되겠지요.”

석천공이 지형을 확인하고 밝게 말했다.

“그래도 대라경 흉수를 상대로 방심해서는 안 될 겁니다.”

전력으로 벽옥비차를 조종하던 한립은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파앗.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쪽에서 파동이 일고 수만 리를 가로질러 얇고 기다란 영역이 그들을 향해 뻗어왔다.

그 끝에는 금서대왕의 어가가 있었다.

“어서 달아나야…….”

한립이 깜짝 놀라 외쳤지만 늦고 말았다.

금서대왕이 자신의 영역 안에서 한걸음에 수 만리를 건너뛰어 그들 머리 위에서 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태산 같은 위력에 무력감을 느낀 한립은 간신히 진언보륜을 역전해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화아앗!

일촉즉발의 순간, 괴이한 은빛 파동이 그의 옆에서 번졌다. 석천공 미간에서 은색 부적이 튀어나와 펑! 터진 것이다.

파동이 퍼져 두 사람을 덮고 사라졌다.

콰콱!

벽옥비차는 금서대왕의 금색 발에 단번에 터져 청록색 가루가 되어 흩어졌으나 한립과 석천공은 공간 파동만 남기고 사라졌다.

금서대왕은 두 사람이 달아난 것을 발견하고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 * *

십여만 리 밖.

푸른 관목들이 자라난 언덕에 땅이 불룩하게 올라오더니 한립과 석천공이 흙을 털고 나왔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석천공은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금서대왕이 쫓지 않고 돌아가는 듯합니다.”

소매를 펄럭여 먼지를 털어낸 한립이 입을 열었다.

“그는 우리를 쫓아 이미 흑유대왕의 구역을 침입했습니다. 방금 단번에 수 만 리를 건너뛰어 우릴 죽이려 한 것도 마음이 조급해서였겠지요. 흑유의 소굴에 깊이 들어갔다가는 그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알지 못할 테니까요.”

석천공은 크게 숨을 헐떡이며 대답해주었다.

“조금 전 미간의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십만 리나 순간이동 시키다니요.”

“아버지께서 목숨이 위험할 때 쓰라고 주신 몇 가지 보물 중 하나인데 딱 한 번밖에는 사용하지 못하는 물건입니다.”

“순간이동을 하는 순간 미약하게나마 금서와 동급의 강력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이미 흑유의 구역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호랑이를 피하려다 늑대에게 잡히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제가 이곳으로 달아난 것은 금서와 흑유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흑유대왕은 십환 중 하나이면서도 다른 대왕과는 다르니까요.”

석천공은 입가의 피를 소매로 닦으며 천천히 말했다.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흑유대왕은 흉수 출신이지만 우리 성역의 공법이 아닌 선계의 삼청도법(三淸道法)으로 수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정이 다른 십환처럼 포악하지 않고 오히려 점잖게 시를 읊거나 독서를 즐긴다고 하더군요. 몇 번은 문인으로 변장을 하고 속세의 왕조를 경험하기도 했고요.”

“학문을 익히는 흉수라니 독특한 경우기는 합니다.”

“원숭이가 사람처럼 꾸민다고 사람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어느 속세의 왕궁에서 과거를 3번이나 치렀는데도 작은 관직 한 번 받지 못하자 황제는 물론 관원들까지 모조리 죽여 잡아먹은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서둘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흑유대왕은 그간 웅거성과 암암리에 교류하며 십환의 신분을 벗어던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위험해질 가능성은 적다는 뜻이지요. 게다가 저는 흑유성을 한번 다녀갈 생각이었습니다.”

“흑유성을요?”

석천공의 의견에 한립이 멈칫했다.

“십환산맥이 황무지에 있기는 하나 자양난옥(紫陽暖玉)이라는 희귀한 재료의 산지입니다. 원영과 육체의 결합을 도와 다른 이의 몸을 차지하는 탈사의 위험을 줄이지요. 제 수하 중 한 명이……. 수사도 진언문 유적에서 보았던 풍림 수사가 그걸 필요로 합니다. 자양난옥은 혼백을 보양하는 데도 도움이 되니 제혼 수사를 깨어나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될지 모르고요.”

“……저는 마족이 아닌데 괜히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려 형,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전에 마족 공법을 수련한 적이 있으시지요? 그 기운을 조금만 노출해서 비늘이나 뿔 같은 것을 만든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겁니다.”

석천공이 웃음 지었다.

그 소리를 들은 한립은 범성진마공을 운용해 피부 곳곳에 금색 비늘을 돋게 했다.

“가시죠. 흑유성까지 갈 길이 멉니다. 수사의 비차가 망가졌으니 제 오신비사(烏神飛梭)를 타고 가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말을 마친 석천공이 새까만 베틀북을 불러냈는데 까마귀 문양이 새겨진 보물은 벽옥비차와 맞먹는 비행보물이었다.

* * *

한 달이 훨씬 지난 어느 날, 추격병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석천공과 한립은 긴장을 풀지 않고 길을 재촉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흑유대왕의 통치 구역은 십환산맥의 변두리에 있어서 흉수의 수가 금서령보다 훨씬 적어 기습을 당하는 일도 얼마 없었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허공에 선 한립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망망대해처럼 보이는 거대한 호수가 보랏빛 물결을 찰랑거리고 있었다.

호수 안에는 물고기들이 많고 청록색 수초가 넘실거려 매우 평화롭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자분호(紫汾湖)입니다. 분옥(汾玉)들이 생산되는데 호수 밑바닥에 형성된 분옥광맥에서 기운이 흘러나와 호수를 보라색으로 물들이지요. 분옥과 자양난옥은 공생하는 재료라 분옥을 채취하다 보면 가끔 자양난옥 한두 개가 같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분옥광맥은 성역 전체에도 몇 개 되지 않는데 자양난옥이 탄생할 만한 대형 분옥광맥은 제가 알기로 여기뿐이에요.”

“그렇다면 어서 가보지요.”

한립은 제혼이 점점 기운이 허약해지자 자양난옥이라도 구해 어떻게든 병증을 늦추고 싶었다.

“잠시만요. 외모가 너무 눈에 띄니 변신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천공은 그를 말리며 주문을 외워 검은빛을 물처럼 출렁였다.

키가 부쩍 커진 석천공은 새까만 피부에 손과 발에 듬성듬성 짐승의 털이 자란 십환산맥의 늑대 종족으로 변했다.

그걸 본 한립도 금빛을 반짝여 보라색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닌 외뿔 청년으로 변신했다.

범성진마공을 기초로 한 변화에 법언천지의 현묘한 환영이 섞여 대라경 수사라도 한 눈에 진짜 모습을 꿰뚫어 보기는 힘들 것이다.

한립이 먼저 허공을 박차 올랐고 석천공이 뒤따랐다.

그렇게 잠시 날아가다 보니 흐릿하게 보이던 검은 그림자가 거대해지면서 수백 리에 달하는 검은 섬으로 변했다.

섬 가운데에는 거대한 성이 우뚝 솟아 있었고, 보라색 문양들이 정체 모를 진법을 이루어 보라색으로 반짝였다.

흑유대왕의 거처인 흑유성이었다.

주변을 날아다니는 둔광은 두 사람 외에도 많았고, 아래쪽 호수에는 큰 배들이 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울창한 나무에 각양각색의 새가 날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진선급으로 기운을 조정한 한립은 아래의 선박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러십니까?”

“오는 내내 여러 흉수를 만났으나 수행이 높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배에 탄 흉수족들은 수행이 낮아도 전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군요.”

“흉수족은 약간만 성취를 쌓아도 기본적으로 사람의 모습을 갖출 수 있습니다. 혈맥의 힘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쉽게 사람의 모습을 갖추는 흉수족일수록 혈맥 등급이나 실력이 낮다고 볼 수 있지요. 선박에 탄 이들은 하급 종족들입니다. 흉수족 뿐만 아니라 성역의 다른 종족들도 비슷하고요.”

석천공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마역에서는 혈맥을 상당히 중시하는 듯합니다.”

“성역은 실력을 중시해서 혈맥에 대한 구분도 엄격합니다. 약소 종족은 강대 종족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지요. 십환산맥과 같은 만황에서도 종족 간의 위계가 확실한데 십환대왕 중 유일하게 흑유대왕만이 비교적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아 많은 하급 종족들이 이리로 모여들지요.”

석천공의 어투에서 이런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흑유성 외곽에 도착했고 성벽에 일정 간격을 두고 뚫린 성문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부두가 마련되어 있고 많은 이들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흉수의 건물치고는 선계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일 만큼 좋아 보입니다.”

“십환대왕 중에서 흑유대왕만이 속세와 가장 친근해 외부와의 무역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흑유령 내의 고등 흉수족은 많지 않아도 전체적인 세력은 약하지 않지요.”

“십환대왕들 중 가장 견문이 넓은 왕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한립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흑유대왕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사라졌다.

“견문이 넓다라……. 뭐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지요.”

석천공은 입꼬리를 꿈틀하며 애매하게 답했다. 하지만 한립은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다.

그들은 성문으로 다가갔다.

무기를 든 흑갑(黑甲)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검문은 그리 엄격하지 않아 석천공이 나서서 병사와 몇 마디를 주고받고 검은 수정돌 몇 개를 건네주자 간단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립은 성안의 대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벽돌이 정갈하게 깔린 널따란 길은 아주 매끄러웠고, 마차를 끄는 검은 짐승들은 몸통은 말 같고 머리는 교룡 같아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요수 마차가 한립과 석천공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이제 겨우 원영기에 들어선 손발에 암홍색 비늘이 돋고 체구가 적은 어린 청년이 끄는 마차였다.

“선배님들, 흑유성은 처음이십니까? 제 마차를 고용해 주시면 하루 동안 극품 마석 1개에 모시겠습니다. 저는 노해라 합니다. 흑유성에서 나고 자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훤하지요.”

청년은 싹싹하게 말을 붙였다.

“마차? 성에서는 비행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냐?”

석천공이 근처의 마차가 한두 개가 아닌 것을 보고 물었다.

“흑유대왕께서 성 내의 비행을 금지하셨습니다. 성안에서 돌아다니시려면 걷거나 마차를 타야 하지요.”

노해가 사실대로 답했다.

“사야 할 물건이 있으니 네가 길을 잘 안내해 준다면 극품 마석 2개를 주마.”

석천공이 한립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노해를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최선을 다해 빠른 길로 모시겠습니다!”

노해는 무척 기뻐하면서 그들을 마차로 안내했다. 한립과 석천공이 뒤쪽에 오르자 노해가 요수 마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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