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화. 은우, 동우와의 전투
*
금서대왕의 거처.
휘황찬란한 궁전 안, 시녀가 바닥에 꿇어앉아 살덩이 거한의 종아리를 주무르다가 거한이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뱃살에 부딪혀 바닥을 굴렀다.
시녀들은 벌벌 떨면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철우 이 모자란 녀석은 겨우 이런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단 말인가! 여봐라, 어서 사람을 보내 짐승들이 아직 철우의 머리를 먹어 치우지 않았으면 가져오라 이르거라. 금칠해서 계단에 박아 지날 때마다 밟아줘야겠다!”
금서대왕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시종들이 물러간 뒤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금서대왕은 유리로 된 술병을 낚아채 바닥에 던졌다.
“대왕, 화를 거두시지요. 제가 가서 석천공의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
대전 옆쪽에서 금색 쇄자갑(鎖子甲)을 걸친 거한이 나와 허리를 굽혔다.
부리부리한 눈에 두꺼운 허리를 지녀 금서와 체구는 비슷했지만, 온몸이 근육으로 되어있고 검은 이빨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와 있었다.
금서대왕은 휘하의 맹장이 스스로 나서자 노기를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다른 쪽에서도 등에 검을 맨 새하얀 장포를 입은 사내가 날아들었다.
인족과 비슷한 체형을 지녔지만 코뼈 없이 콧구멍 두 개만 있어 뱀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철우도 목이 잘린 것을 보면 성주(聖主)의 막내아들이 만만치 않은 것 같구나. 석참풍에게 대가도 받았겠다, 어쩔 수 없지. 동우, 은우가 함께 다녀와야겠다. 최대한 살려서 잡아 오거라.”
금서대왕은 조용히 주판을 튕기다 입을 열었다.
“대왕,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큼지막한 동우가 뱀 머리 사내를 흘겨보며 말했다.
“내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금서대왕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동우가 긴장해 서둘러 답했다.
“그런데 어째서 생포해 오라 하십니까?”
무표정한 은우가 다가섰다.
“살려두어야 대황자와 거래할 수 있다. 철우까지 목숨을 잃었는데 가격을 높여 불러야 할 것 아니더냐.”
금서대왕은 옆에 엎드려 있던 뱀 꼬리 여인 중 하나를 끌어당겨 희롱했다.
“알겠습니다. 유념해서 처리하겠습니다.”
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보거라.”
“예!”
금서대왕의 명에 두 사람은 서둘러 대전을 떠났다.
* * *
며칠 뒤.
보라색 안개가 낀 십환산맥 밀림에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은빛 덩어리가 반짝였다.
은은하게 공간 파동이 느껴졌다.
은빛 덩어리 속에는 한립과 석천공이 중간에 새까맣게 탄 문어 형태의 괴물을 두고 마주 서 있었다.
백 개나 되던 문어 괴물의 다리는 대부분이 잘려있었고 나머지도 새까맣게 탄 상태였다.
“겨우 진선경 백수수(百須獸) 때문에 시간을 이리 소모할 줄은 몰랐습니다.”
석천공이 까맣게 탄 문어 다리를 뻥 차면서 중얼거렸다.
“본명 신통이 특이해 촉수가 지면에 닿으면 본체가 동서남북으로 자유롭게 이동했습니다. 수사의 공간영역이 아니었다면 처리하는데 더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고개를 저은 한립이 말했다.
“요핵도 확보했겠다. 그만 갑시다. 금서대왕의 심복을 죽였으니 우릴 놓치지 않으려 할 거예요.”
“이번에는 제 비차를 타고 고공으로 날아가 요수들의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립은 벽옥비차를 불러냈다.
그 말에 석천공은 고개를 끄덕여 영역을 거두고는 그와 함께 비차에 올라 하늘을 갈랐다.
그런데 비차는 백여 리를 가지 못해 멈춰 섰다.
전방에 금색 갑옷을 입은 우람한 사내와 하얀 장포를 입은 서늘한 인상의 사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릴 쫓는 자들인 것 같은데 병사들도 데리고 오지 않았군요.”
석천공이 빠르게 그들을 훑고 미간을 좁혔다.
한립이 보니 금갑(金甲) 거한은 태을 후기, 백포 사내는 태을경 최고봉이었다.
“철우를 죽인 게 누구냐?”
동우라 불렸던 금갑 거한이 먼저 입을 뗐다.
“그의 복수라도 하려는 것입니까?”
입을 비죽인 한립이 답했다.
“그저 그 멍청한 녀석이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픽 비웃음을 흘린 동우가 말했다.
“하하, 그리 답을 알고 싶다면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죽여 드릴 테니 직접 가서 물어보시지요.”
석천공이 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은 죽이면 안 된다는데 나는 원체 힘 조절이 안 돼서 말입니다. 은우 당신이 맡으세요. 나는 남는 녀석을 맡아 죽이든지 잡던지 할 테니.”
동우가 석천공 뒤의 한립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백포 사내 은우는 그저 등에 맨 장검을 뽑고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펑!
동우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허공을 박차고 사라졌다.
‘빠르다!’
한립은 순식간에 벽옥비차를 거두고 움직였다.
쿠쿵!
푸른빛과 검은빛이 충돌해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한립은 통째로 떨어지는 산과 맞닥뜨린 것처럼 겹겹이 몰려오는 충격파를 힘겹게 막아냈다.
처음에는 근력으로 버티다 두 팔이 저려와 7번째 파문이 도래했을 때는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슁!
막 공격하려던 석천공은 맑은 파공음과 함께 새하얀 검빛이 그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몸을 틀어 피하려 했으나 검빛에서 눈사태처럼 천지원기가 떨어져 내려 공간에 변형이 생기고 있었다.
강력한 흡입력을 느낀 석천공은 서둘러 수결을 맺어 공간장벽을 응결한 뒤에야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공간장벽에 분리된 바깥 공간은 검기들로 인해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석천공은 몸을 가누고 은색 장창을 불러내 은우를 향해 집어 던졌다. 그러나 은우는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한시도 석천공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편 동우와 한립은 허공에서 연달아 충돌했고 점점 대치시간이 길어졌다.
한립은 분명히 법칙파동을 느꼈으나 상대가 어떤 법칙을 익힌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충돌 직후, 떨어지면서 공격의 기회를 찾고 있는데 동우라 불리는 자는 무식하게 생겼어도 근접전에 능해 허점이 보이지 않고 속도가 몹시 빠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피하기만 하면 될 줄 아느냐?”
동우가 픽 실소를 하며 금색 갑옷 사이로 검은 기운을 실처럼 뻗어 몸을 감싸고 흐릿하게 변했다.
천지가 품고 있던 마기가 동우를 둘러싼 검은 안개 속으로 흡수되더니 삽시간에 한립까지 덮치려 들었다.
이에 한립이 정면에서 날아든 주먹을 팔꿈치를 들어 방어하려는데, 왼쪽에서 다른 주먹이 날아들었다.
퍽!
그는 다른 팔을 들어 올리기 전에 가슴에 묵직한 타격이 느껴져 신음을 삼키며 튕겨 나가고 말았다.
퍼퍼퍼퍽!
한립이 서둘러 몸의 균형을 잡으려는데 검은 안개가 따라붙으면서 연달아 주먹들이 그의 태양혈과 뒤통수, 가슴, 허리 등을 가격했다.
그는 선령력 흐름이 원활하지 않자 깜짝 놀라며 서둘러 진령혈맥을 발동해 현무 갑옷을 걸쳤다.
갑옷 덕분에 폭우처럼 쏟아지는 주먹들이 이전처럼 견디기 어렵지는 않았다.
두 눈에 보랏빛을 일으킨 한립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검은 안개를 돌아보았다.
“…….”
놀랍게도 검은 안개 속에 동우는 보이지 않고 새까만 주먹들만 수천 개가 응결되어 그를 노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모종의 안개 법칙이란 말인가?’
한립은 속으로 진언화륜경 구절을 중얼거려 등 뒤로 금색 고리를 띄웠다.
마기 안개 속에서 끊임없이 기습을 가하던 주먹들이 진언보륜의 금빛을 받아 느려졌다.
팟.
입꼬리를 끌어올린 한립이 손을 털어 금빛 청죽봉운검을 불러냈다.
장검을 뻗은 그는 몸을 날렸고 벽사신뢰와 완골금뢰가 융합되어 탄생한 뇌전법칙의 힘은 이전보다 강력했다.
콰르릉거리는 소리가 쉼 없이 들려오고 굵직한 금빛 뇌전들이 검은 안개를 갈랐다.
실체처럼 보였던 주먹들이 금색 뇌전이 지나가고는 살이 갈라지고 피가 흐르는 대신 연기로 변해 검은 안개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립은 두 눈의 보랏빛을 더욱 키워 사방에 검은 마기가 없는 곳이 없고 진언보륜에서 발산된 금빛 광선에 느릿하게 변해있는 것을 확인했다.
“벨 수 없다면 태워주마.”
씩 미소 짓는 그의 어깨에 은염소인이 나타났다.
은염소인은 즉시 전신에 화염을 일으키고 거대한 은색 불새로 변해서 검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르륵.
진언보륜을 거둔 한립은 불새의 은색 화염이 검은 안개 속에서 퍼져나가게 두었다.
은색 불길에 검은 안개가 줄어들고 곧 비명소리와 함께 수축한 검은 안개 중심에서 동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이 새까맣게 타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게 뭐냐!”
주위의 검은 안개들이 실처럼 그의 상처로 몰려들어 정염불새에 의한 부상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이에 한립은 청죽봉운검을 뻗으며 다른 손으로 주변을 훑었다.
또 다른 17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이 폭발적으로 날아가 푸른 검흔을 남기고 인근에 있던 동우를 감쌌다.
은염불새도 두 눈에 불길을 일으키고 뒤쪽에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파아아앗.
노기가 어린 동우는 기합을 넣으며 마기 영역을 발산해 한립과 그의 검빛들을 가두었다.
그러자 비검과 검빛들은 검은 영역을 찌르고 겹겹이 들어찬 마기 때문에 동시에 통제를 잃었다.
마기가 휘감은 검빛은 석화(石化)가 되듯 회백색으로 변해 영력이 유실되고 있었고 17자루의 청죽봉운검 본체도 마기 속에서 금빛 뇌전을 번득거렸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검은 안개가 구렁이들처럼 꿈틀거리며 한립을 포위해왔다.
짙은 안개는 진흙이 마르는 것처럼 회백색으로 변해 한립의 윤곽을 타고 굳어갔다.
정염불새가 그걸 보고 불현듯 화염을 터트리면서 한립 쪽으로 돌진했다.
짝!
동우는 비웃음을 흘리면서 수결을 맺은 두 손을 합장했다.
그러자 영역 안에서 검은 머리가 일어나 거대 손바닥으로 변해 정염불새를 가운데에 놓고 점점 가까워졌다.
이어서 동우가 날린 금색 부적이 검은 모래 손바닥에 붙어 길쭉한 문양을 이루고, 살아 있는 생물처럼 두 손바닥을 감아 하나로 뭉쳤다.
정염불새가 발버둥 쳤지만 두 손바닥에 길쭉한 문양으로 인한 봉인까지 있어 열기는 갇히고 말았다.
한편 석천공은 은우가 방출한 강대한 검기에 연달아 밀려나느라 벌써 한립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곁눈질로 한립의 상황을 보고는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볼 것 없습니다. 일행이 시간공법을 익혔다고 하나 동우의 적수는 못될 겁니다. 대왕께서 당신을 살려서 잡아 오라고 했고 큰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얌전히 가시겠다면 고통 없이 데려가겠으나 반항한다면 사지를 잘라 몸통에 칼집을 내서라도 끌고 가겠습니다.”
은우는 잠시 공격을 늦추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역시 석참풍 짓이었어……. 그가 무엇을 걸고 내 목숨을 원한 것입니까? 제가 세 배의 대가를 치를 테니 저희를 보내 주시지요, 어떻습니까?”
석천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래할 생각이면 돌아가 대왕과 이야기하시지요. 난 그저 사람을 죽이는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은우는 냉랭하게 답했다.
“그럼 일단 동우 수사에게 멈추라 하시고 다 같이 대왕께 가는 것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석천공은 상의를 하는 척하며 소매 속에서 손바닥을 뒤집어 갈라진 은색 비파를 꺼내 들었다.
“끝내 어리석은 짓을 하십니다!”
흠칫 놀란 은우가 소리치고 손에 든 장검에서 수백 줄기의 새하얀 검빛을 뿜어 거대한 검빛의 산을 이루었다.
가슴이 서늘해진 석천공이 달아나려 했으나 두 무릎에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지고 송곳과 같은 투명한 검기가 어느새 박혀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순간의 지체가 그의 퇴로를 막았다.
마음을 굳게 다잡은 석천공은 다시 제대로 라타비파를 꺼내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디링!
거대한 은색 파동이 허공을 왜곡하면서 날아가 검빛의 산을 막았다.
쿠쿠쿠쿵.
라타비파가 발생시킨 공간의 힘이 검빛의 산과 충돌해 강력한 파랑을 주위로 뿌리고 있었으나 검빛은 겨우 가장 바깥의 세 겹이 흩어졌을 뿐이었다.
“…….”
석천공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려는데 멀리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와 은우의 눈길을 끌었다.
검은 안개로 덮여 있는 회백색 조각상 같던 한립이 터지면서 청죽봉운검 한 자루와 푸른 호리병박을 들고 동우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동우는 잠시 놀라다가 그를 향해 두 주먹을 뻗었다.
두 주먹 끝에서 마기가 분출되어 겹겹이 주먹 허상을 이루고 공간을 비틀만 한 마기의 장벽을 펼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