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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90화 (1,647/2,000)

1890화. 제지

*

과일을 찬찬히 살펴본 금서대왕의 얼굴에 희색이 어렸다.

“여봐라, 철우를 들라하라.”

금원도과를 옥함 속에 소중히 넣어둔 그가 소리를 높였다.

“예!”

금색 의복을 걸친 시종이 답하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잠시 후, 어둑한 녹색 빛줄기가 대전 밖에 날아들어 왜소한 체구의 녹색 장포를 입은 사내로 변했다.

키가 오척 밖에 안 되는 녹색 피부를 지닌 사내는 덜 자란 소년 같았고 얼굴도 앳되었지만 몸의 근육만큼은 발달되어 있어 위화감이 느껴졌다

“철우 대인!”

대전 밖의 병사가 두려운 얼굴로 예를 올렸다. 철우는 병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왕을 뵙습니다.”

왜소한 사내가 바닥에 엎드렸다. 체구와 달리 목소리는 아주 굵었다.

“왔구나! 너와 동우, 은우는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또 그러는구나. 어서 일어나거라.”

금서대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그를 일으켜 세워주며 온화하게 말했다.

“왕께 신하가 예를 올리는 것은 당연한 법도입니다.”

“하아, 마음대로 하거라.”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요?”

“병사들을 데리고 영지를 수색해 이들을 찾아야겠다. 이 자의 머리와 지니고 있는 보물을 갖고 돌아오면 된다.”

금서대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튕겨 석천공과 한립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종족이군요?”

왜소한 사내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래. 철우 네가 이종족들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몸의 다른 부분은 몰라도 머리만큼은 온전하게 갖고 돌아와야 한다.”

“맡겨주십시오.”

“이 자는 금선경 최고봉의 수행을 지녔고 그 옆의 인물은 아마 호위겠지. 금서령 내의 모든 인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줄 것이니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한달 내로 저 자의 머리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가보거라.”

철우가 다시 예를 올리고 대전을 빠져나가 녹색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흥, 내가 누군줄 알고 직접 움직이라는 것이야. 다른 동네 늙은이들이 알면 얼마나 비웃을까.”

철우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금서대왕이 혼잣말을 늘어놓았다.

* * *

십환산맥의 어둑한 숲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날아갔다.

밀집한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천지영기도 아니고 마기도 아닌 일종의 특수한 음기였다.

한립과 석천공은 은신술을 펼쳐 소리나 파동을 남기지 않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십환산맥의 환경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한립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십여 일 동안 이동하면서 가끔 흉수의 습격을 받았을 뿐 위험에 처할 일은 없었다.

“성역은 진선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지하 기맥이 혼잡해서 십환산맥처럼 천지영기, 마기 그리고 다른 각종 원기들이 교차하는 곳이 있습니다. 지금은 신기해도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석천공의 말에 한립이 뭐라 말하려다 둔광을 멈추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걸 본 석천공이 따라 멈춰서 한립의 시선을 따라 아래쪽 숲을 내려다 보았다.

“아닙니다.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한립은 의아한 눈으로 자세히 숲을 살피고 출발했다.

두 사람이 지나가자 한립이 쳐다보았던 곳에 커다란 나뭇잎에 가려져 있던 검은 과실이 흔들렸다.

새까맣던 과실이 갈라지면서 눈코입이 드러나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주시했다.

이때 아주 멀리서 거대한 먹구름이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백여 마리의 반인반수들과 그들을 이끄는 철우가 있었다.

철우가 서늘한 얼굴에 검푸른 흉살기를 드리우고 있자 아무도 그에게 함부로 다가서지 못했다.

“무슨 소식이 있느냐?”

갑자기 철우가 입을 열었다.

금서대왕 앞에서 한 달 내로 머리를 잘라가겠다고 말해두었는데 보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전력을 다해 수색하고 있으나 그자들이 교활하게 흔적을 남기지 않아 아직까지 행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색 장포를 입은 사내 하나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서서 보고했다.

“못난 것!”

철우가 호되게 질책하며 녹색 뱀 허상으로 변해 섬뜩한 눈빛으로 금포 사내를 노려보았다.

“자, 잘못했습니다! 더 열심히 수색하겠습니다!”

뱀 허상에 겁을 먹은 금포 사내가 덜덜 떨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썩 꺼지거라! 3일 내로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죽을 줄 알아!”

철우가 소리를 지르자 금포 사내가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일어나 물러났다.

“철우 대인, 찾았습니다!”

그때 가부좌를 틀고 있던 검은 얼굴의 거한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검은 나무토막을 조각해 만든 나무사람을 들고 있었다.

“어디냐?”

철우가 반가운 마음에 급히 물었다.

“흑린수해(黑鱗樹海)입니다!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북쪽으로 가는 중이라니 십환산맥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구나. 우리가 먼저 길을 막을 수 있겠어!”

철우가 수결을 맺어 먹구름의 방향을 틀었다.

* * *

계속해서 날아가던 한립과 석천공은 까만 나무들이 줄어들고 녹색 산맥이 펼쳐진 것을 보았다.

따듯한 햇살이 비춰서인지 온도도 오르고 불어오는 바람도 훨씬 맑았다. 석천공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뒤편의 검은 숲이 주는 음산한 느낌은 마족인 그도 불편하게 했다.

“가죠, 이 앞이…….”

“조심!”

석천공이 입을 여는데 한립이 느닷없이 그의 목덜미 옷깃을 잡아끌며 뒤로 물러났다.

석천공이 서 있던 자리에 굵은 녹색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 키보다 서너 배는 큰 화살에는 뱀 문양이 새겨져 있고 수많은 독뱀들이쉭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이 끌어당겨 화살을 피한 석천공은 기이한 냄새를 맡고는 얼굴에 옅은 녹색 빛이 어렸다.

“독!”

화들짝 놀란 그는 하얀 단약 두 개를 꺼내 삼키고 하얀빛을 일으켰다.

“괜찮습니까?”

한립도 독의 기운을 맡았지만 예전에 기이한 독에 대항하는 만독혼원신을 익힌 데다 태을옥체를 지녀 아무렇지도 않았다.

“괜찮습니다.”

석천공이 고개를 흔들었다.

“누구냐!”

그의 안부를 확인한 한립이 전방 모처를 향해 침착하게 외쳤다.

그러자 누군가 놀라는 소리가 들리고 검은 구름에 선 백여 명의 반인반수와 철우가 나타났다.

“독신전(毒神箭)을 파하다니 실력이 없지는 않구나.”

철우는 한립을 힐끗 보고 손짓해 기다란 녹색 화살을 소매 속으로 거두었다.

한립과 석천공이 그들을 보고 안색이 달라졌다.

“어느 대왕 휘하의 분이십니까? 저희는 실수로 십환산맥에 들어섰을 뿐이지 십환대왕께 적의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마원석 20만 개를 바칠 터이니 저희를 보내주시지요.”

석천공이 앞으로 나서서 공수하며 말했다.

“어느 대왕이 다스리는 구역인지도 모르고 우리 십환산맥에 들어와? 죽어 마땅한 놈들!”

“끌끌, 마원석 20만 개로 우릴 매수하려 해?”

“퉷!”

“네놈들 머리는 남기고 몸만 보내주는 것은 어떠하냐!”

검은 구름 위에서 우악스러운 웃음소리와 욕설이 쏟아져 한립과 석천공의 표정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때 철우가 손을 들어 수하들을 조용히 시키고 냉랭히 물었다.

“너희는 산맥 바깥의 이족인이냐?”

“그렇습니다만…….”

“십환산맥에 침입한 이족인은 전부 죽어 마땅하다. 저들을 죽이되 머리는 남겨라!”

석천공이 제대로 답을 하기 전에 철우가 원한 어린 얼굴로 명을 내렸다.

“예!”

그 말에 수하들이 흉악한 웃음을 흘리며 답하고는 각종 병기를 이용해 한립과 석천공을 공격했다.

금선 수행을 지닌 수하들만 열댓 명은 되었고, 가장 앞에서 달려든 은색 머리카락에 파란 눈을 지닌 외뿔 거한과 마른 나뭇가지처럼 빼빼 마른 붉은 머리 노인 그리고 날개가 달린 금발의 여인은 태을경 초기였다.

이 정도면 평범한 태을경 인족과 금선 최고봉 마족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전력이었다.

외뿔 거한이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눈부신 녹색빛을 일으켜 구름을 형성했다.

화륵!

녹색 구름이 불이 붙은 기름처럼 불덩이로 변해 법칙 파동을 폭발했다.

홍발 노인이 주문을 외며 고개를 흔들자 집채만 한 호랑이 머리 허상 3개가 나타나 흐릿한 핏빛을 남기고 사라졌다.

한립과 석천공 앞에 호랑이 허상 셋이 나타나 새빨간 입을 쩍 벌려 모골이 송연한 법칙의 힘을 발산했다.

금발 여인이 날개를 펄럭이자 휘황찬란한 금빛이 치솟아 비처럼 쏟아졌다. 떨어져 내리는 금색 깃털 하나하나에 매서운 법칙의 힘이 실려 있었다.

태을경 수사들의 협공에 휘하의 맹수들까지 공격하니 주변 백 리의 마기가 꿈틀거렸다.

“제가 맡지요.”

안색이 달라진 석천공이 맞서 싸우려는데 한립이 그 앞을 번득 막아서서 열손가락을 튕겼다.

쉬쉬쉬쉭.

열댓 개의 푸른 빛이 18자루의 청죽봉운검으로 변해 소매를 빠져나갔다.

태을경에 이른 한립은 선령력이 부쩍 늘어 한 번에 조종할 수 있는 청죽봉운검의 수도 늘어났다.

진지한 얼굴로 검결을 맺은 한립의 조종에 18자루의 청죽봉운검이 둘로 나뉘어 6자루는 주위를 맴돌고 나머지 12자루는 날아갔다.

12자루의 검들은 바람소리를 내며 푸른 검 그림자들로 갈라져 천여 개의 검빛이 바다를 이루고 밀려드는 반인반수들을 향해 쇄도했다.

“검진…….”

철우가 눈썹을 꿈틀했다.

외뿔 거한 등 태을경 수하들은 검진이 위력적인 것을 느꼈지만 법칙의 힘이 느껴지지 않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동시에 불 구름과 핏빛 호랑이 머리 그리고 금색 깃털들을 움직여 삼색 주먹처럼 푸른 검진을 공격했다.

금선, 진선급 수하들도 뒤따라 푸른 검빛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콰르릉!

절반 이상의 검기가 깨져나가고 검진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한립의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치지지직.

그가 돌연 검결을 변형하자 푸른 검기가 갑자기 굵직한 금색 검기로 변하면서 강렬한 뇌전법칙 파동을 발산했다.

금색 검기들은 용이 똬리를 트는 것처럼 몰려들어 모종의 진법을 이루고 허공을 쩌렁쩌렁 울릴 만 한 울음소리를 냈다.

웅웅웅웅웅!

날카로운 금빛 검기들이 교차해 외뿔 거한 등 세 명의 공격을 파죽지세로 부서트렸다.

검진의 힘도 대단했지만 금빛 뇌전과 뇌전법칙이 마기와 상극이라 그 효과는 더 뛰어났다.

그 안에 휩쓸린 금선, 진선급 수하들은 전부 검진에 가로 막혔고, 외뿔 거한 등도 겁을 먹고 물러나려 했으나 늦고 말았다.

금색 검기의 바다가 그들을 덮쳤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 철우가 손을 쓰려 했을 때는 이미 그들은 금빛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멈춰!”

노호성을 터트린 철우가 검은 구름 위에서 몸을 날렸다. 그가 데리고 온 수하들은 금서령의 중견 역량이었다.

그들이 몰살당하면 한립과 석천공의 머리를 들고 돌아가더라도 면목이 없을 터였다.

피피핑!

그는 오른손을 뻗어 거대한 녹색 수정궁을 꺼내 활시위에 걸린 아홉 개의 녹색 독화살을 발사했다.

녹색 화살들이 여섯 개의 유성처럼 날아가며 허공에 기다란 검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때 전방의 금빛 속에서 비검 여섯 자루가 눈부신 금색 뇌전을 휘감고 솟아올라 커다란 연꽃을 이루고 화살들 앞을 막아섰다.

콰쾅!

거대한 충돌이 있고 주변 허공에 공간균열들이 발생했다.

금색 연꽃이 폭발해 여섯 자루 비검이 흩어진 대신 아홉 줄기 유성도 멈춰서 화살들로 돌아갔다.

그리고 철우 앞 허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며 수많은 은색 음파들이 날아들었다.

무형의 힘이 주위에서 밀려들어 뒤로 밀려난 철우 앞에 석천공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은색 비파를 들고 있었다.

철우의 눈빛이 서늘해졌을 때 금색 검기의 파도가 강력한 검기들을 그 안에 갇힌 수하들에게 발사했다.

안색이 급변한 외뿔 거한은 푸른 깃발 두 개를 뿜어내 한염(寒焰) 법칙 파동을 일으켰다.

깃발들이 활짝 펴지면서 두꺼운 푸른 불의 보호막을 이뤄 그를 보호했다.

홍발 노인은 입에서 혈홍색 보탑을 불러내 그 안의 빛의 실들로 몸을 감쌌고 금발 여인은 두꺼운 금색 갑옷을 불러내 입었다.

마보를 불러낸 그들의 반응은 빨랐지만 다른 수하들은 그럴 능력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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