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화. 대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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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석천공이 그에게 이 사실을 털어 놓는 이유였다.
“제 짐작으로는 제가 비술로 라타비파를 연화시킨 후에 부친께서 그걸 감지하시고 공간신통으로 우릴 데리고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한립이 말을 이으려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손을 저었다.
은색 빛의 문이 열리고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석천공과 해 도인도 차례로 그를 따라 화지 동천의 죽루 안으로 향했다.
한립은 죽루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혼을 안아들고 몸을 살폈다. 잠시 후 금색 단약을 꺼내 입에 넣어주었지만 제혼은 깨어나지 않았다.
“려 형,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부상도 심하지 않고 혼백이 입은 손상도 그리 크지 않은데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단전에 무슨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보셨습니까?”
석천공의 말에 한립도 단전을 살펴보았다.
“단전에 본원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상한 일이군요.”
“그렇다면 그게 문제가 되어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큰 듯합니다.”
한립은 석천공의 조언에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 일을 되짚어 보고 흠칫 놀랐다. 제혼이 기절하기 전 나타났던 고리와 관계가 있는 듯했다.
“석 형의 언질이 없었으면 원인을 찾지 못할 뻔했습니다.”
“아닙니다, 해결책은 있겠습니까?”
“아니요,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 어찌 해야할지 모르겠군요. 석 형, 방법이 없겠습니까?”
“사람을 치료하는 일에 제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저 저와 함께 성도 야양성(夜陽城)으로 가시면 일족의 대제사에게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개를 젓는 석천공을 보고 한립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야양성에 함께 가지 않으시면 앞으로 어쩔 작정이셨습니까?”
“원래는 선계로 돌아온 줄 알았는데, 마역에 온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앞으로 어찌 해야할지 고민이 필요할 듯합니다.”
한립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이곳은 성역 남방의 ‘십환산맥(十患山脈)’이라 불리는 황무지입니다. 이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산맥에 대라급의 흉악한 짐승 열 마리가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고요. 려 형께서 아직 계획이 없으시다면 일단 이곳을 떠나고 봅시다.”
“대라경의 흉수가 열 마리나 있단 말입니까! 석 수사의 말씀대로 어서 떠나야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곳의 물정을 모르니 어디로 가면 좋을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석천공의 솔직한 말에 한립이 깜짝 놀라 질문했다.
“이곳 흉수들은 침입자에게 무척 적대적이라 대라경 존재에게 발각당하면 위험해 질겁니다. 북쪽으로 길을 잡고 십환산맥부터 벗어나지요. 북쪽으로 짐승들의 침입을 막는 웅거성(雄踞城) 있고, 거기에 대라경 수사가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웅거성 성주부를 통하든 아니면 성 내의 광원재 분점을 통하든 빠르게 성도 야양성으로 갈 수 있을 거예요.”
석천공의 설명에 한립은 일리가 있다고 여겨 알겠다고 답했다.
“바로 출발합시다. 잠시 흉수들이 물러났지만 언제 다시 몰려들지 모릅니다.”
희색을 드러낸 석천공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 전에 잠시 묻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제가 태을경에 이르는 동안 호법을 서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이렇게까지 저를 돕는 이유가 의문이더군요. 하실 말씀이 있다면 미리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립은 석천공을 직시했다.
서로 동행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상대의 성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가 고생해서 그를 도와준 데에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하, 정말 려 수사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니까요! 확실히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십환산맥은 굉장히 위험해서 제 실력으로는 안전하게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고강한 수행을 지닌 려 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테지요.”
석천공은 부끄러운 낯으로 말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서로 도우며 벗어납시다.”
태을경에 이른 한립은 시간법칙의 여러 보물들까지 지녀서 대라급 존재가 나타나도 목숨을 부지할 자신은 있었다.
정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석천공을 화지공간에 숨기고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광원재 본부가 야양성 안에 있습니다. 진선계 선역들로 통하는 공간의 문이 있으니 도착하는 대로 려 수사가 흑토선역으로 돌아갈 수 있게 안배하지요.”
“흑토선역으로 돌아가는 일은 급하지 않으나, 광원재 본부에 이르면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한립은 코끝을 긁적였다.
마역이라 하나 천지영기가 그럭저럭 짙었고, 천정의 세력범위에서 벗어나 그가 수련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 회계에서 말씀하셨던 그 일이군요.”
“맞습니다. 광원재의 정보력을 동원해 비승한 수사를 한 명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이게 그녀의 용모가 담긴 초상입니다.”
한립이 건넨 푸른 옥패에 떠오른 보라색 장포를 걸친 여인의 모습은 절세미인 자령이었다.
“이 분이 려 수사의 반려십니까? 미모가 대단하십니다!”
옥패를 받아든 석천공이 눈을 반짝이며 칭찬했다.
“이름은 자령으로 하계의 성족 수사입니다. 이미 비승을 했을 수 있으니 알아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계의 성족이었다면 일이 훨씬 수월할 겁니다. 성족이 비승을 하면 성역으로 오기 마련이고 성역의 비승대는 제 셋째 형님이 장관하고 있으니까요. 형님과 가까운 사이라 부탁을 드리면 금방 비승 여수사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자신만만만 석천공의 대답에 한립도 마음이 놓였다.
“회계에서 이미 약속한 일인데 당연하지요! 저를 데리고 십환산맥을 벗어나 주실 려 수사에게 제가 인사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화지공간을 벗어나 조심스럽게 북쪽으로 출발했다.
* * *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황금색 기암괴석으로 뒤덮인 산맥.
산맥 중심의 만장 산봉우리는 작은 흠집하나 없이 매끈한 모습으로 금빛이 만발하고 있었다.
그 위에 세워진 화려한 황금 궁전은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세속적인 느낌을 주었다.
십환산맥은 광활하게 뻗어 있었고 십환대왕들은 각자 드넓은 영역을 통치하며 수많은 강력한 마물들을 수하로 두어 외부의 마족도 그들을 어쩌지 못했다.
이곳이 바로 십환 중 금서대왕(金犀大王)의 거처였다.
궁전 안의 호위나 시종들은 전부 금색 갑옷과 의복을 입고 돌아다녔고 외부의 정문 바깥에도 갑옷 입은 병사들이 얼굴을 반만 내놓고 서있었다.
“갑옷이 너무 무거워서 숨도 쉬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걸 걸치지 않으면 정금망(晶金芒)에 부상을 당해 보초를 서지 못할 테지만요.”
좌측에서 서있던 병사가 몸을 비틀며 불평을 했다.
“파 형은 이곳으로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익숙해지면 그런대로 버틸만 하고 보수도 다른 곳보다 훨씬 후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런데, 금서대왕의 취향이 참 특이하지 않습니까…….”
“쉿! 금서대왕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게 남들이 뒤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지난 번에 시종 하나가 비슷한 말을 했다가 뒷산의 열일주(烈日柱)라는 기둥에 묶여서 산 채로 타죽었으니 말조심하십시오!”
파 씨 성을 지닌 병사가 입을 비죽이는데 우측의 병사가 말을 끊었다.
“추, 충고 고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파 씨 병사가 서둘러 인사를 하고 누가 들은 사람이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 *
궁전 깊은 곳의 화려한 대전 안에 살점을 뭉쳐 놓은 것 같은 거한이 불룩하게 나온 배를 내밀고 금색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눈은 가늘고 긴데다 코는 평평한데 입은 기이하게 커 매우 추해보였다. 게다가 피부에는 어둑한 금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양 옆에 꿇어 앉아 거한의 몸을 문지르는 시녀들도 전부 뱀꼬리를 늘어트리고 선기로 보이는 금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시녀들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압을 하고 있었다.
“그래, 거기다 거기. 더 힘을 써 보아라…….”
눈을 반쯤 감은 거한의 소리에 여인들은 더욱 힘을 주었다.
그때 돌연 거한이 몸을 일으켰다.
“물러나 보아라.”
큰 몸집에 비해 가느다란 목소리를 지니고 있어 누가 들었다면 웃음이 터져 나왔을 테지만 여인들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살덩이 거한은 보라색 원반을 꺼내들고 법결을 던져 넣었다.
웅.
원반에서 흘러나온 빛이 진법을 이루어 그 위로 서른일고여덟 정도로 보이는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백발을 가지런히 올려 묶은 상대는 영준하고 귀품이 넘쳤고 미간의 은은한 보라색 표식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이야, 대황자 전하 아니십니까? 바쁘신 분이 만황의 저에게까지 연락을 다 주셨습니다.”
“농담 마시지요, 금서 수사. 수사의 실력에 대해서는 늘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흑유와 전투를 벌이시느라 원기를 상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휴식을 취하는데 방해가 될까 연락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뵈니 회복하신 것 같군요. 축하할 일입니다.”
보라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하하 웃음 지었다. 살덩이 거한은 바로 십환 중 한 명인 대라경 수행의 금서대왕이었다.
“대황자, 저를 비웃으시려고 친히 연락을 주신 것은 아닐 테지요?”
그 웃음소리에 금서대왕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오해십니다. 지난 번 일전에서 금서 수사가 밀린 것은 마라금신(魔羅金身)을 완성하지 못해서가 아닙니까. 최근 우연히 금원도과(金元道果)를 몇 개 찾아내서 수사에게 도움이 될까하여 연락한 겁니다.”
“금원도과! 그게 정말입니까?”
자포 사내의말에 금서대왕이 벌떡 일어나 다급히 물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하시지요.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신 겁니까?”
상대가 웃으면서도 말이 없자 금서대왕은 표정을 바로 했다.
“이래서 똑똑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시간 낭비가 없다고 했던가요? 금서 수사, 저를 위해 한 가지 일을 해주시면 금원도과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한 사람을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대황자라 불린 자포 사내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오, 그게 누군데요?”
금서대왕은 예상했다는 듯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그러자 원반 위 자포사내 허상이 손을 저어 보랏빛을 뿜었다.
보라색 빛의 장막 위로 구불구불한 백발을 지닌 석천공과 평범한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평범한 사내, 한립이 나타났다.
“이 자는…….”
금서대왕은 석천공을 바로 알아보았다.
“맞습니다, 13황자 석천공이 십환산맥에 있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마침 금서령내에 말이지요. 그의 머리와 은색 비파를 가져와 주시면 금원도과 두 개를 드리겠습니다.”
자포 사내의 말에 금서대왕은 고민에 휩싸였다.
“대황자 전하, 무척 끌리는 제안입니다만 석천공은 성주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성주의 분노를 감당할 처지가 못되니 다른 방법을 강구하시지요.”
“부친께서는 폐관 중이시고 우리 형제들끼리 알아서 계승 문제를 해결하라 명하셨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으셨겠지요.”
“오, 그렇다면 해볼 만도 하겠습니다만 석천공 휘하의 세력이 적지 않아 그를 죽이면 여러 강적들이 생길 겁니다.”
“하하하, 당당한 금서대왕께서 남들에게 밉보일까 몸을 사리십니까?”
“격장지계를 쓰려하셔도 제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저를 움직이게 하시려면 금원도과 2개를 계약금으로 주시고 그 자의 머리와 비파를 가져왔을 때 보상으로 금원도과 2개를 더 주셔야 할 겁니다.”
금서대왕은 원하는 바를 제시하며 씩 웃음 지었다.
“금원도과가 얼마나 진귀한지 아시면서 너무 욕심을 부리십니다.”
“욕심이라니요? 금원도과가 아무리 귀해도 대황자께서 도모하시는 일에 비하면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성주의 총애를 받는 아우를 제거하는 대가가 금원도과 4개라면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대황자 전하께 남는 장사입니다.”
“3개,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일이 끝나는 대로 드리지요.”
“일단 하나라도 주셔야 손을 쓰겠습니다.”
“좋습니다. 허나 실패한다면 계약금으로 주었던 금원도과를 돌려받는 것은 물론 이자까지 거둘 겁니다. 아, 그리고 석천공 곁의 사내는 태을경 초기의 수행을 지녔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자포 사내가 한립을 가리켰다.
“흐흐, 금선경의 석천공이 태을경 초기 조력자를 데리고 다닌다 한들 제가 못 건들 이유가 됩니까? 과실이나 준비해 두시고 좋은 소식이나 기다리시지요.”
금서대왕은 무척 가벼운 일이라는 듯 장담했다.
“좋습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지요.”
자포 사내가 이 말을 남기고 사라진 뒤 원반 위로 은색 주술문자가 몰려들어 진법을 이루었다.
웅웅!
강렬한 빛을 발한 은색 진법에서 주먹 크기의 동그란 금색 과일이 전송되었다. 손톱크기의 무늬들이 있는 동그란 과일에서 금속성 법칙파동이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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