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화. 태을경
*
골짜기 입구에는 크기는 다르지만 여러 가지 모습을 한 짐승들이 비늘 갑옷을 두르거나 머리의 날카로운 뿔을 달고 석천공과 해도인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 중 작고 약해 보이는 짐승들도 그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리 기운이 강하지 않아 잠시 막을 수는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대로는 오래버틸 수 없다는 것인데…….”
석천공이 쏟아져 내리는 흉흉한 짐승들의 물결에 중얼거리다 양손을 움직였다. 여러 진법 깃발과 원반들이 맹수들이 달려드는 길목으로 떨어져 진법을 이루었다.
화앗!
은백색 빛이 바닥에서 치솟아 산만한 높이의 거대 공간장벽을 이루고 산골짜기 내부와 통로를 가로막았다.
쿵!
새까만 원숭이가 제일 먼저 은색 장벽에 충돌했다. 빛의 장벽은 찬란한 빛을 일으켜 꿈쩍도 않고 짐승을 막아냈다.
진선 초기에 맞먹는 기운을 지닌 새까만 원숭이는 화가 나는지 기다란 두 팔을 붕붕 돌리면서 은색 장벽을 난타했다.
이어서 푸른 구렁이와 보라색 거미도 합류해서 맹렬하게 공격했지만 장벽은 태산이라도 되는 듯 부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숨을 내쉰 석천공이 뜻밖에도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이제야 돌아왔구나. 이제 선원석에 기대 살지 않아도 되겠어.”
수결을 맺은 그가 운기조식을 시작하자 해 도인이 살짝 마음을 놓고 참정도로 허리춤의 호리병박을 끌러냈다.
호리병박을 기울인 그가 주술을 왼 뒤 밑바닥을 쳤다.
우수수수.
입구에서 빛의 회오리가 몰아치며 호리병박이 노란빛 속에서 콩알들을 쏟아냈다. 바닥으로 떨어진 콩알들은 폭음을 내며 번쩍번쩍 도병 병사들로 변했다.
뇌전 문양이 새겨진 예스럽고 소박한 갑옷을 입은 수백의 도병들이 십여 개의 부대로 나뉘어 병장기를 들고 속세의 왕의 군대라도 되는 듯 질서정연하게 골짜기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도병은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규칙적으로 내딛는 발걸음 소리가 쿵쿵 골짜기를 울렸다.
짐승들의 홍수 속에서 여러 명이 목표물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식으로 엇비슷한 전력의 흉수들을 상대로 승기를 잡고 있었다.
공중에 떠오른 해 도인은 골짜기 멀리 수풀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자욱한 안개가 출렁이는 게 아직도 대량의 짐승들이 몰려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잠시 옛기억을 떠올려 보던 그가 곧 평정을 되찾고 한립을 돌아보았다.
한립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찬란하게 빛나는 몸으로 주변의 천지원기들이 응결한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방대한 영력 파동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얀 소용돌이와 하늘의 검은 먹구름이 연결되어 그와 하늘이 맞닿아 있는 것 듯 보였다.
영력에 의해 자연스레 고공으로 떠오른 한립의 몸에서 선규들이 별처럼 빛나고 피부가 고운 옥처럼 투명해져 은은한 금빛 광택이 나는 골격이 드러났다.
순간, 눈을 뜬 그는 길게 탁한 기운을 내뿜어 주변의 하얀 안개 속에 태워버렸다.
하얀 구름 속에서 수많은 불씨들이 생겨난 듯 탁한 기운과 같이 그의 몸을 달궈 정련하고 있었다.
하얀 불씨들 위의 검은 먹구름도 이때부터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장관을 이루었다.
태을옥선은 말 그대로 결점 없이 아름다운 옥같은 선체를 일컫는 것이었다.
금선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힘을 지니게 되고 의식과 혼백도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 천지와 통하고, 대도와 어우러지며 법칙과 조화를 이루어 더 쉽게 법칙의 힘을 지니고 깨우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태을옥선의 육신과 혼백의 정결함의 정도는 앞으로 법칙을 깨우치거나 대도를 이루기 위해 수련하는 데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한립이 끌어들은 천지영기들이 증발하는 듯한 현상을 보이는 것은 이전에 뇌전 연못에서 몸을 씻어낸 덕이 컸다.
석천공은 놀라운 천기현상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런 웅장한 천기현상을 일으키다니 려 수사 답구나.”
석천공은 감탄하며 고개를 돌려 은색 빛의 장벽 쪽을 훑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보라색 거미들이 입에서 오색 거미줄을 뿜어 이끼처럼 장벽을 덮고 그 위를 열심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크오오-!
새까만 원숭이도 가장 몸집이 큰 거미가 펼쳐 놓은 거미줄을 잡고 피에 굶주린 눈빛으로 장벽을 올라가려했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거미줄을 쥐기도 전에 은빛이 스쳐 머리가 펑! 터지고 말았다.
새까만 원숭이가 죽어 피가 사방으로 튀는데도 다른 짐승들은 전혀 놀라거나 경계심을 갖지 않고 흉수의 시체를 발판삼아 은빛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산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윤곽들이 어른거리며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저도 해 수사라고 부르면 되겠지요?”
날아오른 석천공이 해 도인을 향해 낭랑히 물었다. 해 도인은 대답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산맥에서 더많은 짐승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려 형이 단시간 내로 일어설 것 같지도 않고 이곳의 천지원기 파동이 강해서 우리가 힘을 합쳐야 려 형을 안전히 지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를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저는 려 형을 해칠 생각이 요만큼도 없습니다.”
석천공은 웃는 낯으로 말했고 해 도인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저 이번 일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석천공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중얼거렸다.
말을 마친 그가 은색 빛의 장벽 위로 올라가 사람 머리만 한 은색 얼굴을 불러내고 그 위로 법결을 던져 넣었다.
거울에서 빠져나온 광선들이 빼곡하게 장벽을 덮고 기어오르던 뱀과 거미들 그리고 그 바깥의 짐승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 펼쳐졌다.
콰릉.
해 도인도 그쪽에서 시선을 거두고 두 손에 든 칼에 뇌전을 일으켰다.
골짜기 입구쪽 지면으로 뛰어내린 그가 사라지더니 잠시 후, 바닥에서 수백 줄기의 뇌전 기둥이 용암처럼 솟아올라 요수들을 학살했다.
* * *
시간이 흘러 세 달이 훨씬 지난 어느 날.
검푸른 산골짜기 위로 날개 달린 대형 뱀이 몸 절반을 안개 속에 숨기고 입에서 검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금색 뇌전실이 빈번하게 나타나 고풍스러운 칼 두 자루를 들고 기다란 뱀의 몸을 가르려 했다.
그 속도가 매우 빨라 번득일 때마다 기다란 상처가 남았는데 커다란 뱀은 표독스런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때, 누군가 날개 달린 뱀의 등 뒤에서 나타나 양 손에 쥔 칼로 날개 아래쪽을 찍었다.
푹!
피가 튀고 날개가 떨어진 뱀은 애달피 울며 추락했다.
산골짜기 주위로 몸이 갈라지고 피가 터진 짐승들의 잔해가 산을 이루었다.
날개 잃은 거대 뱀이 커다란 피웅덩이 속으로 빠져 꿈틀거리는데 금빛 뇌전이 머리로 떨어졌다.
그 속에는 도포를 입은 해 도인이 서있었다.
뱀의 몸에 박힌 칼을 뽑아낸 그는 고공과 주변을 살폈다.
골짜기 양쪽으로 짐승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어서 내부로 거의 백 리에 달하는 피의 호수가 고여 있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광경 위로 정순한 선령력이 하얀 연꽃처럼 뭉쳐 한립을 품고 있었다.
더 신기한 일은 그 핏빛 연꽃 주위의 핏물들이 선령력의 영향을 받아 아직도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쪽에서는 석천공이 피에 물든 장포를 입고 머리가 셋 달린 거대 요수를 격살하고 있었다.
한립이 내준 뇌갑 도병들이 보름 만에 몰살당하고 지난 몇 달 동안은 석천공이 지닌 부적이며 진법도구들 그리고 몇몇 보물들까지 망가져 나갔다.
더욱 신경쓰이는 것은 아직도 날개 달린 뱀보다 더 강한 짐승들이 골짜기 주변을 맴돌면서 두 사람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해 도인은 석천공의 신영을 보면서 침음했다.
함께 싸우며 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는 했으나 이대로 가면 얼마나 더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펑!
그때 새하얀 거대 두꺼비가 시체의 산을 펄쩍 뛰어올라 허공의 진법을 향해 나선형의 냉기를 뿜었다.
막 머리 셋 달린 매의 공격을 막아낸 석천공은 냉기 폭풍에 휘말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피부에 하얀 서리가 맺힌 그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런…….”
해 도인이 놀라 번득 이동했다. 주변 요수들이 그가 예상했던 것 보다 일찍 습격을 해온 것이다.
또 다른 시체의 산 위로도 금선 초기 이상의 실력을 지닌 거대 요수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중에서도 백 개의 눈을 지닌 지네는 금선 후기였다.
물론 석천공과 해 도인이 두려워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세달 넘게 쉼 없이 달려드는 짐승들을 죽여 온 그들은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이 난관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지 그리 낙관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새하얀 연꽃에서 누군가 긴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은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해 도인의 귀에는 더없이 또렷하게 들렸고 얼음 속에 봉인된 석천공도 큰 짐을 덜어냈다는 듯 소리쳤다.
“려 형, 드디어 깨어난 겁니까!”
다음 순간 먹구름이 갈라지고 새하얀 빛이 핏빛 호수 위로 치솟았다.
새하얀 연꽃 속에서 거의 만 장을 날아올라 멈춘 한립은 눈을 찌를 듯한 하얀빛을 내뿜고 있어 제대로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의식이 연계된 해 도인이 그걸 보고 걸음을 멈추었고 난폭한 짐승들마저 엄청난 기운에 압도되어 놀랍게도 분분히 고개를 들었다.
새하얀 장포로 갈아입은 그는 진작 윤회전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두었기에 옥같이 빛나는 몸만이 눈에 띄어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이 따로 없었다.
한립은 바로 푸른빛을 일으켜 기운을 거두고 청죽봉운검 세 자루를 불러냈다.
“가라.”
뇌전법칙의 힘을 머금은 비검들이 허공을 태우는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치지지직!
별안간 머리 셋 달린 매가 금빛 뇌전에 휩싸여 무수히 많은 살점으로 변해 떨어졌다.
그 모습에 시체의 산에 가장 먼저 올랐던 금선급 두꺼비가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닫고 서둘러 달아났지만 한립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퍼펑!
한립이 눈썹을 꿈틀하며 주먹을 내질러 골짜기 양쪽으로 푸른 거대 주먹 허상이 떨어졌다.
콰르르!
시체의 산이 엄청난 압력을 견디지 못해 무너지고 새하얀 거대 두꺼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으깨졌다.
진작 한립의 전음을 들은 석천공과 해 도인은 고공으로 날아올라 겨우 두 주먹에 그들이 세 달간 쌓아 올린 시체의 산이 평지가 되고 핏빛 호수가 더욱 커진 것을 보았다.
나머지 짐승들은 강대한 흉수들이 척살당하자 혼비백산해 뿔뿔이 흩어졌다.
한립이 석천공과 해 도인 곁으로 날아왔다.
“축하드립니다, 려 형. 태을옥선의 경지에 이르셨군요.”
석천공이 포권을 하며 웃음 지었다.
“오랜 세월 살쇠에 고통받다가 오늘에서야 그 어려움에서 벗어났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군요. 그런데 석 형도 세살지에서 흉살기를 씻어 낸 것으로 아는데 어째서 선계로 돌아왔는데도 영기가 흘러드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한립이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의문을 표했다.
“제 출신 때문에 경지를 높이는 법이 려 형과는 차이가 있어 그렇습니다.”
석천공은 모호하게 답을 주었다.
“그렇군요.”
한립도 상대가 말하는 것이 마족인지 아니면 그의 일족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이 선계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석천공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씀은 아니라는 뜻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계라고 볼 수도 있으나 정확히 말하면 선계는 아닙니다.”
“설마…… 우리가 마역에라도 왔다는 겁니까?”
“선계 사람들은 그리 부르지만 우리는 성역(聖域)이라 부르기를 선호하지요.”
“마역이 선계 속의 독립된 공간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한립은 놀란 마음을 거두고 빙긋 웃어보였다.
“저도 갑자기 우리가 이곳에 이른 이유를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석 형께서 비파를 조종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 아닙니까?”
“제가 그럴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계면간 압력을 뛰어 넘을 정도로 라타비파를 발동해서 우릴 회계에서 빼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제 아버지밖에 없을 겁니다. 바로 남들이 말하는 마주(魔主)시지요.”
석천공이 씩 웃으며 하는 말이 한립의 귓가에는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마주?’
마역에 가서 보물을 빌려왔다는 천정의 시간도조와 맞먹는 존재가 석천공의 부친이란 소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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