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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87화 (1,644/2,000)

1887화. 살아남다

*

“왔구나.”

십자 나무판 위의 류기 노조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가 펼쳐 놓은 회백색 진법이 웅웅 울면서 거세게 진동하고 있었다.

외부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강력한 금제의 힘으로도 완전히 상쇄되지 않았다.

“서둘러라! 어서 사슬을 잘라내!”

류기 노조가 소리를 지르며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온몸에서 회백색 빛을 뿌렸다.

츠츠츳!

회백색 빛들이 사방의 진법으로 날아가 위태로웠던 금제를 안정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한립 등이 몸을 가누기도 전에 쿠쿵!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대청을 울렸다.

이번에는 주위의 진법이 깨지려는 조짐까지 보였다.

그때 류기 노조가 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쿠쿵!

연이은 공격으로 대청을 보호하던 회백색 금제가 붕괴되고 석문이 터지면서 구멍이 뚫렸다.

그 사이로 나타난 것은 음승전과 풍청수였다.

류기 노조는 애써 유지하던 금제가 깨진 충격으로 입가에 피를 흘렸지만 눈빛만은 서늘했다.

“수미분계술……. 음 역주, 구유역은 정말 대단한 인물들을 잘도 숨겨 놓았습니다. 혼후에 이어 도조까지 감춰두시고 말이에요.”

풍청수가 내부 상황을 보고 흰눈썹을 꿈틀했다.

“괜한 소리 마시고 약조한 대로 하시지요!”

음승전은 상대가 비꼬는 것을 알고 냉랭히 말했다. 풍청수는 화내는 기색 없이 실실 웃고 있었다.

“도조가 두 명이나…….”

한립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호삼과 석천공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제혼만이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두 주먹을 그러쥐고 음승전을 노려보았다.

“류기, 모든 게 당신의 음모였나? 시기는 잘 골랐다만 내가 직접 펼쳐놓은 뇌오사슬을 이런 버리지들이 자를 수 있을 거라 기대하다니 어리석군. 넌 영원히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음승전은 한립 무리를 지나 류기 노조를 응시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주먹을 날리자 한립은 주변 공기가 공기방울처럼 팽창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음승전은 하늘에서 강림한 신처럼 몸이 거대해졌고 그들은 상대적으로 개미처럼 작아져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콰르릉!

산만한 주먹이 류기 노조 위로 떨어졌다.

우드득.

공간이 왜곡되면서 내려오는 거대 주먹의 압박에 한립 무리는 감각을 상실하고 두 다리가 바닥에 파묻히고 말았다.

한립이 끙 앓으며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고 호삼, 석천공, 제혼은 그보다 더욱 심해 피를 토하고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체내의 선원력을 소모한 해 도인은 압력에 깔려 꼼짝도 못했다.

“당시 노부가 천정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네게 제압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금제를 거의 다 푼 마당에 내가 당하고만 있을 줄 아느냐!”

냉소를 흘린 류기 노조가 앞발을 휘둘러 회백색 털이 북슬북슬한 손바닥 허상을 아직도 금색 사슬에 박혀 있는 천호화혈도로 보냈다.

천호화혈도의 핏빛이 한립 무리가 발동할 때보다 훨씬 밝아졌다.

“천호화혈도!”

음승전의 눈이 가늘어졌다.

콰쾅!

핏빛 도광이 수십 장 거리를 뛰어넘어 음승전의 회색 거대 주먹을 갈랐다.

작열하는 붉은빛과 하얀빛 속에 돌풍이 치고 무수히 많은 공간균열들이 사방팔방에서 떠올랐다.

꼼짝 못하고 있던 한립 무리는 돌풍에 휘말려 공간폭풍에 갈기갈기 찢기기 직전이었다.

“뭐하는 겁니까! 저들을 죽게 두지 말고 잡아 들이세요!”

그걸 본 음승전이 소리쳤다.

눈을 반짝인 풍청수가 어떤 자세도 취하지 않았는데 물처럼 남색 광채가 몇 줄기 뻗어나가 주변의 암벽으로 스며들었다.

남색 옥 같은 보호막 속에서 공간균열의 움직임이 열 배로 느려지고 풍청수는 손가락을 튕겨 한립 무리를 향해 남색 거대 손을 내보냈다.

한립은 최선을 다해 남색 거대손의 압박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정한 도조와 그의 실력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상대가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면 육신은커녕 혼백도 건지지 못하고 순식간에 소멸되었을 것이다.

그때 다른 쪽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리고 핏빛 도광이 번득였다.

서걱!

회색 거대 주먹을 둘로 가른 핏빛 도광이 음승전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동시에 한립 무리가 박혀 있던 바닥에서 굵은 여우 꼬리 두 개가 솟아올랐고 그중 하나가 날아드는 남색 손바닥을 쳐냈다.

콰릉!

남색 손바닥이 멈칫 한 사이, 나머지 꼬리가 번개처럼 호삼만을 감싸 감쪽 같이 사라졌다.

남색 손바닥을 상대하던 꼬리가 자취를 감추자 한립은 얼굴을 굳혔다. 금색 뇌전 연못에 들어갔을 때도 느꼈지만 류기 노조는 그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리 실망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상대는 그들에게 거래를 제안했고 자신과 석천공은 거래의 대상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풍청수는 눈앞에서 한 명을 놓쳤는데도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었다.

그가 손바닥을 뒤집자 공중의 남색 거대 손이 둘로 갈라져 똑같은 크기의 거대 손 두 개로 변했다.

하나는 계속해서 한립 등을 잡으려 들었고 나머지는 흐릿하게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남색 거대 손이 그들의 코앞까지 이르렀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팟.

석천공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찬란한 은빛을 일으켜 라타비파를 꺼내든 것이다.

비파가 재빨리 회전하며 발산한 은빛이 남색 거대 손을 막고, 누군가 연주를 하는 것처럼 비파의 현이 튕겨졌다.

디링!

은색 음파들이 허공을 갈라 불현듯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어둑한 공간통로가 열렸다.

형용할 수 없는 힘이 통로 속에서 석천공과 한립 등을 빨아들였다.

“죽여도 상관없으니 달아나지 못하게 막으세요!”

류기와 대치하던 음승전이 그것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죽어라!”

풍청수도 열이 받아 수결을 맺은 양손을 펼쳤다.

콰쾅!

허공이 진동하고 실체화된 남색 빛이 튀어나가 공간통로를 뒤덮었다. 이에 한립 등은 통로 입구까지 빨려 들어갔다가 허공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이리 오지 못할까!”

풍청수의 고함소리와 함께 한립 무리 주변에 남색 수정실들이 나타나 그들을 휘감고 바깥으로 끌어당겼다.

바로 그 순간, 허공이 다시 한 번 진동하면서 핏빛이 밀려들었다.

소리 없이 6개의 새까만 구멍이 뚫린 산만한 암홍색 고리 허상이 나타나 회전하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투둑!

남색 수정실이 끊기고 자유를 되찾은 한립 무리는 라타비파와 같이 공간통로 로 빨려 들어갔고, 제혼은 갑자기 맥을 못추며 정신을 잃었다.

흐릿하게 사람과 요수의 얼굴을 품은 검은 기운들이 그녀의 모공에서 빠져나와 암홍색 거대 고리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기운이 약해진 제혼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한립이 그걸 보고 급히 제혼을 붙들어 해 도인과 같이 화지공간 속으로 넣어주었다.

그 후, 그도 눈앞이 새까맣게 변하며 완전히 공간통로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공간통로가 봉합되기 직전 음승전의 분노에 찬 포효 소리가 들려오고 두 종류의 법칙의 힘이 날아들었다.

바로 공간통로가 봉합되어 기운이 차단되기는 했지만 적잖은 양의 법칙의 힘이 그들을 따라 들어왔다.

몸이 묵직해진 한립은 따라붙은 두 종류의 법칙 때문에 속도가 느려지고 체내의 선령력과 의식 흐름도 느려졌다.

별안간 전방의 라타비파에서 은색 광채들이 퍼져 그의 몸을 둘러싼 회색과 남색 법칙의 힘을 밀어내고 나서야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보았다.

남색과 회색 기운이 들러붙은 은색 비파에서 은색 빛의 실이 뻗어 나와 자신과 석천공의 허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한립은 빛의 실에 끌려가면서 공간의 힘의 저항에 온몸을 두들겨 맞고 있었고, 멀리 석천공도 비슷한 상황인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두 눈에 보랏빛을 일으킨 한립은 텅 빈 공간 한쪽에서 강력한 힘이 은색 비파와 그들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된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도조급이 두 명이나 나타나 류기 노조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세살지를 벗어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방의 은색 비파에 변고가 생겼다.

비파를 맴돌던 회색과 남색 기류가 그들과 연결된 빛의 실을 휘감고 끊어내려 했다!

“안 돼!”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한립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 *

어둠이 내린 땅에 한 줄기 빛이 떨어져 내렸다.

비파의 모습을 한 은빛 뒤로 한립과 석천공이 뒤따랐다.

공간통로의 혼란한 상황에서도 기절하지는 않은 그들은 머리가 띵한 가운데 차차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긴…….’

고공에서 추락하면서 한립은 귓가를 스치는 거센 바람과 어두운 하늘을 보았고 자신이 검푸른 산 위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령력을 운용해 급히 허공에 떠오른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석천공도 추락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석천공도 금방 정신이 돌아와 둔광을 일으켜 멈추고 은색 비파를 불러들였다. 라타비타를 품에 안은 그는 어두워진 보물을 속상하다는 눈빛으로 살폈다.

비파 위쪽에는 선명하게 금이 가서 주술문자가 잘려 있었다. 한립이 막 입을 열어 그를 부르려는데 갑자기 몸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우드득!

그의 몸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리며 선규들이 하나씩 빛을 터트리고 있었다.

주위의 천지원기들이 거위 털처럼 나풀나풀 몰려들어 그를 감싸고 거대한 구름을 형성했다.

고개를 돌린 석천공이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려 수사!”

“세살지에서 경지를 넘어섰는데 회계에는 천지원기가 없어 선규를 뚫을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천지원기에 노출되니 태을경에 이르려는 듯합니다.”

한립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모를 상황에 쓴웃음을 지었다.

급히 주변 풍경을 둘러본 석천공은 뿌연 안개가 낀 산맥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허나 여긴…….”

“살쇠로 인해 억눌려 있던 것이라 폐관할 장소를 택할 시간이 없습니다. 석 형과 해 수사께서 호법을 서주셔야겠습니다.”

석천공의 말을 끊은 한립은 서둘러 아래쪽 골짜기로 몸을 날렸다. 내려가는 도중 은색 빛의 문이 열려 해 도인이 나타났다.

쿠릉.

물항아리 굵기의 은색 뇌전기둥이 한립의 몸에서 뻗어나가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느닷없는 굉음에 곳곳에서 짐승들이 울부짖고 새들이 날아올라 산맥 전체가 난리가 났다.

뇌전이 내리꽂힌 골짜기 내의 초목들은 재가 되었고 검푸른 나무가 울창하던 공간이 황량해졌다.

공터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 주위로 천기원기가 하얗게 소용돌이 치는 모습이 퍽 신비로웠다.

양손에 참정도와 ‘단소검을 든 해 도인이 공터 바깥에 떠서 주위를 경계했고 석천공도 허공에 떠서 한립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곳이 어딘 줄 알고 하필 이런 곳을 골라서는…….”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이 더욱 짙어지는 것을 본 석천공은 쓴웃음을 흘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해 도인이 다가오는 그를 향해 경계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각각 남과 북을 맡아 방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천공의 낭랑한 말에 해 도인은 영문을 알지 못했다.

설명할 것도 없이 포악한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골짜기 전체가 흔들려 바위 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옵니다.”

석천공의 말소리가 들리고 검푸른 수풀이 쩍쩍 갈라지면서 새까만 거대 원숭이와 산만한 푸른 구렁이 그리고 보랏빛 대형 거미가 불쑥 나타났다.

그 중 두 눈이 새빨갛고 새까만 피부의 원숭이는 두 손에 든 거목과 바위를 석천공을 향해 휘둘렀고, 푸른 구렁이는 입을 벌려 작은 뱀과 거미가 가득한 오색 독무를 날렸다.

그 뒤로는 거대하기 짝이 없는 짐승들의 그림자가 안개 속에서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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