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화. 금색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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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천호화혈도까지 챙겨서 음괄의 옆으로 향했다.
그는 시체를 자세히 살피다 하얀 백골 영패를 떼어내 거두었다. 그때 은염소인으로 변한 정염불새는 그의 어깨에 앉아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제혼이 급히 다가와 물었다.
“괜찮다. 살뢰에 몸이 타서 체내의 장기가 엉망이 되었을 뿐이야. 너는 괜찮으냐?”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걱정했다.
“사……. 저 자에게 저는 아직 이용가치가 있잖아요. 죽을 정도로 공격하지는 않았어요.”
음승전을 습관처럼 ‘사존’이라 부르려던 제혼이 씁쓸해하며 답했다.
“려 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노조를 도와야 합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호삼이 그를 재촉했다. 한립이 살펴보니 과연 제혼의 도움이 사라지자 류기 노조가 밀리고 있었다.
“제가 갈게요.”
“그럴 것 없다. 한동안은 버텨주실 것이니 그동안 우린 부상을 치료하고 선령력을 회복해 세 번째 사슬을 끊어야 해. 그래야 류기 선배님의 힘이 강해져 우리의 도움 없이도 음승전 분혼을 쫓을 수 있을 것이야.”
제혼의 말에 한립이 손을 저으며 답했다.
“다음 사슬은 더 강할 텐데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호삼이 전전긍긍하면서 물어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은색 뇌전을 통과했으니 성공 가능성이 7할은 됩니다. 그 전에 선령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지만요.”
“려 수사의 말대로 하지요.”
석천공이 그의 의견을 지지하자 호삼도 더는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모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 * *
타호구 회장.
음승전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지 눈빛이 가라앉았고 회중 분위기도 어색해졌다.
“음 역주, 이렇게 서로 의견만 나누어서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표결을 앞당기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황보옥이 다들 말을 아끼자 미간을 좁히고 나섰다.
음승전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왼손새끼 손가락에 회색으로 변한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음 역주? 황보 궁주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논의는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다른 의견이 없으시면 표결을 하지요.”
소불야가 목소리를 키워 다시 음승전을 불렀다.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음승전이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두 분 다 조급하게 그러지 마십시오. 모든 것에는 절차가 있습니다. 아직 표결시간에 이르지 않았으니 기다리시지요.”
그가 말을 하는 도중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오른손을 움찔했다.
내색은 하지 않아도 왼손의 반지 중 또 다른 문양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감정을 잘 숨겨도 황보옥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진작 구유족이 무슨 수를 쓸 것을 알고 경계하던 그는 회맹이 여기까지 이르도록 아무 일도 없고 음승전이 좌불안석하자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구유족에 무슨 일이 생기기는 하였구나.’
“왜 그러십니까, 음 역주? 설마 세혼구 쪽에 또 무슨 변고라도 있는지요? 구유족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면 논의도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데 다 같이 가보시지요. 모두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면 각 구역의 사이도 더욱 돈독해질 겁니다.”
황보옥은 웃는 낯으로 상대의 아픈 구석을 쿡쿡 찔렀다.
“구유족이 수라성 안에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농담 마시지요.”
음승전이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그 사이 황보옥이 티 안 나게 교삼에게 전음을 보냈다.
“교삼, 수라성에 숨겨둔 이들이 알아낸 정보가 있는가?”
“아까 전해드린 소식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세혼구 쪽에 큰 문제가 생겨 달명구, 백장구, 고하구(苦河區)가 전부 방어 금제를 가동했고 고하구에 머물던 대라경 수사 음림도 세혼구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교삼은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음승전이 조급해할 만도 하구나.”
황보옥이 웃음기 어린 전음을 보냈다.
“음 역주, 황보 역주의 건의를 받아들이시겠다는 뜻입니까?”
소불야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아직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표결하기에는 이르다는 의견입니다. 잠시 논의를 미루고 다시 좋은 날을 택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음승전의 느닷없는 말에 황보옥이 입을 열기 전 소불야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음 역주, 다른 역주들이 수라성에 모이는 게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천리만리를 마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모였는데 갑자기 논의를 접고 다시 날짜를 잡자고요? 그런 일이 생긴다면 삼역회맹의 위엄이 실추될 겁니다.”
“소 역주, 그런 걱정은 마시지요. 다음 회맹을 연다면 당연히 구유역에서 추진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족인들을 이끌고 흑승역으로 가지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따르기 어렵겠습니다. 회계의 중대사가 걸린 일인데 며칠 더 논의해도 될 거예요.”
황보옥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표결하자는 뜻을 접었다. 그 말에 음승전의 눈빛에 불쾌감이 어렸다.
“소 역주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두 사람의 변화를 보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소불야가 아니었다.
“그게, 두 분 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 허나 회계의 의견이 갈려서 세력들이 분열된 지도 오랜 세월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선계의 일을 결정짓지 못해 각 구역의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겁니다. 이대로 결정을 미루기보다는 오늘 모인 김에 결정을 보시지요.”
고심하는 척하던 소불야가 말을 골라 대답했다.
“소 역주, 사실 윤회역의 생각에 우리 구유역은 동의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선계에서 쳐들어온다면 우리도 용감히 맞서 싸우겠지만 두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서 먼저 선계로 쳐들어가자는 데는 반대라 이 말입니다. 장기간 통로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그렇다고 쳐도, 통로를 통해 선계의 영기가 대량으로 유입되면 얼마나 큰 화를 부를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음승전이 입을 열었다.
“통로에 대한 일은 윤회역에서 준비하는 중이나 아직은 시기상조라 공론화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구유역에서 윤회역의 의견에 동조해 주신다면 방법에 대해 논의할 마음도 있지만 말입니다.”
황보옥이 진지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저와 소 역주도 어떤 방법인지 들을 의향이 있습니다. 의문만 가득한 채 윤회역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는 없으니까요.”
“통로에 대한 일은 윤회역에서도 기밀이라 아무렇게나 밝힐 수는 없습니다. 삼역의 의견이 하나로 모여 합심을 했을 때만 방법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두 분이 이렇게 논쟁하시다가는 백 년이 지나도 결론을 못 낼지 모릅니다. 제 생각에는 일단 우리 삼역이 결맹해서 회계를 안정시키고 그다음에 선계의 일을 처리해도 될 텐데요……. 그렇게만 되면 이 안건은 다음 회맹에서 논의해도 될 테고요.”
듣고 있던 소불야가 웃으며 중재했다.
“결맹이라,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은데 황보 역주의 생각은 어떠신지 모르겠군요?”
음승전은 거침없이 동의했다.
“명목상으로 삼역이 통일된다고 해도 의견이 다르다면 실질적으로는 흩어져 있는 모래와 같을 겁니다.”
황보옥이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다.
“지금도 여러 구역에서 마찰이 끊이지 않습니다. 결국 회계 내부의 세력을 약화하는 일이지요. 일단 삼역이 하나가 되어 모든 분쟁을 금하면 어떻습니까.”
소불야는 웃는 낯으로 자신의 입장을 견지했다.
“결맹하려면 어찌 되었든 맹주가 필요할 테지요. 제가 명주를 하겠다면 황보 수사가 분명 반대하실 겁니다. 똑같이 저도 윤회역에서 그 자리를 맡게 할 수는 없고요. 제가 보기에 소 역주가 잠시 맹주 대리를 하면 어떻습니까? 맹주를 교체할지는 다음 회맹에서 상의하는 것으로 하고요.”
황보옥은 음승전의 말을 들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윤회역과 구유역의 다툼에 소불야만 어부지리를 얻는 꼴이었다.
하지만 구유역에 소란이 생기지 않고 순조롭게 회맹이 진행되었어도 윤회역은 안심하고 결과를 기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 보니 윤회역의 의견을 따르는 구역들도 많아 다음 회맹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다들 그런 의견이라면 윤회역도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황보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두 분 덕에 부끄럽지만 제가 잠시 결맹을 이끌게 되겠습니다.”
삼역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소불야도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지 않고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럼 바로 다음번 회맹 시기를 정해볼까요…….”
음승전은 두말할 것 없이 논의를 막바지로 이끌고 있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는 막을 내렸고, 윤회역과 흑승역 각 부락들은 길게 줄을 서서 수라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기다란 대열 속에는 묘고, 묘수 부녀가 마주 앉은 삼묘족 마차도 있었다.
“아버지, 수라성 소란이 그 세 사람 때문은 아니겠죠?”
묘수가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묻자 아비가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관계가 있든 없든 우리만 입을 다물면 된다. 앞으로 우린 그들과 모르는 사이다. 알아듣겠느냐?”
전음으로 당부하는 아비를 보고 묘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열의 거대한 팔각 마차 안에 하얀 치마를 입은 교삼이 서 있었다. 마차의 울타리에 두 손을 얹고 수라성 안 세혼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구진아, 왜 그러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이냐?”
황보옥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황보 숙부, 이번 회맹이 갑자기 흐지부지된 게 이상합니다. 구유족이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걸까요?”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만 어찌 되었든 별 탈 없이 끝났구나.”
“네, 우리를 해할 줄 알고 준비한 것들도 무용지물이 되었지만요.”
황보옥이 웃으며 하는 말에 교삼도 미소를 지었다.
* * *
세살지 금지 안에는 회백색 여우가 허공에 떠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는 투명한 음승전 분혼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몸이 둘로 쪼개져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앞발을 날려 음승전 분혼을 흩어버린 여우는 콧방귀를 뀌고 류기 노조의 미간으로 돌아갔다.
류기 노조 옆에서 제혼이 창백하게 질려 수결을 맺고 있던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주저앉았다.
제혼 옆으로 푸른 빛이 날아들어 한립으로 변했다.
“전 괜찮아요. 명혼곡(鳴魂曲)을 오래 펼쳐 혼백의 힘을 과도하게 소모해서 그래요.”
한립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본 제혼이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한립의 얼굴은 풀어질 줄 몰랐다.
핏기가 없다 못해 피부가 투명해진 제혼은 그 어느 때보다 기운이 약해져 있었고 술법을 멈췄는데도 점점 기운이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한립은 검은 단약 몇 개를 꺼내 제혼의 입안으로 날려 보내고 수결을 맺어 그녀의 몸속으로 법결을 흡수시켰다.
검은 수정빛이 제혼의 몸에 떠올랐지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한립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뇌전 사슬 세 개가 사라진 류기 노조가 고개를 돌리고 미간에서 수정빛 파문을 날려 제혼을 감쌌다.
수정빛이 흡수되고 창백하던 제혼의 안색에 혈색이 돌아왔다. 더는 기운도 쇠하지 않는 듯했다.
한숨을 돌린 제혼이 한립의 부축을 받고 바로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고운 얼굴에 검은 기운이 덮이고 그 안에서 점점 회복하는 듯했다.
한립은 제혼이 기력을 찾아가자 안심하면서 류기 노조에 대해 경외심을 느꼈다. 역시 도조급은 그 같은 태을경 문턱에 걸쳐선 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강적을 처치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역시 노조십니다!”
호삼이 류기 노조 옆으로 가서 신이 나 외쳤다.
“기뻐하기는 이르다. 음승전 본체가 오고 있어! 려 수사는 살쇠를 뛰어넘어 거의 태을옥선의 몸을 얻었으니 세살지의 뇌전이 더는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서 마지막 금색 연못에 들어가 뇌전 본원을 흡수하고 마지막 뇌오사슬을 자르거라.”
류기 조노가 경거망동하는 호삼을 질책하고 한립을 향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한립은 금색 뇌전 연못을 보았다.
이전 연못들보다 뇌전이 훨씬 가늘어 실 같으면서도 수시로 구슬, 고리, 산 등 다양한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뇌전법칙 파동은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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