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화. 살역(煞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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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삼도 음괄이 한립을 경계할 동안 바닥에 박힌 다리를 꺼내 석천공을 데리고 뇌전 연못 근처로 피해 있었다.
고통을 참으면서 석천공의 입에 단약을 하나를 넣어주고는 음괄을 경계하면서 곁눈질로 한립을 살폈다.
“려 형…….”
“운 좋게 살아남았습니다. 흉살기도 거의 다 씻어 내고 육신과 의식의 힘도 정련한 덕에 환골탈태를 한 기분입니다.”
한립은 궁금해하는 호삼을 향해 전음으로 답해 주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의 기운은 이미 태을경에 가까워져 있었다.
예전에 태을단을 먹어 억지로 위태을경 상태에 이르렀던 백리염과는 달리 회계를 떠나 선계로 돌아가 막대한 양의 천지영기를 주입하면 태을옥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립은 대답을 하면서 음승전과 류기 노조가 아직도 치열한 전투를 이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음승전은 분혼에 불과한데도 실력이 녹록하지 않아 제혼이 보조하는 류기 노조도 간신히 상대를 막고 있었다.
“넌 시간공법을 익힌 줄 알았는데, 어떻게 세살지의 뇌전을 부리는 것이지?”
어느새 기운을 회복한 음괄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한립은 두 손에 선원석을 쥐고 선령력을 흡수할 뿐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
아홉 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이 금빛 뇌전을 품고 그의 주위를 돌았고 현천호리병이 등 뒤에 떠 있었다.
음괄은 한립 무리를 보며 마음이 답답해졌다.
석천공의 공간 선기에 잘린 팔은 공간법칙 파동이 아직도 강해서 수백 년간 요양하지 않으면 다시 복구할 수 없었고, 왼쪽 갈비뼈 아래의 상처도 세살지의 은색 뇌전에 침식되어 바로 회복이 어려웠다.
자신보다 한참 수행이 낮은 세 명에게 이렇게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게 다 대라경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무리해서 유혼충을 다섯 개나 제련한 탓이었다.
허나 대라경 회선이 숨겨둔 한 수가 없을 리 없었다.
한립이 대답이 없자 음괄도 하나 남은 손을 세로로 세워 허공에 원을 그렸다. 원 안에 검은 뇌전들이 파칙거리면서 몰려들어 한립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한립은 현규에서 빛을 방출해 금색 비늘로 피부를 가리고 현무갑옷을 입고는 피하지 않고 음괄을 향해 전진했다.
살뢰가 창처럼 날아들어도 아홉 자루 청죽봉운검들이 그의 뜻을 이해하고 길을 뚫었다.
콰콰쾅!
폭음이 일 때마다 청죽봉운검은 살뢰를 막아내고는 바르르 떨리며 빛이 어둑해졌다.
의식연계가 긴밀하게 되어 있는 한립도 비검들이 손상을 입는 만큼 체내의 기운이 진탕되어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한립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청죽봉운검 아홉 자루가 힘을 잃어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그는 검들을 거둘 생각도 하지 않고 현무갑옷을 입은 채로 걸어갔다.
퍼퍼펑!
갑옷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자 한립은 묵직한 타격에 입에서 피를 토했다.
‘3백 장…….’
‘2백 장…….’
‘백 장!’
거리가 가까워지자 한립은 진언보륜을 역전해서 검은 살뢰창들을 피해 음괄 앞으로 달려들었다.
동시에 등 뒤로 금빛과 함께 진언보륜이 떠올라 파동을 방출했다.
근거리에서 진언보륜이 발동되자 대라경 수행을 지닌 음괄도 어쩔 수 없이 시간감속에 걸려들었다.
그런데 한립이 진언보륜을 방출하자마자 음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걸 기다렸다!”
한립의 사방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굵직한 검은 살뢰들이 날아들어 그의 사지를 감쌌다.
그리고 음괄이 적시에 뻗은 손에서 어린아이 팔뚝만 한 검은 장창이 뻗어 나가 정확히 한립의 미간을 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호삼과 석천공은 대경실색했다.
살뢰창이 한립의 머리를 꿰뚫으려는데, 돌연 인근 허공에서 수정사슬 몇 개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나타나 음괄의 뇌리속으로 스며들었다.
검은 창이 멈춘 것은 물론 음괄도 표정이 뻣뻣하게 굳어 허공에 멈추었다.
동시에 한립이 금색 비늘이 자라난 두 팔에 힘을 주었지만 그를 감싼 살뢰들은 찢겨나가지 않았다.
반대로 대량의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들어 그를 저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호삼이 보다 못해 번득 음괄의 뒤로 이동했다.
은색 장검을 불러낸 그가 음괄의 뒤통수를 찌르려는데 검 끝이 닿기 직전 한립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피하세요!”
화들짝 놀란 호삼은 고민할 것도 없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채채챙!
다음 순간 음괄의 미간에서 검은 구슬이 떠올라 뇌리속의 의식사슬을 터트리고 등 뒤로 여덟 줄기의 살뢰 창을 날렸다.
제때 피하지 못했으면 호삼은 살뢰 창에 꿰뚫려 즉사했을 것이다.
상황을 살피던 한립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등 뒤의 현천호리병에서 찬란한 은색 뇌전을 분출해 몸 주변에 그물을 쳤다.
은색 뇌전은 세살지에서 흉살기를 씻어내며 현천호리병에 담아둔 것이었고, 아까 음괄에게 상처를 입힌 화살도 호리병으로 쏘아 보낸 것이다.
아쉬운 일은 현천호리병도 은색 뇌전을 담자 벌써 영성이 손상될 위기여서 마지막 남은 금색 뇌전은 담아볼 시도도 할 수 없었다.
은색 뇌전 그물이 그를 둘러싼 검은 뇌전들과 얽혀 연기가 풀풀 날렸다.
콰직!
다시 두 팔에 힘을 주어 겨우 검은 뇌전들을 뜯어낸 한립은 그대로 금빛으로 변해 음괄을 향해 쇄도했다.
의식을 회복한 음괄도 한립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여덟 개의 살뢰 창을 하나로 뭉쳐 사람 머리통만 한 뇌전구슬로 바꾸었다.
아주 작은 용의 형상을 한 뇌전들이 노니는 뇌전구슬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한립은 흠칫 놀랐다.
‘어쩔 수 없지.’
그도 뇌전구슬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물러서지 않고 천호화혈도를 불러내 음괄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체내의 선령력이 다시금 장도로 흘러들어 도신에 핏빛 문양이 반짝였다. 거의 실체화된 장도 허상들이 검은 뇌전구슬로 떨어져 내렸다.
세살지 옆에서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고 가부좌를 튼 채 선원석을 쥐고 있던 석천공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립은 눈에 띄게 수행이 늘어서 그들이 힘을 합쳐 첫 번째 사슬을 자를 때와 거의 비슷한 힘을 내고 있었다.
콰릉!
도광과 뇌전구슬이 맞부딪쳐 경천동지할 폭음이 터졌다.
검은 뇌전이 불똥처럼 곳곳으로 튀어 대청 전체가 흔들렸다.
그 소리에 음승전과 류기 노조마저도 힐끔힐끔 그쪽을 살폈고 제혼은 더더욱 한립이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양손으로 장도를 쥔 한립은 몸을 덜덜 떨었고 코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장도와 음괄의 여덟 개의 창이 뭉쳐진 구슬 사이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잇!’
자신의 공격이 슬슬 밀리는 것을 보고 눈빛이 험악해진 음괄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의 회백색 눈동자에 신기하게 곤충 그림자가 흐릿하게 어리고 한립의 의식 속에서 오랫동안 침묵하던 유혼충이 꿈틀거렸다.
“익숙한 고통일 것이다!”
음괄이 냉소를 지으면서 다섯 손가락을 오므렸다.
“봉인!”
한립은 상대가 손가락에서 검은 살뢰를 뿜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연신술이 급격히 발동해 유혼충을 감싸고 의식사슬을 팽팽하게 당겼다.
더욱 가느다란 빛이 수정사슬에서 흘러나와 유혼충 곳곳을 찌르고 들어가 고정시켰고 막대한 의식의 힘에 유혼충 속에서 깨알같이 피어오르던 주술문자들도 잠잠해졌다.
그의 뇌로 스며들던 검은빛도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의식 파동에 흩어진 뒤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번에는 음괄도 정말 놀라고 말았다. 유혼충의 강력함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연신술이 5성에 이르고 뇌전 연못 세 곳에서 세례를 한 한립의 의식의 힘이 이제 유혼충을 억제할 만큼 커졌다는 점이었다.
한립은 무표정한 얼굴로 장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사악!
검은 뇌전구슬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둘로 갈라진 순간, 한립의 동공이 수축했다.
천호화혈도가 뇌전구슬을 지나 음괄을 머리부터 가슴까지 갈라낸 것이다.
“겨우 수행이 태을경에 가까워진 네가 내 살령체(煞靈替)를 죽인 것만으로도 대단하구나. 허나 거기까지다.”
음괄은 둘로 달라진 입술로 달싹거리면서 괴이한 말을 지껄였다. 이어서 그의 몸이 부풀어 올라 터지면서 새까만 살뢰가 대량으로 번졌다.
둘로 갈라진 검은 구슬 속에서도 뇌전 교룡이 도사리고 있다 한립의 가슴으로 치고 들어왔다.
퍼퍼퍼펑!
현무갑옷이 떠올랐으나 검은 뇌전을 막지 못하고 천둥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곧 엄청난 양의 피가 터져 나오고 한립을 보호하던 갑옷도 가루처럼 터져나갔다. 핏빛 장도도 주인의 손을 떠나 둥실 떠올랐다.
그걸 본 호삼도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주인님!”
“어딜 가려느냐?”
제혼이 더는 음승전 분혼을 개의치 않고 튀어 나가 한립을 구하려는데 음승전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공격에 박차를 가해 막았다.
치지지직.
살뢰가 주변 수십 장을 감싸고 새까맣고 둥그런 구슬을 만들어 한립을 집어삼켰다.
“진령혈맥을 많이도 지니고 있구나. 뇌붕진혈까지 있으니 연화시켜 요긴하게 써야겠다.”
그 옆으로 검은 살뢰가 뭉쳐 창백한 얼굴의 음괄로 변했다. 그도 이번 수를 쓰느라 꽤 많은 힘을 소진한 듯했다.
말을 하면서 그의 몸이 쑥 늘어나 뱃속에서 거대한 구멍이 입처럼 벌어져 검은 살뢰에 묶여 상처투성이인 한립을 삼키려 했다.
“살역(煞域)! 주인님, 조심하세요!”
제혼이 한립의 기운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거대한 검은 구슬을 발견하고 시선이 분산되자 음승전 분혼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을 저어 제혼을 쳐냈다.
“려 수사……. 이렇게 여기서 죽는 것인가.”
석천공이 한립이 사라지는 것으로 보고 절망 어린 눈빛으로 탄식했다.
음괄이 손을 젓자 살뢰로 이루어진 뇌전실들이 그의 손으로 몰려들어 살역이 사라졌다.
“이제 네 차례다.”
음괄이 자신의 팔을 자른 석천공을 향해 흉흉한 눈빛을 보내고 다가갔다.
긴장한 석천공은 소매 속에서 선원석을 놓고 특이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그의 등에서 타오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봉인해두었던 주술문자가 떠올랐다.
막대한 대가를 치르겠지만 석천공은 마지막으로 모든 걸 걸고 싸워볼 작정이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콰르릉!
갑자기 음괄의 표정이 이상해지며 뱃속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찬란한 은빛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은빛은 그의 배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고 작열하는 은색 불새가 날아올랐다. 그 위에는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한립이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세살지 주변의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고 제혼은 음승전에게 당한 자신의 상처도 돌보지 않고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화르륵!
은색 불길이 뱃속에서 음괄의 가슴으로 치솟아 화염으로 그를 감쌌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당황한 음괄의 목소리가 불길 속에서 울려 퍼졌지만 은색 화염은 활활 잘만 타올랐다.
은색 화염도 세살지의 뇌전과 마찬가지로 음괄에게 치명적이었다. 거의 금색 뇌전 연못에 버금가는 위력이었다.
칠채화단사 세 알을 먹은 정염불새는 진작 태을경 경지에 이르렀다.
한립이 위급한 순간 강제로 깨우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주었다면 태을경 후기에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게다가 정염불새는 원래 흉살기와 상극인데 그가 스스로 집어삼켜 몸 안에서부터 불사를 수 있었으니 효과가 배가 된 것이다.
석천공과 호삼이 화색을 드러냈고 공중의 류기와 음승전의 표정도 엇갈렸다.
음괄은 버둥거리다 화염 속에서 흉살기가 뭉쳐진 검은 소인으로 변해 튀어나와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에 한립이 막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놓치고 말았다.
펑!
음괄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져 새까만 잔해만 남기자 한립은 정염불새의 등 뒤에서 내려와 청죽봉운검을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런데 아홉 자루 비검들은 마치 돌아가기 싫다는 듯 웅웅 거렸다.
움찔한 한립이 의식연계로 감응을 하다 다시 불러들이자 비검들은 아쉬워하면서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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