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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83화 (1,640/2,000)
  • 1883화. 대라경에 대항하다

    *

    말을 마친 한립은 은색 뇌전 연못 옆으로 날아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뇌전 연못 속에는 은색 뇌전들이 교룡처럼 얽혀서 새들이 짹짹거리는 것처럼 커다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첨벙.

    그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고는 이를 악물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치지지직.

    은색 뇌전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새빨갛게 달아오른 피부에 길고 깊은 상처를 내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참을성 강한 한립도 깜짝 놀라 신음을 흘렸다.

    은색 뇌전은 보라색 뇌전보다도 훨씬 강해서 단단한 그의 몸이 갈라져 금방 뼈가 드러났다.

    은색 뇌전의 침식에 피와 살이 튀기고 진령 허상들이 연달아 선명하게 날아올라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그의 얼굴에도 조급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뇌전의 힘을 배척하면 흉살기를 씻어 낼 수 없었다.

    결심을 굳힌 한립은 <대주천성원공>을 운용해서 오장육부만을 보호하면서 나머지 부분은 은색 뇌전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남겨두었다.

    살쇠가 폭발해서 그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고 의식세계에 폭풍우가 몰려왔다. 그러자 한립은 몸을 부르르 떨며 선규에서 짙은 흉살기를 콸콸 쏟아내었다.

    이전의 두 연못에서보다 유출 속도가 빨라 금방 선규 속에 박힌 흉살기가 줄어들었다.

    한립은 선규 내의 흉살기가 빠져나가자 가슴을 억누르던 만근 바위를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은색 단약을 꺼내 한립은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금색 새의 형상을 한 마지막 태을단을 꺼내 입안에 밀어 넣고 눈을 감았다.

    석천공은 은색 연못의 이상 현상을 눈에 담으며 미간을 좁혔다.

    “석 형도 가려는 겁니까? 려 수사야 사슬을 자르려면 어쩔 수 없다지만 석형은 노조가 벗어난 다음에 시도해도 늦지 않습니다!”

    “말은 그렇지만 급박한 상황에 그런 기회가 주어질지는 모를 일입니다. 어차피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판돈이 큰 도박에 승부를 걸어보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할 일밖에 더 있겠어요?”

    호삼의 만류에도 석천공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런 생각으로…….”

    호삼이 무슨 말을 하려는데 대청 구석에서 잿빛 빛의 진법이 나타나 누군가를 토해냈다.

    “음괄!”

    그 기운을 감지한 석천공도 놀라 몸을 돌렸다.

    음험한 인상을 지닌 창백한 얼굴의 사내는 백장구에서 그들을 고생시켰던 대라경 회선 음괄이었다.

    음괄은 석천공과 호삼 쪽을 훑고 바로 공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음승전 분혼이 회백색 여우와 격전을 펼치며 대치하고 있었다.

    아래쪽 뇌전 연못 중앙의 십자 나무판에서는 류기 노조가 고개를 들고 냉소를 흘렸다.

    “역주 대인께서 어찌 이곳에…….”

    음괄이 겁에 질려 입을 열었다.

    “음괄 장로,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가? 어째서 이곳에 들어온 것이지?”

    “역주께 아룁니다. 유락이 구유족을 배신하고 유뢰에 갇혀 있던 이종족들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금지에 침입해 혼후까지 풀어 준 것을 알고 그들을 쫓아 이곳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음승전 혼백을 향해 허리를 굽힌 음괄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려왔다.

    음괄을 내려다보는 음승전의 눈빛이 순간 험악해 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고 하나 성지에 침입한 것은 규칙을 어긴 것이다. 당장 저 버러지들을 죽여 없애면 공로를 생각해 벌을 내리지는 않겠다.”

    “역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음괄이 기뻐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하, 회계를 다스리는 패주 중 한 명답게 수하를 속이는 데도 아주 위엄이 넘치는구나. 내가 이곳에 침입한 이들을 셋 정도 보았던가? 그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자는 이름이 음탁이었던 것 같은데……. 네게 수행을 흡수당하고 뇌전 연못 속에 버려진 대라경 회선 말이다.”

    류기 노조가 허튼소리를 한다는 듯 웃음을 흘렸고 그 소리에 음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음탁 장로가 갑자기 실종된 일은 그들 사이에서도 의문이었다.

    “늙은 여우가 이간질을 놓는구나. 구유역 역주인 내 말은 곧 법이다. 어찌 한 번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겠느냐.”

    “역주님 안심하십시오. 제가 저 버러지 같은 것들을 깨끗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음승전 분혼의 말에 음괄이 눈빛을 바로 하고 공수를 했다.

    “세 치 혀를 휘두르는 늙은 여우의 목은 이 자리에서 잘라내야겠군.”

    음승전은 더는 음괄을 상대하지 않고 류기 노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네놈들의 혼백을 뽑아내 영원히 윤회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음괄은 석천공 등에게 고개를 돌리고 이를 갈았다.

    석천공은 뒤쪽 은색 연못에 몸을 담그고 있는 한립을 보고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석 수사, 이거 큰일입니다.”

    호삼이 씁쓸하게 웃음 지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숨겨 놓았던 수법이 있다면 전부 펼쳐보세요. 류기 노조께서 계시니 아직 한 줄기 희망은 있는 셈입니다.”

    석천공이 목소리를 높여 호삼의 의지를 북돋았다.

    “흥, 한 명은 겨우 금선에 나머지는 태을경 밖에 안된 것들이 나와 붙어 보겠다? 웃기는 소리!”

    음괄이 허리춤의 검은 인장을 떼서 던져 올렸다.

    그의 손을 떠난 네모난 인장에서 ‘포라만상’이라는 네 글자가 빛을 발하고 석천공을 으깨려 들었다.

    묘한 빛을 띤 석천공은 수결을 맺으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쾅!

    그런데 어쩐 일인지 검은 인장의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져 눈 깜짝할 사이에 석천공을 치고 건너편 벽과 충돌했다.

    “석 형!”

    막 소리를 지른 호삼의 몸에서 번득 핏빛 덩어리가 터졌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린 음괄은 참혹한 꼴로 연못에 들어가 있는 한립과 그 주변의 은색 뇌전을 보고 눈동자 깊은 곳에서 두려운 빛이 스쳤다.

    카차차차.

    그때 자기 그릇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인장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인장과 벽 사이에 깔려 있던 석천공이 수결을 맺은 두 손바닥 사이에 호두알 크기의 패옥(佩玉)을 들고 공간 파동을 방출하고 있었다.

    공간 파동이 장벽을 이루어 석천공과 검은 인장 사이를 막고 있었다.

    “네 놈이 공간법칙을 익힌 것을 깜빡하고 있었구나.”

    음괄이 혀를 차며 손바닥을 펼쳤다.

    펑!

    산을 허물 것 같은 괴력이 인장 위쪽에서 내려앉아 공간장벽을 부수었고, 석천공의 손바닥 사이에 끼어 있던 패옥도 깨져버렸다.

    입에서 피를 토한 석천공은 검은 인장을 벽으로 밀면서 전신에서 대량의 은빛과 검은빛을 방출했다.

    근육이 튀어 오르고 몸이 팽창하면서 동전 조각만 한 검은 비늘들이 그 위를 빼곡하게 덮었고 사지와 가슴에 복잡한 은색 주술문자들이 떠올랐다.

    석천공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급속도로 자라나고 훤칠하던 얼굴에 송곳니가 솟아 산봉우리만 한 거대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등과 겨드랑이 아래에서 네 개의 팔이 불쑥 튀어나와 붕붕 허공을 저었다. 은색 광채들이 겹겹이 퍼져 그를 억누르던 검은 인장과 대치했다.

    쿠쿵.

    검은 인장이 잠시 버티다 놀랍게도 음괄 쪽으로 날아올랐고, 눈썹을 끌어올린 음괄은 소매를 저어 작게 줄어든 인장을 거두었다.

    “겨우 그 실력으로 나와 해보겠다는 것이냐?”

    음괄은 본 모습을 드러낸 석천공을 멸시하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다른 손으로는 쫙 펼쳐 검은 태양처럼 빛덩이를 만들어냈다.

    “음?”

    그 순간,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음괄의 눈앞이 뿌옇게 변하더니 그의 피부가 흩어지면서 피와 살이 뭉쳐 요사스러운 핏빛 꽃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피와 살을 잡아먹고 더없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도 음괄은 냉소했다.

    “너희 선계만은 못해도 회계에도 꽃 구경할 곳은 널렸다. 이런 잔재주를 구경할 기분이 아니니 환술을 거두지 그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왕성한 꽃들과 달리 시들어가는 그의 육체를 보며 음괄은 자신이 정말 환술에 빠진 것이 맞는지 헷갈렸다.

    “없어져라!”

    그가 재빨리 주문을 외고 소리치자 주변 풍경이 깨지면서 몸에서 피어나던 핏빛 꽃들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석 형, 지금입니다!”

    멀리서 호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디리링.

    호삼의 목소리와 맞물려 비파 소리가 대청을 울렸다.

    막 환술에 벗어난 음괄은 눈앞에 누군가 은색 비파를 안고 피가 줄줄 흐르는 손가락으로 연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딩, 디링. 디디딩, 딩…….

    연주 소리가 빨라질수록 은색 수정빛이 비파의 현을 타고 흘렀다. 음괄은 은색 수정빛을 보고 섬뜩한 느낌에 오한이 들었다.

    라타비파에 선령력을 죄다 빨리면서도 석천공은 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가라!”

    선령력이 거의 막바지까지 흘러 들어갔을 때 그가 손을 놓았고 날카로운 은색 수정빛이 튀어 나갔다.

    수정빛이 비파를 떠나는 순간, 곧바로 음괄의 심장 앞에 나타나 파고들었다.

    파삭!

    일촉즉발의 순간 음괄의 가슴 앞에 검은 인장이 나타났고 절반이 갈라졌다. 인장의 절반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머지 절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찰나의 시간을 번 음괄은 검은 뇌전으로 변해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의 속도는 역전진륜 신통을 사용한 한립과 맞먹었으나 인장을 뚫은 은색 수정빛을 온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파치칙!

    대청 구석에 검은 뇌전을 번득이고 나타난 음괄은 왼팔과 왼쪽 어깨가 말끔하게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상처 부위에는 아직도 공간법칙의 여파가 남아 있어 단시간 내로 피와 살을 재생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정신을 차린 음괄이 고개를 들어보니 석천공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은색 비파를 붙들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끌끌, 대단한 공간 선기로구나. 대라경 수사가 그걸로 공격했다면 나도 속수무책으로 당했겠으나, 겨우 금선 주제에…….”

    음괄은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뻗어 새까만 살뢰(煞雷)들을 석천공을 향해 뿜었다.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석천공이 살뢰에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때 호삼이 번개처럼 그 앞을 막아서고 등 뒤에서 9개의 굵직한 하얀 여우 꼬리를 펼쳤다.

    콰콰쾅!

    여우 꼬리들이 종횡무진하며 검은 뇌전을 막으려다 새까맣게 타 들어가고, 호삼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다른 방책을 세우기도 전에 음괄의 검은 신영이 날아들어 그의 두 어깨를 발로 짓밟았다.

    콰직!

    음괄의 두 발에서 검은 뇌전이 빠져나와 호삼의 어깨를 관통했다. 호삼은 왼쪽과 오른쪽 팔뼈가 깨지면서 두 다리가 바닥 깊이 박혀 들어갔다.

    “네가 먼저 죽고 싶다니 자비를 베풀어 소원대로 해주마.”

    음괄은 오른손에 검은 살뢰를 응결해서 호삼의 머리를 뽑아내려 했다.

    ‘끝이다!’

    바닥에 박힌 호삼은 꼼짝없이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촤지직!

    그때 은색 뇌전이 뇌전 연못에서 튀어 올랐다.

    눈살을 찌푸린 음괄은 호삼을 공격하던 손을 비틀어 다섯 손가락 끝에 새까만 뇌전구슬들을 응결했다.

    쿠콰콰쾅!

    연달아 충돌음이 들리고 검은 뇌전실과 은색 뇌전빛이 녹아내렸다.

    그런데 은색 뇌전 몇 줄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화살처럼 음괄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안색이 급변한 음괄이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왼쪽 갈비뼈 아래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퍼펑.

    음골은 그 충격으로 대청 벽까지 날아가 부딪쳤다.

    “이럴 수가.”

    은색 뇌전실들이 파고들어 아직도 치직 거리는 상처를 보고 음괄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은색 뇌전은 독충처럼 뿜어져 나오는 흉살기들을 잡아먹으며 그의 몸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두 팔로 석벽을 내리치고 우수수 떨어지는 바위 속에서 몸을 일으킨 음괄은 노기를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뇌전연못의 은색 뇌전 기둥 속에서 평범한 얼굴의 사내가 한 걸음씩 걸어 나오고 있었다.

    새까맣게 탄 한립은 의복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피부는 용암을 뒤집어 뜬 듯 새빨갛게 갈라져 검은 흉살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으나 눈빛만은 아주 맑았다.

    동공의 회백색이 씻은 듯 사라지고 새까만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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