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화. 두 번째 사슬을 끊다

*

음률의 파문은 크고 작은 주술문자로 변해 류기 노조의 머릿속으로 흡수되었다.

공중에서는 음승전이 기세등등하게 회백색 여우를 대청 구석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죽어라!”

그의 두 손에서 잿빛 안개가 피어올라 한줄기씩 의식 정사를 이루고 네 개의 회색 손바닥으로 주입되었다.

거대 손바닥들이 내뿜는 의식 파동이 기다란 비단 천처럼 이어져 여우의 퇴로를 끊은 것이다.

“날 죽이기가 그리 쉬울 것 같으냐!”

돌연 사람의 말을 내뱉은 여우가 맹렬하게 빛을 발하면서 갑자기 힘이 솟아오른 듯 9개의 꼬리를 휘둘렀다.

첩첩이 잿빛 파동이 나타나 끝없이 밀어닥치는 파도처럼 주변의 회색 천들을 강타했다.

회색 천이 파도에 휩쓸려 깨끗하게 사라지자 음승전은 뒤늦게 회백색 보호막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고 대노했다.

“음승전, 저런 인재를 곁에 두고 잡아다 제련할 계책이나 세운 네 업보다! 어디 오늘 내게 실컷 두들겨 맞아 보아라!”

여우가 박장대소를 하며 9개의 꼬리를 꼿꼿하게 세워 헤아릴 수 없는 꼬리털들을 화살처럼 쏘아 올렸다.

그러자 네 개의 회색 손바닥들은 강철 침에 숭숭 구멍이 뚫려 쿵! 하고 흩어졌고, 남은 꼬리털들은 음승전을 향해 비처럼 떨어졌다.

음승전이 재빨리 피하자 여우도 몸을 뒤틀어 그 뒤를 쫓았다.

그 사이 회백색 보호막 아래에서는 한립 무리가 보라색 뇌전 연못 옆에 도착해 있었다.

츠즈즈즛.

류기 노조가 이미 보라색 연못의 뇌전의 힘을 누그러트렸지만, 바깥에서 내려다보기만 해도 그 위력은 푸른 뇌전 연못의 몇 배나 되었다.

눈을 반짝인 한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 속으로 첨벙 뛰어들었고 뒤이어 보라색 물보라가 쳤다.

석천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호삼 만이 잠시 주춤거리다 걸음을 떼지 않았다.

“…….”

그는 어차피 태을경에 이른 데다 체내에 쌓인 흉살기도 푸른 연못에서 대부분 씻어 내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보라색 뇌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보다는 기운을 축적하고 있다가 한립과 석천공이 나오면 힘을 합쳐 노조의 나머지 사슬들을 끊는 것이 중요했다.

생각을 마친 호삼은 뇌전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양손에 선원석을 쥐고 선령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한립이 안으로 들어서자 연못의 보라색 뇌전들이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처럼 달려들어 그를 나선형으로 감싸고 뇌전 기둥을 이루었다.

파치치치칙!

어느새 한립의 피부는 핏빛으로 물들어 온몸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뇌전이 닿을 때마다 미간이 검게 물들면서 의식세계가 살육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의 몸 안에서 강력한 흉살기 파동이 폭발적으로 일고 있었다. 강제로 억눌러둔 살쇠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괴로워하는 한립을 보던 호삼은 보라색 연못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멀리서 술법을 펼치던 제혼은 한립의 그런 모습을 걱정스러워했다.

한립의 몸 위로 산악거원, 오채봉황, 오색공작 등 진령허상들이 하나씩 떠올라 이전보다 훨씬 또렷한 모습을 보였다.

뇌전 연못은 강렬한 훼멸의 힘 속에 부활의 능력을 함유하고 있어 각종 진령혈맥이 푸른 뇌전에 씻겨 더욱 정순해진 덕이었다.

지금 진령혈맥이 강해진 것은 한립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 부담이었다.

그러나 길게 호흡을 이어나가는 한립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차피 푸른 연못에서 한번 겪어 익히 예상하던 바였다.

연신술을 운용하면서 강대한 의식의 힘으로 살육에 대한 충동을 억누르고 동시에 대주천성원공을 이용해 오장육부 등 중요 기관을 보호하면서 나머지 부분에는 보라색 뇌전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했다.

흉포한 뇌전의 힘이 밀려들자 깊숙이 숨어 있던 흉살기들이 난동을 부리면서 그의 몸 주위로 검은 증기가 모락모락 솟구쳤다.

이제 선규 안으로도 보라색 뇌전빛이 차올라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있던 흉살기까지 조금씩 배출시키고 있었다.

흉살기가 씻겨나갈수록 머리가 가벼워지고 두 눈도 맑아졌다.

그러나 푸른 연못에 비해 더 고통스러워서 이를 악물고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향 하나가 탈 시간이 지나갔다.

한립의 전신은 크고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지만 눈을 감은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대량의 검은 흉살기를 끊임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별안간 흉살기 흐름이 느려지고 눈꺼풀을 꿈틀거린 한립은 눈을 번쩍 뜨고 날아올랐다.

촤지지직!

주변의 보라색 뇌전이 꼬리처럼 그를 따르면서 그물을 펼쳐 붙잡으려 들었다.

작게 코웃음을 친 한립은 체내의 진언보륜을 급속도로 회전해 역전진륜 신통으로 금빛 허상으로 변했다.

보라색 연못은 그를 쉽게 놔주지 않았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현천호리병까지 사용해 벗어날 수 있었다.

보라색 뇌전 그물 일부가 호리병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목표를 잃은 보라색 뇌전들은 포효하다가 다시 연못 안으로 돌아 들어갔다.

연못에서 벗어난 한립은 즉시 회복용 단약 몇 개를 꺼내 삼키고 전신의 상처를 아물게 했다.

“려 수사, 어떠십니까? 노조께서는 제혼 수사의 도움으로 버티고 계시지만 이대로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을 듯합니다. 나머지 사슬 3개를 끊어야 우리도 살 수 있을 거예요.”

호삼이 그를 향해 전음을 보내왔다.

“알고 있습니다. 석 수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일단 몸을 회복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아직도 연못에 앉아 있는 석천공을 돌아보았다.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고 미간이 새까만 것이 오랜 세월 비술로 감춰둔 살쇠가 폭발한 게 틀림없었다.

한립은 석천공의 흉살기가 자신보다 옅기에 조금만 더 버티면 살쇠를 이겨내고 태을경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보라색 연못의 효과가 다했는지 석천공 체내에서 흘러내리던 검은 기운이 줄어들어 버렸다.

그걸 본 한립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연못에서도 완전히 흉살기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다.

번쩍 눈을 뜬 석천공이 빠져나오려 하는데 보라색 뇌전들이 따라붙어 그물을 이루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촤지지직!

이에 석천공은 은빛을 일으켜 연꽃 봉우리를 이루고 회전했다. 연꽃잎들 속에 숨겨져 있던 은빛들이 칼날처럼 보라색 뇌전 그물을 자르고 구멍을 만들어냈다.

구멍으로 빠져나온 석천공은 안 그래도 엉망이 된 몸 상태에 비술까지 펼쳐 뇌전 그물을 벗어나느라 울컥 피를 토해냈다.

석천공은 한립과 호삼이 안부를 묻기도 전에 약병을 꺼내 안에 든 단약을 전부 입에 털어 넣고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하, 까딱 잘못했으면 저세상 구경을 할 뻔했습니다.”

잠시 후, 길게 숨을 내쉰 석천공이 고개를 들고 한립과 호삼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두 번이나 세살지에 몸을 담그고 살아남은 게 용하지요.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호삼이 안부를 묻자 석천공이 답을 하고는 한립을 보았다.

“이제 시작하시죠.”

그걸 신호로 한립이 보라색 뇌전 연못 옆으로 날아가 해 도인을 불러냈다.

“해 수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해 도인이 알겠다고 답하자 한립은 천호화혈도를 불러내 두 손으로 쥐고 금빛을 일으켰다.

선령력이 흘러 들어간 장도의 문양이 다시 짙은 핏빛 기운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이에 호삼, 석천공 그리고 해 도인도 동시에 손을 뻗어 체내의 선령력을 한립에게 불어넣어 주었다.

네 사람의 선령력이 융합되어 출렁출렁 천호화혈도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후우우웅.

천호화혈도의 진동이나 기운이 이전보다 훨씬 강했다. 겹겹이 나타난 장도 허상도 만 층은 되는 듯했다.

“도와주십시오, 석 선배님!”

마음속으로 크게 외친 한립은 기합을 넣으면서 장도를 내리찍었다.

천호화혈도의 여우 머리가 빛나고 거대한 핏빛 여우 허상이 나타나 장도 속으로 들어가자 한립 무리의 선령력도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이미 한 번 겪은 일이라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천호화혈도는 배로 커지고 수정처럼 투명해지더니 그대로 보라색 사슬을 갈랐다.

콰콰쾅!

보라색 뇌전 연못이 펄펄 끓는 기름 솥이라도 된 듯 부글거리고, 거대하기 짝이 없는 뇌전 구슬이 나타나 사슬을 타고 류기 노조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뇌전 구슬이 사슬을 절반밖에 건너지 못했을 때 보라색 사슬은 굉음을 내며 핏빛 장도에게 의해 깨져버렸고, 뇌전 구슬도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첨벙.

모든 것이 보라색 광채에 가려졌다가 빛이 가시자 잘려나간 사슬 절반이 뇌전 연못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잘들 했다!”

류기 노조가 크게 기뻐하며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패도적인 기운이 하얀빛을 타고 대청 전체를 웅웅 울렸다.

“제길.”

음승전 분혼이 날카롭게 한립 무리를 노려보고 두 손으로 허공을 내리쳤다. 그러자 네 개의 회색 손바닥이 나타나 하나로 합쳐지더니 산처럼 류기 노조를 향해 떨어졌다.

“으하하, 두 번째 봉인까지 풀렸는데 나를 붙잡아 둘 수 있을 것 같더냐!”

류기 노조는 놀랍게도 거대한 몸을 일으켰고 남아 있던 사슬 두 개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콰쾅!

회백색 거대 구미호의 앞발이 거침없이 날아가 산처럼 커다란 회색 손바닥을 깨부수었고 음승전은 뒤로 밀려났다.

* * *

타호구 회장.

영주들은 각자의 의견을 말하면서 이전의 활기찬 분위기로 돌아가 있었다.

음승전도 미소를 띠고 앉아 여전히 회맹을 이끌어 뭔가 반응을 기대하던 황보옥은 실망했다.

그런데 그때 황보옥 뒤의 교삼이 눈을 반짝였다.

“황보 궁주, 우리 쪽 사람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세혼구 쪽에 변고가 있다고 합니다. 음승전이 말한 보물 제련 과정의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수라성에 침입해서 소란을 피우는 중이라는 군요.”

교삼의 목소리가 황보옥의 머릿속에 울렸다.

“오, 간 크게 수라성에 침입을 한 자가 있다.”

“궁주, 상황이 변했는데 어찌할까요?”

“우리쪽 인물들도 계속 수색하면서 소란을 피우도록 하게. 구유역에서 눈치채게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교삼이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고 고개를 숙였다.

음승전은 다른 역주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황보옥 쪽을 살피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에서 보라색 문양이 번득이고는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미소를 띠던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 * *

금지 안.

창백한 얼굴로 천호화혈도를 거둔 한립은 선령력 회복용 단약을 복용했다. 호삼과 석천공도 단약을 복용해 겨우 선령력을 충당하고 있었다.

선원석을 이용해 내부기관이 움직이는 해 도인은 천호화혈도에게 남은 힘을 빼앗겨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이를 본 한립은 푸른 빛을 날려 해 도인을 화지 공간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화지 공간 안에는 선원석이 충분해서 해도인 스스로 힘을 보충할 수 있었다.

호삼은 회백색 여우가 음승전을 밀어 붙이는 것을 보고 한립과 석천공을 향해 공수했다.

“려 수사, 석 형,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나머지 사슬 두 개를 잘라내면 되겠습니다. 노조께서 자유를 되찾으시면 두 분이 세 번째 뇌전 연못에 들어가 있는 동안 호법을 서주실 수 있겠지요.”

“안 됩니다.”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십니까? 지금 상황에 노조께서 풀려나지 못하시면 음승전의 분혼은 몰라도 다른 조력자들이 몰려올 겁니다. 게다가 노조의 비호 없이는 세 번째 뇌전 연못에 들어갈 방법도 없지 않습니까?”

호삼이 얼굴을 찡그리며 불만스럽게 물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뇌오사슬은 평범한 금제가 아닙니다. 류기 선배님께서 말씀해 주신 사슬의 반격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두 분은 직접 사슬과 접촉하지 않아 느끼지 못했겠지만, 사슬을 자를 때마다 반격해 오는 힘에 류기 선배님과 장도를 쥔 제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사슬에 상응하는 뇌전에 들어가 근원적으로 같은 뇌전의 기운을 흡수하지 않고는 다음 사슬을 자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류기 선배님께서도 이를 아셨기에 우리에게 먼저 흉살기를 씻어 내게 하신 걸 테지요.”

한립은 손을 들어 그 위에 서린 보라색 광채를 보여주었다.

“그랬군요. 하지만 지금은 노조께서 비호를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라…….”

“호삼 수사의 말대로 상황이 이런데 목숨을 걸고 도전하지 않는다면 모두 죽은 목숨일 겁니다. 제 운명은 제 손으로 개척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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