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화. 사제 간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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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수사, 우릴 갈라놓으려는 수작입니다! 수라성 곳곳에 경비가 삼엄할 텐데 홀로 떠나다 잡히면 끝이에요. 모두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노조님을 구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호삼이 다급히 입을 열었고, 한립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를 힐끗 보았다.
“수작? 오면서 보았겠지만, 지금 수라역은 중요한 일이 있어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리고 겨우 금선들 몇 명이 뭐라고 내가 신경을 쓴단 말이냐?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면 너희에게 구유령을 내주지.”
음승전은 담담히 말하며 제혼 앞으로 새까만 금속 영패를 날려 보냈다. 류기 노조가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님, 이 구유령은 사방에 퍼진 진법을 전부 다스리는 거대 진법 핵심을 조종할 수 있는 영패예요. 구유족 전체에도 다섯 개 밖에 없는 물건이죠.”
제혼이 그걸 받아들고 한립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는 혼후를 풀어 주었고 지금의 혼란에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를 그냥 보내주시겠다니 연유를 모르겠군요.”
“흥,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너를 살려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지금 난 본체가 아니고 이 자리에 류기가 있기에 너를 보내줘 변수를 줄이려는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의 질문에 음승전이 냉랭히 답했다.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죄송하게도 저는 류기 선배님을 돕겠다고 벌써 약조하여 그 제안에는 응하지 못하겠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한립의 말에 호삼의 얼굴이 밝아지고 류기 노조의 미간도 펴졌지만 제혼은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지 않다면 맘대로 해라! 낙아, 너도 스승이 자비를 베풀었지만 저 녀석이 거절한 것을 보았을 것이다. 너라도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 이 혼란한 상황에서 벗어나거라.”
음승전은 수결을 맺었고 지면의 거대 진법에서 하얀빛이 흘러나와 제혼이 뭐라 하기도 전에 그녀를 감싸고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잿빛이 반짝이며 거대한 꼬리가 그녀를 붙들었다.
쉭!
갑자기 안색이 달라진 음승전이 류기 노조의 머리를 향해 분노에 찬 주먹을 날려 보냈는데, 주먹 끝에서 집채만 한 악귀 머리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회색빛을 분출했다.
키케케케.
그 소리가 어찌나 괴상한지 듣는 이를 지옥의 심연으로 떨어트릴 것 같은 죽음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한립, 호삼, 석천공은 갑자기 혼백이 격동해서 의식의 힘이 흩어지려는 증상을 보였다.
이에 류기 노조는 두 앞발을 휘둘러 회백색 빛으로 보호막을 만들어 그들과 네 곳의 뇌전 연못을 가려주었다. 그러자 괴상한 소리가 조금 줄어들었다.
동시에 중년 사내의 허상이 흐릿하게 나타나 음승전 앞을 가로막았다.
“저들을 해치려면 나부터 지나가야 할 것이다.”
중년 사내가 웃음을 흘리며 수결을 맺고는 양손을 뻗어 회백색 막대기 허상을 날려 보냈다.
막대기 허상 양 끝에는 각각 용과 비슷한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맴돌고 있었고, 강력한 혼백 파동을 발산했다.
콰릉!
허공에서 주먹 허상과 막대기 허상이 충돌해서 태양처럼 빛이 번지고 실체를 지닌 의식 파동이 맹렬하게 폭발해 허공을 일그러트렸다.
언제라도 공간이 깨질 것 같았다.
달걀처럼 얇은 회백색 보호막은 바깥쪽이 파치직 터지면서 흔들리다가도 충격을 버텨냈고, 공중의 중년인과 음승전은 충돌의 여파로 비틀거리며 튕겨 나갔다.
“류기, 어린 후배를 잡아가려 하다니 그러고도 얼굴을 들고 다니겠다는 것이냐.”
몸을 가눈 음승전은 바로 공격하지 않고 분노해 소리쳤다.
“쯧쯧, 광명정대한 척하기도 힘들 텐데 그만하시지. 그간 우리가 서로 다투며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 말이야?”
바닥의 류기 노조는 제혼을 감은 꼬리에 힘을 주고는 그녀를 감싼 하얀빛을 깨트려 버렸다.
이에 제혼은 몸부림치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반항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음승전의 동공이 수축했다.
“꼬마야, 네 본체는 형수(刑獸)겠지? 음승전은 너를 제자로 거두고 전력으로 수행을 쌓는 것을 도와주면서 심지어 자신의 족인을 잡아다 죽여 혼백을 취해 네게 먹이기까지 했을 것이야, 그렇지 않더냐?”
류기 노조는 그런 음승전을 비웃고 제혼을 향해 물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제게 크나큰 은혜를 베푸셨어요.”
“그럼 어째서 널 그리 총애하고, 네 수행을 높이기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알고 있느냐? 너도 겪어 봤으니 음승전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고 있을 텐데.”
스승의 눈치를 살피던 제혼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창백해져 입을 열고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런 의문은 그녀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음승전이 워낙 잘해주었기에 애써 그 답을 구하기를 피해왔었다.
여기까지 들은 한립은 눈썹을 꿈틀했다.
“구유족인이 유혼충을 이용해 다른 수사들을 조종한다는 것은 알 것이다.”
웃음을 흘린 류기 노조는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류기 선배님, 그게 제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대충 윤곽이 잡힌 한립이 확실히 하기 위해 물었다.
“난 과거에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고 회계로 흘러들었다가 음승전에게 잡혀 이곳에 갇혔다. 음승전이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은 내 천환법칙(天幻法則)을 눈독 들이고 있기 때문이지!
귀매법칙(鬼魅法則)을 수련한 그가 나를 유혼괴뢰로 만들면 쌍방의 법칙을 융합해 위력을 배로 만들 수 있거든. 아마 그렇게 되면 회계에서 그의 적수가 될만한 인물은 없을 테고.”
류기 노조는 차갑게 그가 아는 바를 술술 털어놓았고 제혼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색이 창백해졌다.
“문제는 도조경에 이른 노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음승전도 실력이 뛰어난 유혼충이 필요하단 거였지. 보통 혼백으로는 제련할 수 없어 형수인 너를 기른 것이다. 넌 형수 그 자체로 뛰어난 혼백을 지닌 데다 악귀나 다른 혼백을 집어삼킬 수 있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으니 유혼충을 제련하기에 더없이 좋은 재료지. 아마 처음 너를 보았을 때는 수행이 너무 낮아 대라경까지 배양해서 제련하려 했을 것이다.”
류기 노조가 유유히 말을 마치자 제혼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한립은 그녀의 심정을 알았기에 탄식했다.
그도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의 음모에 당할 뻔했었고 아주 오래된 일이었지만 그 일이 길고 긴 그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사존, 이게 사실인가요?”
천천히 고개를 든 제혼이 음승전을 직시했다.
“흐흐, 사이 좋은 스승과 제자 놀이도 여기서 끝이구나. 하긴 이 정도면 재미있었다.”
음승전은 평온한 얼굴로 웃었지만 표정은 더없이 싸늘했다. 이에 제혼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고 음승전을 보는 한립의 눈빛에 냉기가 어렸다.
“류기, 네가 나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래서 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 동안 내가 기다려준 이유도 알겠나?”
음승전이 쓱! 하고 류기 노조를 돌아보았다.
움찔한 류기 노조가 갑자기 제혼을 보고는 이변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화앗!
돌연 제혼이 들고 있던 구유령이 터지면서 검은 기운 두 줄기로 변했다.
하나는 흐릿하게 곤충의 모습으로 변해 꿈틀하면서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나머지 하나는 검은 비수로 변해 잔영을 남기면서 지척에 있는 류기 노조의 가슴을 노렸다.
깜짝 놀란 류기 노조는 십자 나무판에 묶여 있어 피할 수 없었기에 앞발을 들어 다섯 발톱에서 잿빛을 일으켰다.
그런데 검은 비수가 불현듯 꿈틀거리며 뱀처럼 발톱 사이를 지나 류기 노조의 가슴 속으로 사라졌다.
쾅!
류기 노조의 가슴이 갈라지고 피가 주위로 튀며 그의 몸을 관통하는 구멍이 노출되었다. 그러자 거대 여우 본체가 왈칵 입에서 피를 뿜었고, 공중의 중년인 허상이 한층 옅게 변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한립 무리를 보호하던 회백색 보호막도 어둑해졌다.
류기 노조가 여우 꼬리를 풀어 주자 바닥으로 떨어진 제혼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흐릿한 곤충 허상이 꿈틀꿈틀 그녀의 뱃속을 기어 다니면서 체내의 원기를 갉아먹는 중이었다.
“노조!”
호삼이 류기 노조 옆으로 향했고, 한립은 제혼에게 날아들어 의식으로 그녀의 몸을 살피고 얼굴이 굳었다.
“하하하, 서선비(噬仙匕) 맛이 어떠하냐!”
음승전은 말을 하면서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회색 거대 손바닥이 떠올라 실처럼 잿빛 안개를 감고 중년인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무시무시한 혼백 파동이 거대 손에서 퍼져 나와 회백색 보호막안에 있던 한립 무리는 눈이 풀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중년인 허상이 눈을 번득이고 주먹을 날리자 회백색 빛이 빛기둥을 이루고 회색 손바닥을 공격했다.
쿠콰콱!
굉음이 들리고 회백색 빛기둥이 열세를 보이며 손가락 한마디씩 꺾여 나갔고, 그때 회색 손바닥이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려 중년인 허상을 잡아 비틀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중년인 허상이 흩어졌다.
그러나 음승전은 좋아하는 기색도 없이 주위를 재빨리 살피고 양손을 다른 쪽으로 뻗었다.
전신에서 잿빛이 번득여 아까와 똑같은 회색 거대 손이 무려 네 개나 주변을 휩쓸었다.
휘이잉-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주변 풍경이 달라지더니 중년인 허상이 멀지 않은 곳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쪽 회백색 보호막 안에는 류기 노조와 제혼 그리고 한립 무리가 전혀 다치지 않은 모습으로 멀쩡하게 서 있고, 류기 노조 앞에는 회백색 빛구슬이 둥실 떠서 파문을 퍼트리고 있었다.
검은 비수와 검은 곤충 허상이 빛구슬에 갇혀 이리저리 튀어 나가려 했지만 달아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 ‘남가일몽’ 신통을 이리 빨리 벗어나다니 음 역주답습니다.”
류기 노조가 입을 벌려 하얀 빛구슬을 삼켜 버리고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음승전을 조롱했다.
그 말이 자극이라도 된 듯 눈을 부릅뜬 음승전은 맹렬히 한 손으로 허공을 쥐어뜯었다.
쿠르릉!
네 개의 회색 손바닥이 파도처럼 혼백의 기운을 뿜어내면서 이전보다 몇 배로 커졌다.
바닥에 선 류기 노조도 신중한 얼굴로 두 앞발을 움직여 빼곡하게 법결들을 날려 보냈다.
절반은 회백색 보호막으로 흡수되고 나머지 절반은 공중의 중년인 허상으로 스며들었다.
중년인 하상은 허공에서 빙글 돌아 거목 크기의 회백색 여우로 변해 9개의 꼬리를 휘날려 회백색 파랑으로 거대 손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회백색 파랑은 얇은 종잇장처럼 뚫렸고 여우 허상도 튕겨 나가 대청 벽에 쿵! 하고 부딪혔다.
“음승전이 열을 받아 전력을 다하면 나도 오래 버틸 수 없다. 너희는 어서 흉살기를 제거하고 나를 도와 사슬을 자르도록 해라!”
류기 노조가 명을 내리자 한립, 석천공, 호언은 재빨리 보라색 뇌전 연못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제혼은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공중의 음승전을 싸늘하게 올려다보았다.
회백색 여우 허상은 중상을 입지는 않았는지 얼른 몸을 일으켜 음승전 허상과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류기 선배님, 저도 돕겠습니다.”
“꼬마야, 네 실력이 꽤 쓸 만하지만 도조끼리의 싸움에 끼어들기에는 아직 이르다.”
류기 노조가 제혼을 잠시 내려다보고 말했다.
“당연히 도조들의 전투에 제가 직접 나서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소녀, 본체가 형수인지라 제 혼백의 힘을 이용해 다른 이의 혼백의 힘을 증폭시키는 비술을 펼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수행이 저보다 높을수록 효과가 미약하겠으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겠는지요.”
“그렇다면 좋다. 그저 보호막을 나서지만 말거라.”
류기 노조는 제혼의 말에 눈에 이채가 어리며 허락했다.
이에 제혼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주문을 외워 그의 머리 위로 네 덩이의 검은 수정빛을 뿜었다.
검은 수정빛들이 각각 칠현금, 장구, 피리, 공후로 변해 류기 노조의 사방으로 날아갔다.
춤을 추듯 두 손을 움직이는 제혼의 미간에서 수정빛 실들이 법결로 변해 악기들로 나풀나풀 떨어져 내리고 신비로운 음률이 파문을 이루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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