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화. 분혼(分魂)
*
향 하나가 탈 시간이 지나 한립 등 세 사람은 뇌전 연못 안의 고통에 익숙해졌고 선규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흉살기의 양도 줄어들었다.
호삼과 석천공은 한숨을 돌렸으나 한립은 걱정이 깊어졌다.
“그쯤 하면 되었다. 뇌전 연못마다 상황이 다르니 그 정도면 거기선 다 된 거야. 계속하다가는 괜히 몸만 상할 것이다.”
“선배님께서 푸른 연못에 몸을 담그면 살쇠를 넘길 수 있을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류기의 말에 한립이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너희더러 금선 주제에 그리 많은 흉살기를 품고 있으라 했더냐? 수행하면서 적잖은 살생을 했을 테지.”
류기가 자기 탓이냐는 표정으로 입을 비죽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고 판단한 한립은 몸을 날려 빠져나오려다 뇌전들이 그물처럼 변해 잡아끄는 탓에 다시 끌려 들어갔다.
호삼과 석천공도 시도를 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흉살기가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은 탓에 뇌전 연못이 계속해서 공격대상으로 여기는 듯했다.
한립은 진언보륜을 역전해서 금빛으로 변해 빠져나왔고 석천공은 비술을 사용해 탈출했다.
몸도 제일 허약하고 부상도 심했던 호삼이 태을옥선의 수행을 지니고도 가장 마지막에 연못을 빠져나왔다.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세 사람은 바닥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호삼은 온몸이 새까맣게 타서 곳곳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향기 좋은 태을급 단약을 꺼내 삼키자 상처가 저절로 봉합되기 시작했다.
석천공도 차분한 얼굴로 옅은 미소를 띠고 단약을 삼킨 다음 검은 안개를 둘렀다.
한립 피부의 붉은 기가 많이 가라앉자 제혼이 그 곁으로 가 괜찮냐고 물으려는데 그 전에 그가 먼저 고개를 저어 무탈하다는 표시를 했다.
그는 단약을 먹는 대신 연신술 5성의 고비를 넘긴 느낌을 만끽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지면 대성할 수 있을 듯했다.
그 후, 몇 개의 단약을 입에 집어넣고 그도 눈을 감았다.
“노부도 너희가 충분히 회복하게 기다려 주고 싶다만, 시간이 없다. 음승전이 삼역회맹 때문에 못 와도 수하들은 보낼 거야. 그들이 방해하면 너희가 사슬을 끊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알겠습니다.”
류기 노조의 재촉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삼은 태을경 수행을 지녀서 괜찮지만 너희는 선규 깊숙이 흉살기가 남아 있어 보라색 뇌전에 들어가 씻어내야겠구나.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서둘러라.”
“괜찮습니다. 흉살기를 씻어내고 사슬을 끊어드린다고 약속드렸지요. 아직 흉살기를 전부 몰아낸 것은 아니니 일단 첫 번째 사슬부터 끊어드려 성의를 표하겠습니다.”
한립도 상대가 그를 지긋이 쳐다보는 이유를 알았기에 이렇게 제안했다.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거라.”
류기 노조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석천공도 동의했다. 호삼이야 당연히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저희 넷이 전력으로 장도를 발동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한립이 핏빛 장도를 불러내 물었다.
“3품 선기를 제대로 발동하려면 많은 양의 선령력이 필요하다. 실력을 감추지 말고 온 힘을 다해서 단번에 사슬을 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슬의 반격에 나도 고생하고 너희도 중상을 입을 것이다.”
류기는 천호화혈도를 보고 미미하게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선배님, 안심하시지요. 저희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호삼과 석천공이 답하고 한립은 말없이 제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립이 가장 앞에 서고 나머지 셋이 그의 뒤로 가서 섰다.
‘석 수사…….’
단단히 천호화혈도를 쥔 한립은 석경후를 향해 의식연계로 말을 붙였다.
‘석 수사, 류기 노조와 무언가 갈등이 있었을 거라 짐작은 합니다만 지금은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여전히 석경후는 답이 없었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더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천호화혈도에 선령력을 주입했다.
도신을 따라 붉은빛이 번져나갔다.
그걸 본 호삼 등 세 사람은 허공에 양손을 펼치고 선령력을 마구 방출해 천호화혈도에 불어넣었다.
후우우웅.
장도를 쥔 한립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핏빛 검 그림자가 겹겹이 생겨나 헤아릴 수 없이 불어났다.
한립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기혈이 장도의 기운에 영향을 받아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장도의 기운이 특수해서 사용자의 기혈을 자극해 전력을 높이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때 류기 노조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의식으로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저 선령력을 불어넣었다.
도신의 핏빛이 강해지자 칼 콧등의 여우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때를 기다리던 한립은 그 순간, 앞으로 나서며 푸른 사슬 위로 장도를 힘껏 내리쳤다.
수많은 핏빛 검 그림자들이 연달아 푸른 사슬들을 가르기 시작했다.
채채채챙!
금속성의 충돌음이 들리고 사슬에 각인된 문양에서 햇살처럼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콰르릉!
푸른 연못이 자극을 받아 끓어올라 거대한 뇌전 구슬을 이루고 사슬을 따라 류기 노조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서 저걸 갈라!”
류기 노조의 고함에 한립 무리는 몸속의 선령력이 거의 텅 빈 것을 느꼈다.
그들의 선령력을 모조리 빨아들인 천호화혈도의 핏빛이 커지면서 검 그림자들로 뇌전 구슬을 조금씩 깎아 나갔다.
한립 무리가 뇌전 구슬이 제거되기 전에 선령력이 고갈될 거란 생각에 얼굴이 창백해진 사이 천호화혈도의 여우 머리에서 거대한 핏빛 여우 허상이 날아올라 검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우웅!
검 그림자가 진짜 핏빛 수정검처럼 선명하게 변해 구슬을 내리쳤다.
쾅! 촤르르릉.
뇌전 구슬이 터져 현란한 푸른 뇌전이 날리고 사슬도 끊어졌다. 끊어진 사슬들이 바닥에 떨어지자 푸른 뇌전은 연못 속으로 흘러 들어가 사라졌다.
“됐다!”
호삼이 환호를 하고 한립은 장도를 거둔 채 생각에 잠겼다. 석경후가 어째서 마지막 순간 도움을 준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석천공은 선령력이 고갈된 것이 불만인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제혼이 한립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부상이 덧나지는 않았느냐?”
“괜찮아요…….”
“으하하!”
고개를 쳐든 류기 노조가 더는 나른하게 누워있지 않고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푸른 사슬을 보면서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수라성.
타호구에서는 삼역회맹 결의대회가 한창이었는데 조금 전 변고 때문인지 역주들이 말을 아껴 분위기가 어색했다.
징.
삼역회맹을 개최한 음승전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려고 했으나 손가락의 회색 반지가 갑자기 덜덜 떨려왔다.
푸른색, 보라색, 은색, 금색 문양이 교차하는 반지의 푸른 부분이 갑자기 어둑해지더니 잿빛으로 변한 것이다.
얼굴이 굳은 음승전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다른 역주들이 그걸 못 보았을 리 없었다.
“음 역주,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그간 삼역회맹을 준비하시느라 피로가 쌓이셨나 봅니다.”
눈썹을 끌어올린 황보옥이 그를 떠보았다.
“아닙니다. 이번 회의를 위해 만 리 밖에서 찾아주신 여러분만 할까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계의 미래가 걸린 일인데 다들 당연히 참여해야지요.”
음승전이 담담히 답했고 소불야도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세혼구의 사고는 해결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저희에게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황보옥은 화제를 다시 세혼구 사고로 돌렸다.
“겨우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투표를 앞두고 정식으로 논의하는 첫날이니 그 이야기나 속 시원하게 나누시지요.”
음승전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회를 진행하자 황보옥과 소불야가 시선을 마주쳤다.
둘 다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이때 음승전이 남몰래 소매 속에서 회색 옥패 하나를 깨버렸다.
* * *
수라성 모처의 넓은 대청.
우아하게 꾸며 놓은 장소에 희색 보호막이 드리워있고 그 중간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백발의 파파노인은 천정의 풍청수였고, 두꺼운 입술에 서늘한 얼굴을 지닌 맞은편 사내는 음승전이었다.
이곳에 있는 음승전은 신형이 푸른 연기처럼 흐릿한 것이 본체가 아니었다.
“……!”
별안간, 얼굴을 구긴 음승전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었다.
“음 수사, 무슨 변고라도 생겼습니까? 어차피 여기서 차나 마시며 시간을 축내고 있는데 도움이 필요하면 제가 가보겠습니다. 의식 분신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풍청수가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관심은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제 통제 범위 내에 있습니다. 안심하시고 차나 드시지요.”
“그래도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맹우라 할 수 있는데 너무 경계하십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풍청수가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으나 음승전은 코웃음을 치고 번득 사라졌다.
* * *
그때 한립 무리는 류기 노조의 사슬을 하나 끊어놓고는 각자 단약을 복용하고 선원석을 쥔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뇌전 연못들 옆의 류기 노조도 십자 나무판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수결을 맺고 있었다.
문득 눈을 부릅 뜬 류기 노조가 어느 벽 쪽을 바라보았고, 그곳에 기이한 주술문자들이 몰려들어 잿빛의 흐릿한 신영을 만들어냈다.
한립 등도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존!”
제혼이 잿빛 인영을 알아보고 몸을 떨었다.
“제혼, 저자가 네가 말한 구유역 역주 음승전이란 말이냐?”
흠칫 놀란 한립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제혼이 대답하기 전에 회색 인영이 그들을 훑었고, 강력한 힘에 의식세계에 기습당한 것처럼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연신술!’
기겁한 한립은 즉시 연신술을 발동해 의식의 힘으로 놀란 혼백을 다스렸다. 거의 연신술 5성 대성을 앞두고 있던 터라 간신히 의식을 잃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동시에 그의 앞에 의식 사슬들이 나타나 그물을 치고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의식 사슬 그물이 파도처럼 그의 의식세계로 밀려들어 뒷걸음질 쳐야 했다.
팟.
몸을 부들부들 떤 석천공은 피를 토하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지만 머리 위로 은색 자물쇠를 불러내 화려한 은빛 보호막을 펼쳤다.
뒤로 물러나는 그의 머리 위에서 자물쇠가 끼익! 하고 갈라져 균열이 생기고 은빛 보호막이 옅어졌다.
안색이 급변한 석천공이 선혈을 자물쇠 속에 스며들게 하고 수결을 맺어 보호막을 유지했다.
휘휘휙.
호삼의 반응이 가장 빨라서 음승전이 그를 쳐다보려 하자 바로 뒤로 물러나며 하얀 부적들을 날렸다.
수십 장의 부적들이 수십 겹의 보호막으로 변하자마자 무형의 공격을 받아 깨져나갔다. 눈가를 꿈틀한 호삼은 두 손을 쉴 새 없이 움직여 하얀 부적들을 계속 날렸다.
부적 수십 장을 더 날리고서도 보호막들이 깨지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는 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네 사람 중에 제혼만 공격을 받지 않고 복잡한 얼굴로 구석에 서 있었다.
“허허, 음승전! 이제야 의식 분신으로 와볼 생각을 했구만? 허나 한발 늦었으니 이를 어쩐다.”
이때 류기 노조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그 목소리가 형체를 갖춘 것처럼 한립 등 세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쿠쿵.
세 사람은 허공에 거미줄처럼 공간균열이 생기고 주변 벽이 쩍쩍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류기 노조의 이마에서 수정빛이 빠져나와 회백색 솜옷을 입고 여우 가죽 요대를 찬 중년인으로 변해있었다.
“음승전, 네가 직접 왔다면 어쩌지 못했겠지만, 겨우 의식 분혼을 보내서 내 앞에서 이 녀석들을 상하게 하려는 것이냐?”
중년인이 냉소를 흘렸다.
음승전은 대꾸하지 않고 제혼에게 고개를 돌렸다.
“낙아, 네가 담도 크구나! 외부인을 세혼구로 불러들여 태고 혼후를 풀어주는 것도 모자라 류기까지 풀어주려는 것이냐? 이 일로 구유족이 얼마나 피해를 볼지 생각은 한 것이야?”
“사존……. 모든 것이 제자의 잘못입니다. 저는 그저 이들을 세살지로 데려와 흉살기를 씻어내게 해주려던 것뿐이에요. 절대 구유족에 피해를 입힐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들도 흉살기만 씻어내면 구유족에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겁니다.”
제혼이 괴로운 얼굴로 한립을 힐끔 보고 답했다.
“네가 낙아의 전 주인인가 보구나. 겨우 금선 주제에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허나 낙아를 생각해 네가 수라성에 침입한 죄는 눈감아 주겠다. 그만 가 보거라.”
이 말을 끝으로 음승전이 수결을 맺자 대청으로 들어오는 석문의 금제가 풀리면서 대문이 서서히 열렸다.
정말 한립을 내보내 주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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