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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79화 (1,636/2,000)
  • 1879화.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얻다

    *

    쿠릉.

    뇌전 연못이 출렁이고 푸른빛이 짙어진 뇌전들을 더 흥미로운 목표가 생겼다는 듯 류기 노조를 향해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돌연 몸을 홱 돌린 류기 노조는 입을 벌려 커다란 암녹색 구슬을 꺼내 빛을 분출했다.

    녹색 물의 장벽이 날아드는 푸른 뇌전들을 상대했다.

    콰콰쾅!

    대량의 뇌전이 류기 노조 쪽으로 흘러갔지만 푸른 세살지에 남은 뇌전의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끄아악!”

    연못 안에서 눈을 부릅뜬 열화선존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 모습을 신중하게 지켜보던 한립 일행은 푸른 뇌전들이 사방팔방에서 날아들어 그의 몸을 관통하는 것을 보았다.

    푸른 고슴도치처럼 변한 열화선존의 의복은 너덜너덜해졌고 피부도 성한 곳 없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동시에 온몸의 선규들이 개방되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던 새까만 흉살기들이 푸른 뇌전 실에 꿰여 요동쳤다.

    츠즈즈…….

    열화선존의 몸에 검은 연기들이 피어올라 푸른 뇌전 가운데서 기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걸 보고서야 한립은 그제야 안심했다.

    확실히 세살지가 흉살기를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류기 노조가 그들을 도울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어서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도 시작하죠.”

    한립이 석천공과 호삼에게 말하고 들어가려는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고 두 팔을 쳐든 열화선존의 눈, 코, 입 그리고 귀에서 검은 흉살기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제는 열화선존의 몸도 그 속에서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두 다리가 새까맣게 타버린 그는 재가 되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열화선존이 쓰러지면서 상반신이 연못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 본 한립이 인상을 찡그리고 체내의 진언보륜을 역전해서 전광석화처럼 세살지로 다가가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헛고생 말거라. 몸이 상할 대로 상해 흉살기까지 빠져나가 더는 뇌전의 힘에 버티지 못할 테니까.”

    류기 노조의 말이 들렸지만 한립은 고집스럽게 연못 안의 열화선존을 끌어내려 했다.

    연못에 두 팔이 들어선 순간 수많은 푸른 뇌전들이 달려들어 그의 소매를 조각내고 피부를 휘감았다.

    등골이 서늘해진 한립은 뇌전의 힘이 밀려들어 억눌러 왔던 흉살기들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 기합소리와 함께 연신술을 극성으로 발동해 미칠 것 같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의 두 팔에 금색 비늘이 덮이고 겨우 열화선존의 잔해를 낚아챘지만 이미 재가 되어 사라지는 중이었다.

    한립은 그 안에서 열화선존의 원영이라도 구하기 위해서 애썼다.

    파칙!

    안타깝게도 육신이 붕괴하고 드러난 원영은 뇌전 가닥 몇 개를 맞아 흩어졌고 그는 겨우 잔혼 한 줄기를 붙들었을 뿐이었다.

    이 모든 일이 몇 호흡 사이에 벌어져 호삼과 석천공이 도우려 했을 때는 한립이 팔을 거둔 뒤였다.

    몸을 일으켜 천천히 손바닥을 펴자 흐릿해서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잔혼이 있었다.

    “미안합니다, 열화 수사. 당신을 구하지 못했군요.”

    “자책하지 마세요. 운명이 그런 겁니다. 제 운이 좋지 않은 것을 남을 탓해 무엇 하겠습니까.”

    열화선존의 잔혼은 의식연계를 통해서 의사를 전달했다.

    “잔혼이 너무 약해서 곧 흩어져 버릴 겁니다.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하세요.”

    한립은 가볍게 탄식했다.

    “진언문 멸문의 이유도 알아냈고, 스승님도 잘살고 계시다니 숙원은 모두 푼 셈입니다. 그저 다시는 야학곡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게 아쉽군요……. 이렇게 잔혼만 남아서야 윤회를 할 수 있을지, 어느 날 다시 선계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쓴웃음을 흘린 열화선존의 잔혼은 점점 더 흐릿해지고 있었다.

    “윤회의 길에 들어서서 다시 태어나기만 한다면 세상 어디든 괜찮을 겁니다.”

    “본명법보를 남겨준다고 했는데, 뇌전이 강해서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군요.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약해지던 잔혼이 소실되기 직전 쌀알 같은 붉은 빛이 갈라져 나와 한립의 미간으로 흘러들었다.

    한립의 머릿속에 진언문 류수궁에서 전수되던 불 속성 공법인 <단시류화집(斷時流火集)>이 빼곡하게 떠올랐다.

    다른 이들은 열화선존이 연기로 사라지자 생각에 잠겨 있는 한립을 방해하지 않았다.

    류기 노조도 시선을 거두고 허공을 응시했다.

    “갑시다.”

    잠시 후, 감정을 추스른 한립이 빈손을 털어내고 뇌전으로 인한 양팔의 화상을 확인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막 열화선존이 뇌전 연못을 이겨내지 못하고 소멸한 것을 보았는데 석천공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한립이 먼저 몸을 날려 푸른 연못 가장자리에 서자 그도 더는 주저하지 않고 따라갔다.

    류기 노조가 그걸 보고 다시 거대한 꼬리로 푸른 사슬을 잡아끌어 대량의 뇌전을 유인해 주었다.

    치지지직!

    한립이 연못에 몸을 담그고 뇌전이 들끓는 소리가 이어졌다. 온몸의 피부가 간지럽다가 불타는 고통이 느껴져 그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연못의 다른 쪽 구석에서도 비명소리가 들려왔는데 특히 호삼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

    이를 악문 한립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면서도 몸 안으로 침식하는 뇌전을 막지 않았다.

    몇 초 만에 피부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근육이 불끈불끈 솟았으나 열화선존처럼 당장 피부가 터져나가지는 않았다.

    <대주천성원공>을 익혀 현천의 육체를 지닌 덕이었다. 뇌전들이 기다란 바늘처럼 그의 몸을 꿰뚫고 곳곳의 선규에 박혔다.

    “하나, 둘, 셋…….”

    한립은 묵묵히 뚫린 선규의 수를 세고 있었다.

    뇌전에 공격당한 선규가 열리면서 열화선존 때처럼 검은 흉살기가 흘러나왔다. 다른 점은 흉살기가 아주 느릿하게 흘러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때 제혼이 연못과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꼬마야, 흉살기 유출 속도가 느린 것은 좋은 소식이니 걱정 말거라. 아직 스스로 선규를 통제할 수 있단 뜻이다. 앞서 들어간 녀석처럼 통제를 잃고 죄다 쏟아져 나오면 오히려 큰일이지.”

    류기 노조가 힐끗 그녀를 보고 말했다. 그 말에 제혼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호 노조가 더는 한립을 신경 쓰지 않고 호삼에게 눈길을 돌렸다.

    온몸이 땀에 젖은 호삼은 이를 악물고 흉살기를 배출하고 있었는데 한립보다 속도가 빠르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선규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흘러나오는 흉살기의 농도도 다른 이들보다 옅었다.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살쇠를 겪고 있지 않았고, 이미 태을옥선에 이르러 외부에서 침입한 흉살기만 처리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저 육신과 혼백의 강인함이 한립이나 마족 출신인 석천공보다 못해서 끓는 솥 같은 세살뇌지에서 똑같이 괴로워하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다른 쪽 구석에서 석천공이 뇌전에 휩싸여 구불구불한 백발 사이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입가에 송곳니가 자라나고 몸에는 검은 비늘이 돋아 언제라도 마족 본체를 드러낼 것 같은 모습이었다.

    호삼이 두 눈을 질끈 감은 것과 달리 석천공은 눈을 부릅뜨고 맞은 편의 한립을 주시했다.

    이때 새빨갛게 피부가 달아오른 한립은 두 눈도 핏빛으로 물들어 검은 흉살기 외에 하얀 수증기를 모락모락 뿜어내는 중이었다.

    검은 안개와 하얀 안개가 교차해 채찍처럼 그를 감싸고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의 동시에 세살지에 들어왔지만 가장 농염한 흉살기를 지닌 한립에게 뇌전이 급격히 몰려들었고 그가 받는 충격이 가장 큰 듯했다.

    류기 노조는 기다란 눈꼬리를 가늘게 접고 그 와중에도 잘 버티는 한립을 향해 미약하게나마 칭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바로 그때, 한립이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기침을 하더니 덜덜 떨리는 몸으로 선규에서 먹처럼 짙은 흉살기를 급격히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인님!”

    제혼이 그걸 보고 놀라 소리쳤다.

    “쯧쯧, 이리 운이 나빠서야. 이 와중에 흉살기 발작이라니…….”

    류기도 한립의 눈동자가 회백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용울음 같은 괴성을 터트린 한립의 몸이 우드득 거리면서 변형되었다.

    몸에 금색 비늘이 자라났다가 금방 사라지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체내의 흉살기가 승기를 잡아가고 있구나. 이성을 잃은 그를 조종해서 주변의 푸른 뇌전을 막게 시키려고 말이야.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끝이겠지.”

    고개를 든 류기 노조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에 제혼이 손끝을 미간에 가져가 암홍색 제3요목을 불러냈다.

    “충고하는데,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뇌전 연못에서 몸을 씻어내는 것은 천겁을 겪는 것과 같아서 남들은 관여하지 않는 게 제일이야.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푸른 뇌전이 폭주해서 네가 죽는 것은 물론 네 주인까지 흉살기를 씻어내는 것에 실패해 회선이 되고 말 것이다.”

    “선배님께서 도와주시면 안 되는지요?”

    놀란 제혼이 손을 내리고 거대 구미호를 향해 예를 취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남들은 관여하는 게 아니라고? 너는 네 주인이 힘겹게 여기까지 온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할 셈이냐.”

    “하지만…….”

    “당장 뇌전 연못의 뇌전을 거둘 수도 있겠지만 저 녀석도 그걸 원치는 않을 것이다. 수행하면서 기회는 항상 위험과 공존하는 법.”

    류기가 유유히 늘어놓는 말에 제혼이 입술을 깨물고 주저앉아 뇌전 안의 한립을 응시했다.

    “나도 녀석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나도 이렇게 좋은 탈출기회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허허, 아마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희망이 없을지도.”

    류기가 시선을 거두고 혼잣말을 하는데 쿠릉! 하고 사방의 벽이 흔들려 암석이 떨어져 내렸다.

    세살지는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어서 이런 바깥소리를 듣기 어려운데 어쩐 일인지 굉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구유족에서 누군가 나섰거나 옆집 혼후 녀석이 철저히 봉인에서 벗어났구나.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겠어.”

    침음하던 류기가 탄식을 하고 입에서 검은빛을 뿜어 암녹색 구슬에 흡수시켰다. 구슬의 빛이 강력해져 연못 안에서 그들이 느끼는 뇌전의 압력이 줄어들었다.

    흉살기를 가장 적게 지니고 있던 호삼은 바로 안정을 되찾았고 석천공도 주변의 압박이 줄어든 것을 느꼈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류기 노조가 더 많은 뇌전을 끌어들여서 한립도 고통이 약간 줄어들기는 했지만 상황은 여전히 낙관적이지 않았다.

    크악!

    한립의 포효소리가 들리고 그의 몸에서 흐릿하게 산악거원, 은색 뇌붕, 오색 채봉, 오색공작 같은 진령 허상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저렇게 많은 진령혈맥을 지니고 있으면서 아직까지 살아남다니 인족 녀석이 보통이 아니야. 허나 혈맥이 저리 혼잡한 것이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인데…….”

    류기 노조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진령 허상들을 보고 중얼거렸지만 한립은 그런 말을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몰아쳐 어봉진신부가 변한 거대한 설봉(雪峰)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었다.

    지켜보던 류기 노조의 표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졌다. 도조경에 이른 그의 판단에 따르면 한립은 이미 한계에 이르러있었다.

    육신은 물론이고 혼백도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천호화혈도를 지닌 녀석이 죽거나 정신이 나가기라도 하면 그가 달아날 기회도 날아가게 될 것이다.

    류기 노조가 뇌전의 벌을 감수해가며 강제로라도 그를 끌어낼까 고민하고 있을 때, 한립의 몸에서 이상한 파동이 감지되었다.

    그의 의식 속에서 금색 원영이 가부좌를 틀고 이상한 수결을 맺은 채 연신술 5성 구결을 외는 중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아주 천천히 외는데 마치 마력을 지닌 것처럼 그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한립은 자기도 모르게 연신술 5성의 고비를 넘어 방대한 의식의 힘을 퍼트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탁한 공기를 내뿜은 그는 선령력을 운용해 진령혈맥들이 날뛰는 것을 바로 잡고 흉살기 발작도 가라앉은 것을 확인했다.

    류기 노조가 그걸 보고 흠칫 굳어 정말 놀랐다는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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