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876화 (1,633/2,000)

1876화. 뜻밖의 사고

*

타호구 회장 안.

광채를 내뿜은 거대한 백석으로 지어진 둥근 제단에는 엄숙한 기운이 맴돌았다.

회계 각 구역의 역주들이 미소를 머금거나 어두운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는데 다들 말은 하지 않아도 언제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삼역회명의 주축을 이루는 구유역, 윤회역, 흑승역의 대표인 음승전, 황보옥, 소불야 세 사람은 둥근 탁자에 앉아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총 20일 동안 진행되는 회의 과정에서 7일은 각자의 의견을 정리해 초안을 작성하고, 3일은 논의를 거쳐 백여 개 영주들이 투표를 통해 결정을 내린다.

나머지 10일은 투표 결과에 따라 앞으로 직면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공동으로 대응할지 결정한 다음 흩어지게 되어 있었다.

삼역회맹에서 논의되는 진선계에 관한 정책은 간단한 주제 같았으나 각각의 세력들이 서로 영향을 받고 서로서로 은원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 동안 구유역, 육회역 그리고 흑승역은 최대한 아직 방향을 정하지 않은 중소 세력들을 끌어들이고 오늘이 초안을 잡는 마지막 날이었다.

윤회역은 아낌없이 자원과 이익을 약속하며 중립을 지키는 역주들을 설득해왔고, 구유역은 원래부터 가장 많은 세력을 휘하에 두었기에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는 일에 그리 열성적이지 않았다.

흑승역 역시 원래 그렇듯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사실 회계의 각 구역은 대부분 진선계를 적대시했지만 그들의 지닌 풍부한 수도자원과 회계에서는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물건들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게다가 윤회역에서 유인책을 제시하자 대부분의 중립 역주들은 물론 흑승역 휘하의 역주들까지 마음이 기운 상태였다.

그런데 회의가 시작되고 반 시진이 지났는데도 음승전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음 역주,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윤회역 편에 서는 세력들이 많아지고 있다고요.”

음성전 옆에서 백발노인이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천곡이란 이름을 지닌 곡지역(谷池域) 역주였다.

대대로 구유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강력한 우방이었다.

“아직 시작 단계이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천곡 역주.”

음승전은 미소를 지으며 낙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명을 내려라.”

천곡 역주가 속으로 불퉁거리는 동안 음승전은 차를 마시는 척하며 전음을 보냈다.

그 뒤에는 단정한 생김새에 머리에 회색의 굽은 뿔이 자란 청년과 진한 눈썹을 지닌 회색 장포를 입은 거한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방대한 기운을 지닌 대라경 존재였다. 고개를 조아린 청년의 소매에서 티 안 나게 잿빛이 빠져나갔다.

“…….”

그 즉시 제단 아래 모인 인파 중에서 마른 흑포인이 눈을 번득이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음 역주, 상황이 이런 데도 태연자약하십니다.”

흑승역 소불야가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 부역주께서는 괜찮으십니까?”

“허허, 우리 흑승역이야 ‘평화’적으로 결론이 내려져 내부적으로 대규모 전쟁만 벌어지지 않으면 만족입니다. 제가 이번에 참석한 것도 순조롭게 회맹을 마치기 위해서고요.”

“그러셨군요. 회계 생물들을 생각하시는 소 부역주의 마음에 탄복할 뿐입니다.”

음승전은 상대가 ‘평화’를 강조하는 것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황보옥이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 * *

그 시각, 타호구 외곽의 높은 벽 안에서 진동이 들리기 시작했다.

벽 안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규칙적으로 들어선 회색 돌기둥에서 복잡한 문장이 나타나 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각각의 돌기둥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구유족인들이 주문을 외면서 수결을 맺었고 돌기둥들이 빛을 발하면서 검은 통로 안을 밝혔다.

강력한 빛과 진동이 일었지만 벽을 이룬 재료가 무엇인지 바깥으로 전혀 새어나가지 않았다.

회장에는 초안 작성을 완료하고 결의대회를 시작하기 위해 음승전과 황보옥, 소불야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소불야가 불쑥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피자 황보옥도 안색이 달라졌다.

“황보 궁주, 왜 그러십니까?”

황보옥 위에 선 교삼이 물었다. 다른 역주들도 황보옥과 소불야의 변화를 읽고 수군거렸다.

“음 역주, 이게 무슨 뜻입니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황보옥이 몸에 눈부신 빛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나자 윤회역 세력과 회유된 역주들도 영문을 모르고 일어나 각자 다양한 빛을 일으켰다.

성격이 급한 몇몇은 벌써 선기를 방출하기까지 했다.

소불야도 가라앉은 눈으로 음승전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음승전은 대답이 없었고 대신 구유역 쪽 세력들이 분분히 일어나 기운을 일으켰다.

“윤회역은 대회 기간 중에 이 무슨 짓입니까! 반란이라도 일으킬 참입니까!”

천곡 역주가 소리쳤다.

“윤회역도 회계의 정당한 주인입니다. 반란이라니 그 무슨 우스운 소리인지.”

황보옥이 말하기 전에 소불야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

천곡 역주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회의를 진행하시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지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음승전은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황보옥과 소불야를 한 명씩 쳐다보았다.

“음 역주는 그사이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단 말입니까? 방금 타호구에 공간 금제가 펼쳐져 외부 세계와 격리된 것을 못 느끼셨냐는 말입니다.”

황보옥이 냉랭히 따져 물었다. 그제야 회장의 다른 역주들도 무슨 상황인지 알고 웅성거렸다.

음승전은 다른 이들이 어떤 시선을 던지든 개의치 않고 담담히 미소 지었다.

‘이제 와서 알아차려 봐야 늦었다…….’

그가 오랜 세월 계획한 일이 성사되기 직전이었다.

“여러분…….”

음승전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멀리서 쿠쿵! 하는 굉음과 함께 사악한 기운이 하늘을 찌르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눈부신 검은 빛이 거대한 빛덩이로 뭉쳐지고 수라성 인근의 흉살기들이 요동치며 하늘의 잿빛 구름에서 천둥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하늘에 뜬 잿빛 태양 세 개가 놀랍게도 서로에게 다가가 중첩되고 있었고 이에 밝은 빛이 시냇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엄청난 천기 현상에 다들 하늘로 시선을 빼앗겼고 황보옥과 소불야도 안색이 확 달라졌다.

“세혼구입니다. 본성의 보물과 괴뢰를 제련하는 곳인데 문제가 생겨서 타호구까지 공간 금제가 펼쳐진 듯하군요. 모든 것이 회의를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한 결정이니 다들 오해하지 마시고 마음을 푸시지요.”

음승전은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지며 변수가 생긴 것을 알아차리고 말을 바꾸었다.

역주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서늘하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렸다.

황보옥이 하얀빛을 거두자 윤회역 세력이 따라서 선기들을 거두었고, 구유역 쪽도 기운을 가라앉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가보거라.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할 것이야.”

음승전은 뒤에선 대승기 수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침묵을 지키던 외뿔 청년과 회포 거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빛 두 줄기로 변해 세혼구로 날아갔다.

“큰일은 아닐 테지만 모두의 시간을 빼앗아 송구스럽습니다. 계속해서 대회를 진행하시지요.”

음성전의 말에 다들 다시 자리에는 앉았으나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황보 궁주, 음승전이 방금 한 말이 사실입니까?”

교삼이 한 발자국 다가와 전음으로 황보옥, 무양에게 말을 붙였다.

“음승전의 말을 어찌 믿겠느냐? 타호구에 공간 금제가 펼쳐진 것은 그의 음모의 일부일 것이나 조금 전 소란은……. 내 추측이 맞다면 세혼구 쪽에 정말 사고가 있는 듯하다.”

황보옥이 냉소를 흘리며 답했다.

“음모라면…….”

“황보 궁주께서는 저희 윤회역에서 가장 지혜로운 분 중 한 분이십니다. 이미 음승전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아차리셨는지요?”

교삼의 안색이 달라지고 무양이 전음을 보냈다.

“과찬이십니다, 무양 궁주. 지략으로 따진다면 역주 대인을 앞설 수야 없지요. 아직은 실마리가 너무 적어 음승전의 음모를 완전히 꿰뚫어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이대로 기다린단 말입니까?”

“걱정할 것 없다. 역주 대인께서 음승전에 당하지 않도록 미리 안배를 해두셨으니, 상황을 지켜보자.”

황보옥의 전음을 들은 교삼과 무양이 눈을 빛냈다.

* * *

세혼구 지하궁전 안.

음허와 귀목은 혼후의 거대한 머리와 팔을 보고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음허 장로, 저놈들이 빠져나왔습니다. 저들을 먼저 잡아 역주 대인께 그간의 사정을 고하면 어느 정도 용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귀목이 한립 무리를 향해 눈짓했다.

“역주 대인의 대업을 앞둔 상황에 이런 난리를 피워놓고 겨우 저 도적놈 몇을 잡아다 바친다고 일이 해결될 줄 압니까? 다행히 혼후가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으니 일단 금제를 유지해 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합니다!”

음허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앞으로 날아가 수결을 맺었다.

팟.

그의 몸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와 검은 영패로 변했다. 이전 구유령과 비슷하면서도 악귀 머리가 9개나 새겨져 있었다.

음허가 입에서 피를 몇 모금 뱉어 영패에 흡수시키자 영패의 악귀 머리들이 몇 배로 커져 입을 쩍 벌렸다.

촤아앗!

거의 실체화된 검은 빛줄기가 허공을 가르고 그 안에서 새빨간 사슬들이 나와 혼후의 손과 머리를 감쌌다.

펑! 펑! 펑!

하지만 혼후가 몸부림치는 탓에 음허의 사슬들은 금방 끊어지고 말았다.

“돕지 않고 뭐 하는 겁니까, 귀목 장로!”

음허의 외침에 귀목도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의 뒤로 다가가 두 손을 등에 댔다.

굵직한 검은 빛이 흘러 들어가 힘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렇지!’

구석에 숨어 있던 한립이 희색을 드러내고 금빛 허상으로 변해 검은 덩굴 우리 속에 갇힌 제혼에게 다가갔다.

현천호리병박을 꺼내 주문을 외니 보물이 몇 배로 커지면서 녹색 주술문자들을 만들어냈다.

귀목이 그걸 보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한립 무리만 달아나는 것은 이미 주변이 완전봉쇄 되었을 테니 상관없지만 제혼은 달랐다.

파파팟.

기합을 넣은 귀목의 몸에서 검은빛이 반짝이고 여덟 장의 검은 부적들이 날아올라 바람을 타고 가시가 잔뜩 솟은 낭아봉으로 변하였다.

각각이 강력한 기운을 발산하는 품계가 있는 선기였다.

여덟 개의 낭아봉들이 흐릿하게 변해 한립에게 날아들고, 제혼을 가둔 나무 우리는 귀목 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와라!”

한립은 오히려 기뻐하며 금빛을 터트려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금색 파문들이 여덟 개의 낭아봉을 가로막았다.

한립은 진언보륜이 힘겨워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현천호리병 안으로 법결을 던져 넣었다.

쉭!

호리병이 뿜은 녹색 광채가 여덟 개의 검은 낭아봉들을 품고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소용돌이 속에서 시간 금제에 힘을 잃은 선기들은 다시 검은 부적으로 돌아가 있었다.

“가둬라!”

호리병이 부적들을 빨아들이는 것을 본 귀목이 움찔했다.

한립은 머뭇거리지 않고 현천호리병을 전력으로 발동했고 그 안에서 무언가 퍽퍽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호리병 입구에서 굵직한 검은 수정빛이 빠져나가 신속히 나무 우리로 흘러들었다.

매우 강력한 법칙 파동이 나무 우리를 갈랐고 제혼이 안에서 떨어져 내렸다. 중상을 입은 제혼은 몸 곳곳에 뚫린 구멍에서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흐릿하게 제혼 옆으로 다가간 한립이 그녀를 안고 빠르게 물러났다.

귀목이 무언가를 하려 했을 때, 한립은 이미 제혼을 데리고 달아나고 있었다.

귀목은 열을 받았지만 현천호리병박을 보고 탐심을 드러냈다.

여덟 장의 부적은 원래 사파천진현병(邪破天陣玄兵)이라는 회계의 대라경 최고봉의 존재가 제련한 한 벌로 된 5품 선기였다.

오래전 사파천진현병을 얻었을 때 병기들이 흩어지기 직전이라 비술로 마지막 남은 법칙의 힘을 이끌어 부적에 보존해둔 것이다.

그런 부적들을 현천호리병이 단숨에 부숴 품고 있던 법칙의 힘을 분출하는 것을 보았으니 욕심이 날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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