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화. 두 번째 봉인
*
대청 바깥의 작은 광장으로 들어선 귀목과 음허는 곧바로 거대한 검은 불구슬을 직면했다.
쾅!
불구슬이 터져 대량의 불길이 비처럼 쏟아져 내려 검푸른 덩굴 방패가 흩어졌다.
“이 정신 나간 놈들! 여기가 어딘 줄이나 알고 이러는 것이냐!”
귀목이 광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서있던 제혼과 백리염을 보고 소리질렀다.
“저들과 허튼 소리 말고 빨리 끝냅시다.”
음허는 주변을 훑어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말했다.
백리염도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는지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며 자신의 단전을 가리켰다.
크오오!
그러자 피부가 뜯겨져 나가면서 선명한 붉은 빛이 터져 나와 전신을 뒤덮고 새까만 검은 화염이 그 틈으로 흘러나왔다.
크하항!
제혼이 옆으로 피하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울부짖었다.
검은 빛에 휩싸여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든 그녀는 산만한 검은 거원으로 변해 뿔이 솟은 머리와 제3요목 그리고 등 뒤로 솟아난 날카로운 뼈바늘들을 드러냈다.
“유락, 이 배신자! 역주가 은혜를 베푸셨거늘 외지인을 돕기 위해 형수(刑獸)의 모습까지 드러내는 것이냐!”
소리를 지르는 귀목 위로 검은 연기와 뇌전빛이 떨어져 내렸다. 그 안에는 업화를 휘감은 새까만 촉룡이 도사리고 있었다.
변신을 마친 백리염이었다.
“저들이 방자하게 날뛰는 것은 우리가 이곳의 금제를 깨트리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귀목 장로! 가서 금지 안의 금제들을 전부 풀어 버리세요.”
냉소를 흘린 음허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귀목이 흠칫 놀라 머뭇거렸다.
“어차피 저들이 여기까지 온 마당에 외부 금제를 남겨 두어 무엇합니까? 괜히 실수로 금제를 깨버리기라도 하면 내부까지 연쇄반응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느니 금제를 풀어 저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도…….”
“구유령을 가지고 어서 가세요. 이제 우리 둘이 벌을 받냐 안 받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일로 역주의 대업이 무산될 수도 있어요!”
음허의 말에 귀목이 허공을 박차고 광장 구석으로 날아갔다.
“너희들이 그렇게 살기가 싫다면 아주 끔찍하게 죽여 주마……. 암옥(暗獄)!”
음허가 기운을 몇 배로 키워 소리를 높이자 그의 발끝에서 검은 먹물처럼 그림자가 퍼져나가 바닥과 허공을 뒤덮기 시작했다.
* * *
철컥. 끼이익.
그때 대청 안에서 무언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과 호삼, 석천공이 제단 구덩이 주위에 서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위쪽을 올려다 보는 중이었다.
동그랗게 뭉친 주술문자들이 하나씩 빛을 발하면서 가운데 은색 돌기둥이 한뼘씩 아래로 내려왔다.
쿠쿵.
기둥이 제단 구덩이와 꼭 맞아 들어갔고 엄청난 흉살기가 바닥에서 솟아올라 대청 안을 자욱하게 채웠다.
한립 무리는 무의식 중에 뒤로 물러섰다.
석실 전체가 진동하면서 야수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대청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 한립만은 아닌지 석천공도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이때 호삼의 등 뒤 혼후 조각상이 빛을 반짝이고 붉은 화염을 머금은 듯 생생하게 변해갔다.
별안간 벽에 새겨진 모든 짐승들이 생기를 되찾은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호삼, 피하세요!”
한립의 목소리를 들은 호삼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틀었다.
핑!
파공음이 들리고 조각상의 눈알을 빠져나간 주먹 크기의 붉은 구슬 두 개가 호삼의 귓가를 스쳐 지붕에서 바닥으로 이어진 돌기둥으로 날아갔다.
퍼펑!
별동별처럼 날아간 구슬들이 터져 화염으로 기둥을 빙글빙글 감았다.
한립 무리는 화들짝 놀라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조심!”
한립이 소리치고 허공으로 뛰어오르자 석천공과 호삼도 연달아 둔광을 일으켰다.
쿠쿠쿵!
대청 바닥이 조각나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빛이라고는 하나 없는 지하공간은 깊이가 수천 리는 되는 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붉은 화염과 검은 화염이 절반식 자리를 차지하고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한립은 두 눈 깊은 곳에 보랏빛을 일으켜 구유마동으로 아래쪽을 응시했다.
두 가지 색깔의 화염 속에서 강렬한 업화의 흉살기가 느껴졌고 무언가 그 아래 핏빛 사슬에 묶여 돌기둥에 붙들려 있었다.
크아아아-!
엄청난 포효소리와 함께 거대한 손이 불쑥 튀어나와 한립이 방금 전 서있던 자리를 챙! 하고 갈겼다.
손이 수백 장이나 되는 거대 손은 뾰족뾰족한 검은 돌조각들이 붙어 있고 그 위로 검은 불길을 품은 가시가 솟아 있었다.
지하에 엄청나게 큰 괴물이 도사리고 있음을 확인한 한립 무리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손 하나가 산만하면 괴물의 몸은 얼마나 크단 말인가!
“이런 존재를 풀어놓으면 수라성에 난리가 나겠습니다.”
석천공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말했다.
“려 수사, 이걸 정말 풀어줘도 될까요?”
호삼도 머뭇거리며 한립을 쳐다보았다.
“풀어주지 않으면 우린 무조건 죽지만, 풀어 놓으면 한 줄기 살 길이 열릴 겁니다.”
담담히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와 지하의 금속성 마찰음이 겹쳤다.
십여 가닥의 붉은 사슬들이 지하에서 튀어나와 거대 손을 붙들고 끌어당겼다.
채채챙.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거대 손이 끌려들어가는 것을 본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봉인이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그 말에 석천공이 서둘러 지상에 남은 부분을 찬찬히 살피다 가장자리에서 화염 문양을 찾아냈다.
“겉보기에는 마족의 진법과 비슷한데 파고들수록 다릅니다. 완전히 봉인을 풀려면……. 아무래도 불 속성 법칙의 힘을 주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 속성 법칙의 힘이요? 백리 수사도 바깥에 있는데 큰일입니다.”
석천공의 말을 듣고 호삼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듣고 있던 한립도 무슨 생각인지 약간 주저하는 눈치였다.
쾅!
이때 바깥에서 용의 표효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백리염이 변신한 촉룡의 비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한립은 안색이 변해 즉시 은빛 문을 열었다.
치융이 벽에 기대 앉아 있고 열화선존은 깨어나 멍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까 기절시켜둔 구유족 아이들도 한 쪽 구석에 아직 늘어져 있었다.
“치 수사, 회계에서 위기에 처했으니 우리도 어찌 보면 한 배를 탄 동료라 볼 수 있겠지요…….”
한립이 사정을 설명하려는데 치융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그는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불 속성 법칙의 힘이 필요합니다.”
“시간법칙을 주로 수행하고 불속성 법칙은 부수적으로 익혔을 뿐입니다. 게다가 아직 몸에 있는 금제도 제거하지 못했고요. 이전에 유노에게 불 속성 법칙의 힘을 착취당해 무슨 법보 같은 것을 제련하느라 체내에 남은 불 속성 법칙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치융의 말에 한립은 석천공을 쳐다 보았다.
“괜찮습니다. 금제를 이끌어 줄 정도의 힘만 있으면 됩니다.”
석천공이 대신 대답을 하자 치융이 빛의 문을 걸어나왔다.
그런데 그들에게 날아들던 그는 마치 허공에서 미끌어지기라도 한 듯 비틀거려 석천공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불 속성 법칙을 이 문양을 따라 주입해 주시면 됩니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주세요.”
석천공이 불꽃 문양을 가리키고 순간 무언가를 감지한 한립이 재촉했다.
그들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사이 기절한 척하고 있던 두 구유족 아이들이 은빛 문을 빠져나와 대청 바깥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려 수사, 잡아올까요?”
호삼이 그걸 발견하고 물었다.
“달아나게 두세요. 이제 저들이 있든 없든 별반 차이도 없을 테니까요.”
그 순간, 치융의 불 속성 법칙의 힘이 불꽃 문양을 따라 흘러들어갔다.
갑자기 허공을 찢는 굉음과 검은 돌풍이 일어 두 구유족 아이들을 따라잡았다.
한립 무리가 본 것은 아주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었다.
의복이 썩어 문드러진 아이들은 피부가 녹아내리고 뼈가 바스라져 끈적한 핏 덩이로 변해 검은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갔다.
한립은 그 안에서 진령혈맥과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기운을 느끼고 눈을 깜빡였다. 어쩐 일인지 대청 전체가 흔들리고 두 가지 색깔의 화염이 용암처럼 솟아올랐다.
“어서 피해야 합니다.”
한립은 화지동천을 닫고 몸을 날렸다.
나머지 셋도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촤르릉.
사슬의 마찰음이 들려오고 거대하기 짝이 없는 손이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퍼퍼퍼퍼펑!
화염에 휘감긴 손이 사슬을 풀고 지붕까지 뻗어 나와 무서운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윽!”
그 압력에 한립 무리가 이리저리 날아가다 벽에 부딪쳤다.
* * *
대청 바깥의 광장.
암옥을 거둔 음허가 그림자를 응결해 만든 거대 팔 여덟 개로 백리염이 변한 새까만 촉룡의 주요 혈자리를 꿰뚫고 있었고, 제혼은 검은 우리에 갇혀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쿠쿠쿠쿵!
지하에서 폭음이 들리고 바닥이 쩍쩍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검은 업화가 새어나와 마치 검은 연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하, 하하……. 성공했구나. 다행…….”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새까만 촉룡이 말을 했다.
“음허 장로!”
귀목이 난색을 하며 음허를 보았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부드득!
음허는 눈에 불길이 일더니 괴력을 발휘해 촉룡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떨어진 용머리는 음허의 발길질에 퍽! 터져나갔다.
머리가 터지는 순간 검은 그림자가 지면으로 숨어들었지만 그걸 쫓을 여력은 없었다.
“어서 들어가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겁니다.”
그 말에 음허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안으로 몸을 날렸다.
쿠쿠쿠쿵!
바로 그때, 음허의 발밑이 진동하고 지면이 그대로 붕괴했다.
검은 업화들이 갈라진 틈을 타고 솟아오르면서 암석들이 추락해 궁전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백리염의 시체가 떨어지고 한립 일행이 불빛 속에서 튀어나와 쏜살같이 지하 공간의 가장자리로 지나갔다.
시선을 마주친 음허와 귀목은 각자 참담하고 절망스러운 얼굴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광포한 포효소리가 지하에서 들려왔다.
콰쾅!
방금 동굴 지붕을 쳤던 검은 거대 손이 두부처럼 지하 공간을 으깨고 검은 업화 속에서 무언가 서서히 솟아올랐다.
새까맣고 산만한 머리는 뾰족한 뿔과 이빨들이 가득했고 어렴풋이 보이는 얼굴 윤곽 위로 검은 불길이 일렁였다.
“우리가 대체 무엇을 풀어준 걸까요…….”
지하 공간 구석에 숨어 있던 석천공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혼후입니다. 백리 수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한립은 전투가 벌어진 공간을 빠르게 둘러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했다.
“저길 좀 보세요! 저게 무엇이든 아직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닌가 봅니다. 머리와 팔만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아요.”
호삼이 돌연 외쳤다.
한립과 석천공도 거대한 머리 아래의 목에 굵은 사슬이 감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구유족인들을 바삐 움직이게 만들기에는 충분합니다. 완전히 빠져나왔다면 우리도 달아날 수 없었을 겁니다.”
한립은 당황하는 음허와 귀목을 보며 말했다.
“치융 수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찾을 것 없습니다. 지면이 붕괴할 때 불바다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달아나기는커녕 그 아래로 뛰어들더군요.”
호삼의 질문에 석천공이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출구를 찾아보세요. 저는 제혼을 구해오겠습니다.”
한립이 빠르게 말했다.
크오오오!
지하 불구덩이 속에서 혼후가 고개를 벌떡 들고 노호성을 터트렸다.
검은 업화들이 위로 치솟아 화염 기둥을 이루고 지붕을 때리자 몇 백 장 두께의 암석이 녹아 거대한 구멍이 뚫리고 어둑하게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