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화. 태고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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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목과 음허가 검은 빛을 터트려 주변의 금색 파문을 부수는 동안에 검은 우리에서 빠져나온 한립은 제혼을 끌어내고 푸른 빛으로 호삼과 백리염을 붙들어 뒤쪽으로 물러났다.
파사삭!
금은 파문들이 얼음처럼 깨지고 시간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때 한립은 모두를 데리고 석천공 옆으로 이동해 있었다.
“고맙습니다!”
호삼이 한숨을 돌리며 한립에게 인사를 건넸고, 백리염도 한립을 지긋이 보다 인사를 했다.
석천공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머리를 쳐박고 석문의 금제만을 관찰했다.
“저들이 이곳에서 강력한 신통을 쓰기를 꺼리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가 정말 고비일 겁니다.”
한립은 음허와 귀목을 주시하면서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호삼 등의 표정도 신중해졌다.
“시간법칙을 이 정도까지 운용하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음허가 즉시 달려들지 않고 입술을 달싹여 전음을 보냈다.
“우리야 조금만 시간을 쏟으면 시간금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지만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끝이 없겠어요. 이러다 석문의 금제라도 풀리면 낭팹니다.”
귀목도 금제를 푸는 석천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흐흐, 석문의 금제는 역주 대인께서 직접 펼쳐 두신 겁니다. 저들이 무슨 수로 푼단 말입니까? 게다가 이곳의 흉살기는 바깥보다 백 배는 농염해서 그것 때문이라도 저들은 나가떨어지고 말거예요.”
음허의 말에 귀목이 움찔한 뒤 한립 일행을 찬찬히 살폈다. 동시에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체내에서 흉살기들이 날뛰는 느낌을 받았다.
“주인님…….”
제혼이 그의 표정에 변화가 생기자 뭐라 말을 하려는데 음허와 귀목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재빨리 신통을 펼쳐 음허와 귀목을 막으려 했다.
바로 그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화아앗.
눈부신 빛이 은색 석문에 번져 지하세계에 태양이 뜬 것처럼 공간을 환하게 비추었다.
석천공이 두 손으로 재빨리 수결을 맺어가며 은색 진법 주위로 진법 깃발을 날리고 있었다.
크하하학!
대청의 네 벽이 따라서 밝게 빛나고 석문 깊은 곳에서 갑자기 무언가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짓이냐! 멈춰!”
갑작스러운 변화에 음허와 귀목이 크게 놀라 노호성을 터트렸고 한립 일행은 신경도 쓰지 않고 석천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들을 막아야 합니다! 석 수사가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해요!”
눈을 번득인 한립이 그들 앞을 막고 수결을 맺어 청죽봉운검 아홉자루를 다시 거검으로 만들어 귀목을 베었다.
현천호리병은 빙글 돌아 음허를 향해 붉은 빛을 분출했다.
호삼 등 나머지 사람들도 즉시 나서서 선기들이 장대비처럼 공격을 쏟아부었다.
석천공은 엄숙한 표정으로 전신에서 은빛을 방출하면서 같은 색의 수정실들을 가닥가닥 석문 위 금제로 흡수시키는 중이었다.
다음 순간, 진언문 금지에서 찾아낸 은색 비파를 불러내 빠르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디링! 디리링! 디딩!
비파소리가 격렬하게 대청을 울리고 음률이 주술문자가 되어 석문의 은색 보호막으로 흘러들어갔다.
“열려라!”
은빛이 더욱 강해지고 웅웅 거리는 소리가 귀를 찌를 때 석천공이 비파를 강하게 튕기면서 소리쳤다.
콰콰쾅!
문 위의 금제가 크게 손상을 입은 듯 어두워졌다.
“흐하하, 드디어 라타비파를 연화시켰어!”
얼굴이 붉게 물든 석천공은 입가에 피를 주륵 흘리면서도 박장대소했다.
딩!
그는 몸을 돌려 한데 엉켜있는 수사들을 보고는 비파를 튕겼다. 그러자 두 줄기 은빛이 천처럼 나풀나풀 비파에서 날아올라 극히 빠른 속도로 귀목과 음허를 감쌌다.
은빛에 감싸인 그들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게 무슨…….”
다음 순간, 그들은 전투가 벌어지던 대청의 통로 쪽에서 나타났고 깜짝 놀라 시선을 마주쳤다.
강적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한립 일행도 깜짝 놀라 멍해졌다.
“석문의 공간금제는 풀었습니다. 라타비파를 이용해 간신히 한 것이라 금방 회복될 테지만요. 금제가 회복되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시죠.”
석천공은 밝은 얼굴로 비파를 두 번 튕겼고, 은빛이 흘러나와 바닥에 전송진법을 이루었다.
일행은 각자의 선기를 거두고 진법 위로 올라 번득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고 다시 검은빛 두 줄기가 날아들었다.
텅빈 대청을 본 그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봉인이 있는 곳까지 들어갔습니다! 구유령으로 어서 금제를 열고 들어가 쫓읍시다!”
귀목이 음허를 보며 다급히 외쳤다.
음허도 빨리 검은 영패를 불러냈지만 바로 발동하지는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나라고 당장 금제를 열고 싶지 않은 줄 아십니까? 금제가 손상을 입어 불안정해 안정이 되기 전까지는 구유령으로도 열 수가 없습니다!”
음허가 참고 있다 바럭 화를 냈고, 귀목도 두 주먹을 꽉 쥐고 석문을 노려보았다.
석문 안에서 한립 일행은 어두운 통로를 지나 아주 넓은 대청으로 빠져나왔다.
양쪽 벽에는 등잔들이 걸려 있어 노란 빛을 내었는데 무엇을 태우는 것인지 연기 대신 달콤한 향기가 났다.
한립은 일행들이 한숨을 돌리는 것을 보며 내심 탄식했다. 대라경 수사들이 금제를 열고 이 안까지 쫓아 오면 그들이 전멸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청의 지면에서 복잡한 주술문자와 문양들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고 양쪽 벽에는 기다랗게 벽화가 조각되어 있었다.
이전에 궁전 대문에서 보았던 피비린내 나는 짐승들의 혈투가 담긴 그림이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더는 길이 없는 것 같아요.”
호삼이 대청 끝으로 가 살피더니 안좋은 소식을 전했다.
한립은 벽에 조각된 거대 짐승 조각을 보고 궁전 오른쪽 문에 새겨져 있던 조각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엎드려 있지 않고 사람처럼 뒷발로 섰지만 두 다리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슴을 닮아 있었고 검은 흉살기가 휘감고 있었다.
“우리도 바깥 공간 금제를 풀었으니 저들도 이곳까지 오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석천공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사방을 살폈다.
“다들 조급해하지 마시고 이곳이 뭐하는 장소인지부터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제사를 지내던 곳 같아요. 여길 보세요.”
한립의 말에 제혼이 입을 열었다.
그녀가 가리킨 오른쪽 벽 아래에는 고대 사람들이 무언가를 위해 제를 올리는 장면에 묘사되어 있었다.
천만 마리의 회계생물들은 물론 지능이 높지 못한 회계 요수나 자타족 등도 거대한 사발 모양의 구덩이에 버려져 그 옆에 엎드린 거대 짐승의 먹이가 되는 장면이었다.
한립이 그걸 찬찬히 살피다 몇 걸음 물러나 바닥에 움푹 파인 자리를 발견했다.
“왜 그러십니까?”
백리염이 전투로 소모한 기운을 가다듬고 다가왔다.
“이 구덩이가 그림의 것과 비슷해 보이지 않으십니까?”
한립은 곰곰이 생각하다 바닥의 구덩이를 가리켰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 안에 든 것이 혹시…….”
석천공이 보기에도 비슷해 보였다.
“아마 저것을 봉인해 두었기에 이곳이 구유족의 금지가 된 듯 합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유족인들이 이곳에서 격렬히 싸우지 못한 것도 혹시 봉인이 깨져 안에 든 존재가 탈출할까 염려했던 거군요.”
호삼도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얼굴이었다.
콰릉!
대청이 흔들리고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저들도 금제를 열고 들어왔네요.”
제혼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다른 퇴로는 없습니다. 구유족들이 이 짐승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든 봉인을 깨야 우리에게도 살 길이 열릴 거예요.”
한립이 하는 말에 제혼의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녀석아, 그러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구나. 방금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생각났는데 저걸 꺼내주면 너희부터 끝장날 것이야.”
어두운 표정의 제혼을 보고 뭔가 말하려는데 한립의 머릿속에 석경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들었는지 아십니까?”
“혼후(焜睺)라고 들어봤느냐?”
“그게 무엇인지요.”
“혼후는 회계의 태고 혼돈시대가 열리기 전부터 존재하던 생령이다. 회계의 음살본원이 응집해 탄생한 괴물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실력을 지니고 있지. 회계의 적잖은 종족들이 아직까지 혼후를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구유족들이 어째서 혼후를 이곳에 봉인해 두었는지는 모르겠구나. 내 마음이 좋아 충고해준 것이니 결정은 네가 알아서 하거라.”
석경후는 할 말을 마치고 침묵했다.
“주인님…….”
한립이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제혼이 그를 불렀다. 일행들은 그가 결정을 내리는데 익숙해져 다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목숨이 걸린 일에 여러 가지 따질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에 무엇이 있든 일단 꺼내놓고 보시지요.”
침음하던 한립이 결심을 내리고 대청 바깥에서 더욱 강하게 진동이 밀려들었다.
귀목과 음허도 조급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진법이 워낙 복잡해서 우리 실력으로 강제로 부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석천공이 미간을 좁히고 의견을 구했다.
“시간이 없으니 흩어져 방법을 강구하지요.”
한립의 말에 다들 진법 곳곳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구유마동을 펼친 한립은 제사용 구덩이 주변부터 살폈으나 구덩이 안에 검은 진흙 같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발견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호삼이 대청 구석에서 돌아왔다.
“바닥에 뭔가 문양이 있기는 한데 곳곳이 끊어져서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장식용으로 그려 놓은 것이지 진법금제는 아닌 듯해요.”
석천공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한립은 고개를 들어 총 일곱 겹으로 이루어진 둥근 무늬를 보았다. 주술문자로 이루어진 원들 정중앙에 검은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위쪽은 어떻습니까?”
뭔가 느낌이 온 한립이 위를 가리켰고 다들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저건, 공간금제 같군요!”
석천공이 당장 눈을 반짝였다.
“어떤 금제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호삼의 질문에 석천공이 미간을 찡그리다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금제가 천장과 바닥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 몰랐는데 우리 마계의 건곤금유대진(乾坤禁幽大陣)과 흡사합니다. 제가 회계의 경전에서 본 어느 진법과도 유사하고요.”
“어떻게 파훼할 틈이 있겠습니까?”
한립이 물었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비슷하다고 같은 금제는 아니니까요.”
석천공이 대답을 마쳤을 때 바깥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기만 해주세요. 만일 실패하면 음허, 귀목과 싸우면서 그들의 힘을 빌려 공간의 봉인을 약화시켜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들 잠시만 제 지시대로 진법을 펼치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한립의 말에 석천공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검은 돌들과 진법 원반들을 꺼내 대청 곳곳에 박아 넣도록 했다.
“아직 부족합니다, 빨리요!”
석천공이 땀을 줄줄 흘리면서 소리쳤다.
“이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제가 시간을 끌 테니 계속해서 진법을 펼치세요.”
백리염이 음허과 귀목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나섰다.
“주인님, 이곳에선 저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백리 수사를 따라갈게요!”
“둘만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대라경 수사를 상대하다 한 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제혼까지 나서자 한립은 바삐 손을 움직이며 인상을 찡그렸다.
“진법 배치를 마치기도 전에 저들이 쳐들어오면 모두 여기서 죽는 겁니다. 촉룡도에서 소진한의 음모에 당해 흉살기 발작으로 죽을 뻔한 저를 려 수사가 태을단으로 살려 주셨고, 이곳에 붙잡혀 괴뢰가 될 뻔 할 것을 제혼 수사가 구해주었습니다. 두 번이나 죽다 살아났는데 죽는 게 두려워 아무 것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백리염은 걱정말라는 듯 웃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주인님. 구유역주가 저를 신임하니 저들도 제게 함부로 살수를 쓰지는 못할 거예요. 백리 수사와 함께 가서 시간을 벌어볼게요.”
“신중하게 움직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버티지 말고 돌아오세요.”
한립은 그들의 말을 듣고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마주친 백리염과 제혼은 순서대로 대청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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