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화. 사투(死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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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 일행의 흔적이 없자 음허가 손을 저었다. 검은빛이 떠올라 거울로 변하더니 휘리릭 회전하며 빛을 뿜었다.
곧 흐릿하게 한립 일행의 허상이 나타나 어느 길로 들어서는 모습이 그려졌다.
“저깁니다!”
* * *
검은 궁전 깊은 곳, 한립 일행은 미친 듯이 날아가고 있었다.
양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은 범인들의 황성처럼 보였다. 가면 갈수록 빛이 사라지고 새까만 안개가 실처럼 들러붙어 의식도 멀리 퍼트릴 수 없었다.
호삼 등은 겨우 백 장 정도를 살필 수 있고 한립은 구유마동을 발동해서 삼백 장 정도를 확인하며 길을 안내했다.
“대체 여긴 어딜까요? 제혼 수사, 뭔가 기억나는 것이 없으십니까?”
어둠 속을 헤매던 호삼이 참다못해 물었다.
“아뇨, 여긴 저도 처음이라.”
“이렇게 금제로 인한 제약이 심한 곳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멈춰서 저들과 제대로 싸워볼까요?”
“안 됩니다. 이곳의 제약이 심해도 대라경 수사까지 구속한다는 법도 없고, 이곳을 함부로 훼손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우리의 추측에 불과합니다. 반드시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지점을 찾아 싸워야 해요.”
석천공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말도 맞습니다.”
호삼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한립이 어딘가를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려 수사, 왜 그러십니까?”
석천공이 얼른 물었다.
“아닙니다. 주변 궁전들의 배치가 마치 진법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공간의 압력도 아마 그 진법과 연관이 있을 듯 싶고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습니다. 확실히 중요한 금지는 맞는 듯한데 지키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기이합니다.”
백리염도 주변을 둘러보고 의아해했다.
“엇, 귀목과 음허가 쫓아옵니다. 엄청난 속도로요!”
제혼이 굳은 얼굴로 경고했고 다른 이들도 화들짝 놀라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수행이 너무 차이가 나서 그들의 속도로는 추격자들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전방의 지하통로에서 특이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한립이 문득 앞을 가리키고 물었다.
“들어가 봅시다! 어차피 지금 상황이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 아니겠습니까.”
석천공이 이를 악물었다.
“하하, 저 안에 뭐가 있든 뒤에서 쫓는 이들만큼 성가시기야 할까요.”
호삼도 급한 와중에 웃음을 흘렸다.
“맞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그때그때 대처를 해야합니다.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백리염이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제혼은 모든 것을 한립의 뜻대로 따르기로 했기에 말이 없었다.
“이쪽으로 가시죠.”
한립이 방향을 살짝 틀어 왼쪽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수백 장 높이의 장식용 산이 하나 있고 그 아래로 동굴이 뚫려 있었다.
하얀 암석으로 이루어진 통로는 은은하게 반짝여서 신비로워 보였고 안에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립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고 곧 귀목과 음허도 따라왔다.
“제기랄! 여기로 달아날 줄이야……. 설마 저 놈들이 그 비밀을 알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일까요?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역주 대인과 우리 같은 대라급만 아는 비밀을 저들이 어찌 알고 있단 말입니까?”
귀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헛소리 말고 저들을 잡을 생각이나 하세요.”
음허가 성가시다는 듯 타박하고 먼저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귀목의 냉랭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노기가 일었는데 품에 안고 있던 하얀 짐승이 고개를 들고 작게 울었다.
하얀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화를 가라앉힌 귀목도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모두를 데리고 이런 곳으로 들어서다니 제 불찰입니다.”
한립은 네모난 공간의 거대한 석문을 앞두고 입을 열었다.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문에는 눈부신 은빛 금제가 펼쳐져 있어 물결치듯 허공이 일렁였다.
“자책할 것 없습니다, 려 수사. 이곳에 들어온 것은 모두의 결정이었어요. 여기까지 달아난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이제 최선을 다해 싸워봅시다.”
호삼이 하얀 송곳 선기로 금제를 공격해보고는 담담히 미소지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상대는 이곳에서 싸움을 벌이기를 꺼려하고 우리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반드시 지리란 법도 없지요.”
백리염도 허허 웃음을 흘려 분위기를 풀었다.
한립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딘가를 보면서 몸에서 금빛을 반짝이자 제혼이 그런 그를 보고 옆으로 다가왔다.
다른 이들이 전투 준비를 할 때 석천공은 석문으로 다가가 은색 거울을 꺼내 들었다.
“석 수사, 설마 금제를 풀 방도가 있겠습니까?”
백리염이 희색이 도는 얼굴로 물었다.
“금제가 워낙 고명해서 저도 파훼할 수 있다고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연구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게 어딥니까? 석 형, 안심하고 연구해보세요. 우리가 추격자들을 상대하면서 시간을 끌어보겠습니다.”
호삼이 당차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석천공이 석문 금제에 집중하기 시작하고 한립도 잠시 그를 보다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옵니다!”
제혼의 말이 끝나자마자 귀목과 음허가 통로 입구에 나타났다.
“쥐새끼 같은 것들이 빨리도 달아나는 구나!”
음허가 아직 금제가 뚫리지 않은 문을 보고 안심하며 냉랭히 말했다.
“주제도 모르는…….”
귀목도 한 마디 하려는데 쾅! 하고 천둥소리가 울리고 호삼이 든 하얀 송곳에서 뇌전이 날아갔다.
“싸우려면 그냥 싸우면 되지, 뭔 말들이 그렇게 많으냐!”
뇌전들은 신속하게 백여 개의 송곳 허상으로 변해 무시무시한 뇌전의 힘을 발산했다.
“오만한 놈이로다!”
귀목이 손에서 새까만 덩굴들을 뿜어 그물을 이루고 하얀 뇌전 송곳들을 막았다.
그런데 뇌전 송곳들은 하얀 물고기들처럼 검은 그물 사이사이를 넘나들며 폭발해 연달아 폭음이 들려왔다.
귀목이 부르르 떨며 그물들이 검은빛을 뿜어내자 부식성을 지닌 검은 안개가 늪처럼 하얀 뇌전 송곳들을 붙들었다.
호삼은 양손으로 빠르게 법결을 맺어 뇌전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귀목, 어쩌려는 겁니까?”
질책하는 음허의 말에 귀목이 얼굴 근육을 꿈틀했다.
그 틈에 호삼이 전신에서 은백색 빛을 터트려 뇌전법칙을 품은 송곳들이 덩굴을 뚫고 빠져나오게 했다.
한립은 그걸 보고 ‘과연’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손짓에 9개의 푸른빛이 날아가 음허의 앞에서 비검들로 변했다.
음허가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검은 그림자가 팽창해 둥근 보호막을 이루었고, 그 속으로 반쯤 파고든 아홉 자루의 청죽봉운검들은 더는 앞으로 찔러들어가지 못했다.
둥근 보호막 곳곳에서 소용돌이 문양이 생겨 청죽봉운검들을 빨아들이려 하자 한립은 차분하게 입에서 푸른 빛을 뿜었다.
9개로 갈라진 푸른 선령력 덩어리에는 시간법칙 정사인 금색 수정실이 한 가닥씩 들어있었다.
콰릉!
푸른빛을 흡수한 청죽봉운검들은 부르르 몸을 떨며 시간법칙이 어린 굵직한 뇌전들을 분출했다.
검은 보호막 안에서 금색 뇌전들이 충돌했다.
음허가 깜짝 놀라 검은빛이 약해진 사이 한립은 재빨리 손을 놀려 청죽봉운검을 회수했다.
이에 음허가 이를 악물고 뭔가를 하려는데 뒤에서 암홍색 사슬 2개가 날아들어 그를 감쌌다.
음허의 몸이 가느다란 그림자로 변해 대청 구석에서 나타나자 제혼은 코웃음을 치며 암홍색 사슬을 회수했다.
“유락, 외부인과 결탁해 구유역을 배반하다니! 그간 역주께서 너를 얼마나 아끼셨는지 잊은 것이냐!”
“난…….”
제혼은 음허의 말에 표정이 복잡해졌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한립이 끼어들어 검결을 맺고 음허를 향해 산처럼 커다란 검 허상을 날렸다.
음허는 진법문양으로 범벅이 된 뒤쪽 벽을 힐끗 쳐다보고는 피하지 않고 두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파동이 나타나 검 그림자와 충돌했다.
쿵!
거대 검 그림자와 검은 파동이 사라지고 미미하게 안색이 창백해졌던 음허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제혼, 지금은 망설이 때가 아니다. 저들은 이곳을 망가트릴 수 없는 것 같으니 이 기회를 잡아야 해.”
한립이 빠르게 전음을 보내며 다시 검결을 맺어 청죽봉운검들이 푸른 연꽃으로 검기를 터트리게 했다.
그 말에 마음을 다잡은 제혼도 암홍색 사슬 두 개를 뻗어 번개처럼 음허를 공격했다.
백리염도 전투를 시작해 입에서 검은 불빛을 내뿜으면서 검은 검빛으로 귀목의 머리를 노렸다.
여섯 사람이 한곳에 모여 각양각색의 빛을 터트리며 격전을 펼쳤다.
대라경 수사들은 음효의 기억에서 본 대로 강력한 신통을 발휘했다가 공간이 상할까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립 일행은 그런 걱정을 할 이유가 없었기에 전력을 다해 그들을 막아냈다.
비록 평소 실력의 1할도 발휘를 못해도 어쨌든 빠르게 승기를 잡고 그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대청 안의 벽들은 전투로 인해 점점 빛을 잃었고 공간 전체가 어두침침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대청 한쪽에서 금색과 붉은색 그리고 검은 색이 맞붙어 교전했다. 바로 한립, 제혼, 음허였다.
금빛과 검은빛이 교차하면서 한립이 어깨가 찢어진 채 비틀거리며 상처에서 피를 쏟았다.
음허도 살짝 몸이 흔들렸으나 금방 몸을 가누고 한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쉭!
검은 창 그림자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한립과 제혼을 향해 날아갔다.
아직 몸도 가누지 못한 한립은 굳은 표정으로 수결을 맺어 청죽봉운검 아홉 자루를 거검으로 만들어 창을 공격하게 했다.
챙! 챙! 챙!
창 허상들이 미끄러지듯 거검들을 스치고 한립 코앞에 이르렀다.
한립은 전신에서 금빛을 터트려 자금색 비늘이 덮인 두 주먹으로 검은 창 허상을 가격했다.
그러나 기대하던 충돌음 대신 그의 주먹 끝에 닿은 검은 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립은 깜짝 놀라 표정이 급변했다.
검은 창이 폭발하며 내뿜은 검은 파동이 체내로 들어와 몸을 구속하고 선령력 운용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옆에 선 제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자 봉쇄!”
음허가 낮게 외치며 수결을 맺었다.
한립과 제혼 곁으로 어둑한 그림자들이 몰려들어 거대한 우리를 만들고 있었다.
몸이 뻣뻣해 진 것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회복이 되었을 때는 이미 검은 우리 안이었다.
멀리 호삼과 백리염의 상황도 좋지 않아 몸이 검은 덩굴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귀목이 호삼과 백리염을 보고 웃음을 흘리며 손짓을 했다.
회색 문자가 빼곡하게 적힌 검은 나뭇가지 두 개가 나타나 사람의 혼백을 쏙 빼놓을 듯한 흉살기를 풀풀 날렸다.
음허 역시 두 손을 펼쳐 열댓 개의 검은 실을 뿌리고 있었다. 실들은 팔뚝만 한 검은 바늘로 변해 한립의 몸 곳곳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걸 본 한립이 눈꺼풀을 꿈틀했지만 당황하는 기색 없이 금빛을 방출하며 등 뒤로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검은 우리가 몸을 구속했어도 선령력 운용은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조밀한 금색 파문이 진언보륜에서 흘러나와 주변 수십장을 감쌌다.
대청 안의 모든 것들, 그러니까 검은 바늘들과 검은 나뭇가지들 그리고 검은 우리와 덩굴이 모두 움직임을 멈추었다.
음허과 귀목은 물론 금제를 파훼하던 석천공도 금색 파문 안에서는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은 오직 한립 하나였다.
폭!
한립은 주술을 외워 손끝에서 체내에 남은 시간정사들을 금빛 속으로 녹여냈고 곧 금빛 손가락 허상이 떠올라 검은 우리를 부수었다.
검은 우리에 커다란 구멍을 낸 것은 양천지 신통이었다.
다른 손으로 현천호리병박을 불러낸 그는 금색 광선을 호삼과 백리염 쪽으로 날려보냈다.
날카로운 법칙파동은 품질이 상당히 높은 금속성 선기를 부수고 얻어낸 법칙의 힘이었다.
호삼과 백리염을 두르고 있던 덩굴들이 싹뚝싹뚝 썰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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