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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72화 (1,629/2,000)

1872화. 성지

*

빛의 문을 닫은 한립과 일행들은 그녀를 따라 몸을 날렸다.

은신술을 펼친 채 앞으로 나아가던 그들 앞에 정(丁)자 형태의 갈림길이 나타났고 제혼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팟!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업화 통로 쪽에서 짙은 흉살기가 쏟아져 나와 귀목으로 변했다.

한립 일행을 쫓기 위해 함부로 세혼구에 침입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깨고 음허에게 전음을 보낸 다음 하얀 짐승만 데리고 넘어오는 길이었다.

호숫가에서 머리가 터져 죽은 음효를 발견한 귀목은 눈을 부릅뜨고 절규했다.

콰르릉!

그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터져 나와 업화 호수가 요동치고 동굴이 요동쳤다.

“감히 족인을 죽이고 아이들을 납치해 가! 네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귀등의 비료로 뿌리고야 말겠다!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

귀목은 뿌드득 이를 갈며 어깨에 앉은 작은 짐승을 내리쳤다.

열이 받아 생각보다 힘이 들어갔는지 하얀 짐승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렸으나, 겁을 먹어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짐승이 코를 킁킁거린 뒤 눈을 번쩍이면서 하얀 파문을 퍼트렸다.

몇 번 낑낑거리던 짐승은 업화 호수 주변의 통로 중 정확히 한립 일행이 도망친 방향을 앞발로 가리켰다.

“크큭, 잘했다!”

귀목은 방금 등뼈를 박살낼 뻔했던 짐승을 소중히 들어 안아 쓰다듬으며 검은 연기로 변해 통로로 몸을 날렸다.

* * *

제혼을 따라 좌로 우로 정신없이 이동하던 한립 일행은 쥐구멍처럼 복잡하게 갈라진 길을 따라 수백장 밑으로 내려가다 벽에 맞닥뜨렸다.

“막다른 골목으로 온 겁니까?”

“가짜예요. 어서 지나가죠.”

긴장한 석천공의 물음에 제혼이 걸음을 늦추지 않고 앞섰다.

쿠릉.

그녀가 충돌하자 벽이 밀리면서 좁은 틈을 만들어냈다. 가짜 벽을 지나 다다른 곳은 넓은 지하 대청이었다.

그들이 막 대청에 들어섰을 때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음폭 장로님, 침입자가 도착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태을경 최고봉의 장로를 따라 구유족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귀목이 따라붙고 있습니다. 저들과 교전하느라 이곳에 발이 묶여서는 안 돼요.”

한립이 이렇게 외치고 구유족인들이 몰려드는 통로와 다른 쪽 통로로 방향을 틀어 달아났다.

구유족 수사들이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을 추격하려 했다.

“이걸 써봐야겠습니다.”

피식 웃은 백리염이 검은 구슬 몇 개를 뒤쪽으로 던지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구슬들은 튕겨 오르면서 표면이 갈라지고 있었다.

쾅쾅쾅쾅!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굉음이 울리고 거대한 검은 화염 덩어리가 수축했다 확장하면서 통로를 막고 불바다를 만들었다.

충분히 멀리 피한 한립 일행도 작열하는 열기에 간담이 서늘해지고 입이 말랐다.

그들을 쫓던 구유족인들의 상황은 더욱 참담해서 스스로 업화살뢰를 발산할 틈도 없이 백리염의 불길에 휩싸였다.

한립 일행이 대청을 빠져나가고 왼쪽 통로에서 수척한 생김새의 흑포 사내가 나타났다. 대라경 중기의 실력자인 그는 세혼구를 맡아 지키는 음허였다.

바닥에 쓰러진 족인들의 처참한 몰골에 음허의 회백색 눈빛 속에 폭풍이 치는 듯했다.

그때 다른 통로에서 귀목이 뒤늦게 도착했다.

“음허 장로, 그놈들은 잡았습니까?”

“흥, 한발 늦었습니다.”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서 소리쳐 묻는 귀목에게 음허는 좋지 않은 낯빛으로 대답했다.

백장구를 잘 지키지 못해 침입자들이 여기까지 오게 한 자신의 죄를 잘아는 귀목은 그걸 보고도 딴소리를 하지 못했다.

“아까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는데, 그놈들이 호숫가에서 음효를 죽이고 제동(祭童)들을 납치해갔습니다.”

“뭐라고요? 대체 당신과 음괄은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귀목의 말에 음허의 얼굴이 더욱 음산해졌다.

“그게……. 원래 음괄 장로가 그들을 잡아 가둬두었는데 유락이 갑자기 우릴 배신하고 유뢰에서 그들을 탈출시켰지 뭡니까.”

“유락이…….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음괄은 어디 있는 겁니까?”

“폐관하며 요양 중입니다. 사람을 보내 알렸으니 금방 올 거예요.”

“아니, 때가 어느 땐데 속 편하게 폐관수련을 하고 있단 말입니까! 삼역회맹이 개최되는 중요한 시점에 역주대인께서 이 일을 알게 되시면 우리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화가 난 음허가 소리쳤다.

“음허 장로, 이 일을 지금 보고드릴 수는 없습니다. 당신과 음괄 장로는 어쩌면 고생 좀 하고 용서를 받을 수 있겠으나 저는 장기를 뽑히고 괴뢰로 제련될지 모른단 말입니다.”

역주 이야기가 나오자 귀목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일단 저들을 깨끗이 처리하고 보고를 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둔광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시각, 제혼을 따라 일행들과 아래로 기울어진 통로를 날아가던 한립은 왠지 소름이 돋아 뒤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큰일입니다, 음허 장로까지 추격하고 있어요!”

제혼도 뒤쪽 동정을 확인하고 놀라 소리쳤다.

그녀는 속도를 두 배로 높였고 한립도 추격자들에게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몸속의 진언보륜을 역전했다.

그의 소매 속에서 푸른빛이 빠져나가 일행들을 감싸고 동시에 그 자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잠시 후, 통로를 빠져나온 한립은 거대한 지하동굴을 발견했다.

만 장에 이르는 동굴의 지형은 평평했고 하얀 광장 너머로 독특한 양식의 둥근 지붕의 궁전들이 들어서 있었다.

궁전 바깥에 검은 주술문자들이 반짝이는 붉은 빛의 장막이 드리워 금제가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긴 어디기에 이렇게 거대한 금제로 봉인해둔 걸까요?”

“음효의 기억 속에서 본 바로는 아주 중요한 장소 같았어요. 역주도 평소 이곳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주변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도 엄금했어요.”

제혼이 생각 끝에 답했다.

“이런, 음허가 따라붙었습니다. 귀목도 함께입니다.”

돌연 눈썹을 끌어올린 한립이 다급히 말했다.

“정말 끈질기게도 쫓는군요! 이렇게 달아나기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백리염이 투덜거렸다.

“이전에 힘을 너무 썼습니다. 한번 더 공간 신통을 사용해 모두를 이동시킬 수는 있겠으나 이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석천공도 탄식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붙어보는 수밖에요! 물론 전력상으로 너무 밀려서 승산은 크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호삼도 한숨을 쉬듯 말했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궁전 안으로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역주가 인근에서 전투를 금했다면 구유족이 중요하게 생각해 망가트려서는 안 될 장소라는 뜻일 겁니다.”

눈을 번뜩인 한립이 의견을 내놓았다.

“그게 좋겠어요. 역시 주인님께서 생각이 깊으세요!”

제혼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다른 이들도 반대하지 않고 궁전 앞으로 향했다.

금제 보호막 너머로 굳게 닫힌 대문과 그 위의 거대한 조각상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 문의 조각상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백골들이 첩첩이 쌓여 흉측한 의자를 이루고 그 위에 거대한 낫을 든 구유족 사내가 술에 취한 얼굴로 늘어져 있었다.

오른쪽 문에는 무섭게 생긴 짐승들이 서로를 물어뜯으면서 피가 강이 되어 흘렀고, 위로는 짙은 머리에 뾰족한 뿔이 나고 전신에 안개를 두른 거대한 짐승이 입을 쩍 벌리고 앉아 있었다.

“보통 금제가 아니라서 파훼하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석천공이 보호막에 어린 주술문자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들이 오고 있어요.”

한립은 한 손을 펼쳐 검은 장도를 불러냈다. 호삼이 장도의 칼자루에 머리 둘 달린 여우 조각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한립을 힐끗 보았다.

한립은 그의 반응을 살필 겨를 없이 의식연계를 통해 석경후와 대화를 나누었다.

“석 수사, 상황이 긴박해 당신의 힘을 빌려야겠습니다. 눈앞의 금제를 깰 생각이니 도움을 주시길 바랍니다.”

“녀석아, 내 직감에 이 안에 든 것도 네가 상대하기 만만치 않은 존재일게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내린 결정이냐?”

“우릴 쫓고 있는 둘도 만만치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도와주시지요.”

“좋다. 네 결심이 섰다면 나야 더 할 말이 없지. 온 힘을 다해 장도로 금제를 가르기만 해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야.”

“감사합니다.”

석경후의 대답을 듣고 한립이 두손으로 장도를 단단히 쥐고 앞으로 나섰다.

그의 기세가 삽시간에 변한 것을 본 일행들은 뒤로 물러나 그와 거리를 벌렸고, 호삼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검은 장도의 여우 조각이 두 눈에서 핏빛을 발하고 암홍색 빛을 터트렸다.

후우웅.

폭발적으로 터져나간 기운이 눈에 보이는 파문을 만들며 지하 공간을 웅웅 울렸다.

그때 바깥쪽 통로에서 검은 기운이 음허와 귀목을 품고 날아들었다.

“놈들이 금지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음허가 놀라고 화가 나 소리쳤다.

“저들의 전력으로 그리 쉽지는 않을…….”

귀목이 뭐라 답하려는데 전방의 진동이 강해졌다.

“빌어먹을…….”

음허가 중얼거리면서 두 눈에서 빛을 발했다.

검은 안개의 속도가 배로 빨라져 막 궁전이 있는 지하궁전 입구로 빠져나왔을 때, 공교롭게도 한립이 든 장도가 보호막과 충돌하고 있었다.

쿠콰콰쾅…….

검은 장도에서 거대한 핏빛 장도 허상이 빠져나와 보호막으로 떨어졌다.

허상 속에는 두 마리의 새하얀 여우가 뒤쪽의 음허와 귀목을 보면서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커다란 천둥소리가 울렸다.

수많은 암홍색 뇌전빛이 장도 허상과 보호막 허상 사이에서 튀어나와 궁전 위쪽의 하늘을 가르고 어둑한 빛이 드리웠다.

사방으로 날아간 뇌전들이 기다란 채찍처럼 주변을 가르면서 광장에 뇌전 장막을 만들어 한립 일행과 추적자들 사이를 막아 주었다.

“열렸습니다!”

석천공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다 기쁨에 차 외쳤다. 보호막에는 정말로 좁은 틈이 벌어져 있었다.

“어서 들어갑시다!”

호삼이 일행들을 재촉했다.

백리염과 제혼은 이번 일격으로 선령력이 바닥난 한립을 좌우에서 부축하고 보호막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금제를 깨고 안으로 들어가자 이를 지켜보던 음허와 귀목은 난색을 표했다.

뇌전 장막으로 인해 앞이 가로막혀 그들이 궁전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뇌전들이 가라앉기 시작하고 금제의 틈이 봉합되는 와중에 귀목과 음허도 그 앞에 도착했다.

“저 장도가 어떤 보물이기에 금제를 한 번에 가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귀목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쳐 죽일 놈들, 감히 금지 안으로 달아나? 어서 쫓읍시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음허가 손을 저어 악귀 머리가 새겨진 검은 영패를 꺼내 들었다.

음허가 수결을 던져 넣자 악귀 머리 조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귀목도 수결을 맺어 검은 영패 안에 법결을 던져 넣었다.

빛이 점점 강해지며 검은 영패에서 악귀 머리가 눈을 뜨고 두 눈에서 회백색 광선이 쏘아져 나가 보호막으로 흡수되었다.

금세 금제에 사람이 드나들만 한 입구가 갈라지고 두 사람은 그 사이로 보호막을 지나 궁전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이 궁전 안으로 들어섰을 때 어둑한 대전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한립 일행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시선을 마주친 음허과 귀목은 마치 무언가를 자극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즉시 기운 파동을 숨기고 둔광을 일으켜 그들을 추격했다.

“음허, 이제 일이 정말 심각해졌습니다. 역주 대인께 고하는 것이 어떨지요?”

귀목이 심란한 얼굴로 동료의 의사를 물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분의 성격상 우리가 외부인을 금지 안으로 들였다는 것을 알면 우린 끝입니다. 음후 장로가 당시 어찌 되었는지 잊어버리셨습니까?”

음허가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보고를 하지 않았다가 저들이 큰 사고라도 치면 죽음으로도 그 죄를 갚을 길이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금지 안의 금제는 우리 둘의 힘으로도 뚫을 수 없는데 제깟 것들이 어쩌겠습니까. 궁지에 몰려 이 안으로 들어섰을 테지만 스스로 화를 자처했다는 것은 모르고 있겠지요.”

“알겠습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궁전 안의 광장을 지나 일고여덟 개의 작은 건물들을 따라 나있는 십여 개의 작은 골목길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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