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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871화 (1,628/2,000)
  • 1871화. 격퇴

    *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한 통로에서 어려보이는 구유족인 두 명이 나타나 업화 호수로 다가가고 있었다.

    똑같이 검은 장포를 걸친 이들은 용모가 비슷해 쌍둥이처럼 보였다.

    “연아, 비록 장로께서 오늘 성안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 하루 정도는 수행을 쉬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우리도 벌써 10살이야. 몇 년 지나지 않아 성인이 된다고. 시간을 아껴 수련에 매진하지 않으면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수 없을 거야.”

    “은아 형, 잔소리 좀 그만 해요! 귀에 딱지 앉겠어요. 될 사람은 어떻게 해도 되는 거예요. 특히 음창 그 자식에게는 뒤지지 않을 테니까 걱정말아요.”

    성인이 된 구유족 수사들과 달리 앳된 그들은 특유의 냉랭함이 없었다.

    업화 호숫가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아이들은 수결을 맺고 검은빛을 일으켜 업화의 정순한 흉살기를 끌어들였다.

    그들이 호흡할 때마다 검은 기운이 코로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퍽 신비로웠다.

    “겨우 10살에 결단기에 이르고 업화에 저리 가까이 다가가 수행을 하다니 구유족인들의 강함을 알겠구나.”

    “구유족이 원래 업화에 대한 내성이 다른 종족보다 강해서 그래요. 저 꼬마들은 기껏 해봐야 중하위권의 자질을 지녔을 뿐일걸요?”

    한립이 감탄하는 소리에 제혼이 설명해주었다.

    몸을 돌린 한립은 그녀와 같이 통로 안쪽으로 더 들어가 은색 빛의 문을 만들어냈다.

    백리염과 호삼 등이 죽루 안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다가 눈을 뜨고 일어났다.

    구석의 열화선존은 은색 사슬에 꽁꽁 묶여 몸을 떨고 있었고 입이 보라색 부적으로 봉해져 있었다.

    그 옆에 치융이 씁쓸한 시선으로 앉아 있다가 한립을 쳐다보았다.

    “어찌 된 일입니까?”

    백리염이 먼저 은색 문을 나서는 것을 보고 한립이 물었다.

    “흉살기에 너무 오랫동안 잠식된 탓에 이성을 잃어 호삼과 석 수사가 제압했습니다.”

    “상태를 보아하니 한두 번만 더 발작을 일으키면 완전히 회선으로 변하고 말겠더군요.”

    호삼도 따라 나오며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화지 동천을 나온 일행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업화의 흉살기를 막고 은신술을 펼쳤다.

    “이미 세혼구 안입니다. 수라성에서 가장 특수하게 취급되는 곳이라 제혼도 몇 번 와본 적이 없고 지도에도 아무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세 살지를 찾아가면 좋을지 의견이 있으십니까?”

    한립이 빛의 문을 닫고 모두에게 물었다.

    “저기 꼬마들을 붙잡아 추혼술을 펼쳐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석천공이 통로 끝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겨우 괴뢰 한 마리를 죽였는데 음괄이 눈치를 채고 나타났습니다. 구유족인의 몸에는 어떤 금제나 특수한 표식이 있을지 모르는데 무턱대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백리염이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반대하는 이유를 말했다. 이에 한립이 입을 열려다 안색이 변해 입을 다물었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제혼은 한립이 살쇠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줄 알고 급히 물었다.

    “려 수사…….”

    백리염도 표정이 달라졌다.

    “그러고 보니, 마광 수사는 어찌 된 것입니까?”

    그때 석천공이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조금 전, 마광과의 감응이 끊어졌습니다. 다시 의식연계를 통해 대화를 나눠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하더군요.”

    한립이 표정을 바로 하고 답했다.

    “뭐라고요?”

    석천공이 놀란 얼굴을 했다.

    “설마 그 말은 마광 수사가 이미…….”

    호삼도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제게 시간을 끌어 준다고 했고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는 약조를 지켰습니다.”

    한립은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간략히 말했다. 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리가 달아난 것을 귀목도 알 테고, 마광과의 연락도 끊겼으니 그가 쫓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세살지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들킬 것을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할 것 없지요. 제가 구유족 아이들에게 추혼술을 펼치고 돌아오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석천공이 고개를 끄덕이고 번득 사라졌다.

    호숫가의 아이들은 등 뒤로 공간 파동이 인 것도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소리 없이 나타난 석천공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그들의 목덜미를 잡아채려는데, 멀리서 그를 지켜보던 한립의 눈앞이 번득였다.

    옆에 서있던 제혼이 튀어 나가 암홍색으로 물든 손으로 석천공의 등을 가격한 것이다.

    다들 깜짝 놀랐고 호삼이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펑! 하는 충돌음이 울렸다.

    등 쪽에서 밀려든 괴력에 날아가 바닥을 구른 석천공은 멀리 산 벽에 부딪히고서야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한립 등은 석천공 뒤에 회색 그림자가 붙어 있고, 그게 제혼이 노리던 목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파칙.

    석천공도 이상을 감지해 전신에서 무형의 기운을 발산해 주변을 방어했다.

    그의 등 뒤에 달라붙어 있던 회색 그림자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연처럼 날아올라 살짝 떨어져 나갔다.

    촤르릉!

    제혼이 신중한 얼굴로 손바닥을 펼쳐 암홍색 사슬로 회색 그림자를 뚫으려 했지만 그림자가 재빨리 움직여 실패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던 구유족 아이들은 놀랍게도 겁먹은 기색없이 회색 그림자 뒤로 몸을 숨겼다.

    “유락, 감히 외부인을 도와 구유족인을 납치하려 한 것이냐?”

    회색 그림자는 창백한 얼굴에 매부리코를 지닌 구유족인으로 변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음효.”

    인상을 찡그린 제혼이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녀는 몰래 한립 등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환허법칙(幻虛法則)을 수련한 태을경 최고봉의 수사입니다. 법칙이 특이하고 은신과 암살에 능하니 주의하세요.”

    “여기서 시간을 축낼 수 없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속전속결을 내지요.”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모두에게 전달했다.

    “음효 장로, 미안합니다.”

    얼굴이 서늘해진 제혼이 두 손을 펼쳐 열댓 개의 암홍색 사슬을 날렸다.

    그런데 음효는 냉소를 흘리며 피하려 하지 않고 사슬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슬은 그를 그대로 통과해 티티팅! 소리를 내며 바닥에 꽂혔다.

    휘잉!

    더없이 빠른 속도로 사슬들을 통과한 음효는 제혼의 머리를 내리치면서 손바닥에서 회색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순간 당황한 제혼이 암홍색 사슬을 불러들이려 했지만 깊이 바닥에 박힌 사슬은 꼼짝하지 않았다.

    잿빛이 어린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에 떨어지려는 순간 그녀의 눈 속에서 웃음기가 어렸다.

    제혼의 미간에서 암홍색 실선이 갈라져 제3요목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걸 본 음효가 안색이 확 변해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요목에서 빠져나온 암홍색 빛이 한발 앞서 그를 둘러쌌다.

    음효는 머리에 벼락을 맞은 듯 떨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한립의 신형이 뒤에 나타나 금빛 뇌전을 품은 청죽봉운검으로 음효의 뒤통수를 찌르려 했다.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쓰러질 것 같은 음효의 목이 왼쪽으로 기이하게 비틀어지며 한립의 검을 피하고는 한립의 뒤에서 또 다른 창백한 얼굴의 음효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 더 있을 줄 알았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두 사람으로 분리된 것처럼 새로 나타난 음효가 검은 비수를 들고 한립의 목을 노렸다.

    팟.

    한립도 진작 예상했는지 등 뒤로 진언보륜을 불러내 급속도로 회전시켰다. 팔을 뻗던 음효는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이 느려졌다.

    한립은 비수를 피할 것도 없이 상대의 목을 털어쥐고 다른 손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뭔가 이상한데…….’

    검 끝이 두 번째 음효에 닿는 순간, 한립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황급히 검을 거두며 아래로 몸을 피했다.

    곧바로 아랫배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전해졌다.

    그가 목을 붙들고 있던 음효의 뱃속에서 또 다른 음효가 튀어나와 검은 비수를 들고 그의 단전 위쪽을 찌른 것이다.

    그를 찌른 음효는 씩 웃음 짓고 비수를 위쪽으로 쳐들었다.

    흉살기가 응결해 한립을 둘로 가르고 오장육부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엄청난 양의 선혈이 튀었다.

    비수를 거둬 혀로 피를 핥던 음효의 귓가에 돌연 한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 수사, 준비되셨습니까?”

    “됐습니다!”

    “경화수월(鏡花水月), 흩어져라.”

    한립이 법언천지 신통을 흩어버리자 숨이 끊긴 한립의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홀로 비수를 혀로 핥고 있었다.

    그 사이, 기절한 구유족 아이들을 호삼이 양팔에 껴 안아 올렸다.

    “안 돼…….”

    흠칫 놀란 음효가 상황을 인지했을 때는 주변의 공간이 구불구불 왜곡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의 힘이 억압해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의 뒤쪽에서 석천공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나머지 손으로는 은색 비파를 타며 창백한 얼굴로 손가락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려 수사, 오래 버티지 못하니 빨리 끝내야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새까만 촉룡 발톱이 위쪽에서 떨어져 음효의 머리를 잡아 뜯으려 했다.

    “잠깐!”

    한립은 그가 혼백까지 뭉개버리려하자 급히 말리며, 벽사신뢰를 품은 청죽봉운검들을 날려 음효의 중요 혈들에 박았다.

    치지지직.

    뇌전이 타고 흐르는 통에 음효가 연달아 비명을 질러댔다.

    신통이 풀어진 석천공은 여전히 창백한 모습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제혼의 신통으로 음효의 혼백이 진탕되었을 때, 한립은 법언천지를 사용해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석천공이 은색 비파를 이용해 비술을 펼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태을경 최고봉의 음효를 별다른 피해 없이 제압할 수 있었지만 석천공은 아직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은색 비파를 발동하느라 내상을 입고 말았다.

    백리염은 음효가 제압된 후에도 그의 머리통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주인님, 업화 통로에서 고생하셨으니 추혼술은 제게 맡겨두시고 잠시 휴식을 취하세요.”

    한립이 나서려는데 제혼이 입을 열었다.

    “그러거라.”

    그의 허락에 제혼이 자신의 이마를 짚어 다시 암홍색 요목을 드러내고 붉은빛으로 음효와 두 아이들을 동시에 감쌌다.

    동시에 세 사람에게 추혼술을 펼치는 것은 강력한 의식을 지닌 한립도 못 할 일이었다.

    기절해 있던 아이들이 눈을 뜨고 비척비척 일어나 앉았다. 꼭두각시 같은 그들의 두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음효는 본능적으로 저항하다 그들보다 훨씬 늦게 눈빛이 흐릿해졌다.

    “어떠하냐?”

    제혼의 암홍색 빛이 흩어지고 아이들이 눈을 감고 쓰러지자 한립이 물었다.

    “아이들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해 진정한 구유족인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세살지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음효는 강력한 의식을 지닌데다 기억이 봉인되어 있어 애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세혼구의 대략적인 지형은 파악했어요.”

    “그렇다면 되었다.”

    “이제 이 녀석은 필요 없다는 말이군요?”

    기다렸다는 듯 백리염이 손아귀를 쥐어 거대 촉룡 발톱으로 음효의 머리통을 으깨버렸다.

    “안돼요!”

    제혼이 놀라 소리쳤지만 늦고 말았다.

    “제혼 수사, 어째서…….”

    백리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돌아보았고 한립은 제혼의 표정을 보고 사태를 파악했다.

    제혼은 진심으로 한립을 도와 살아서 빠져나가게 해주고 싶었지만, 함부로 구유족인을 죽여 사제 지간으로 많은 은혜를 입은 구유역주를 배반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백리 수사,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구유족인을 아무렇게나 살해하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립은 탄식하듯 말했다.

    “이해했습니다. 제혼 수사, 미안합니다.”

    백리염도 눈치를 채고 제혼을 향해 포권을 했다. 제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호삼이 축 늘어진 구유족 아이들을 들어 올렸다. 제혼이 뭐라 답하기 전에 한립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제 통천 보물 속에 가둬둡시다. 음효족 태을경 장로가 직접 보호하고 있던 아이들이니 평범한 신분은 아닐 거예요.”

    그가 빛의 문을 열고 호삼이 들고 있던 구유족 아이들을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동천 입구를 닫기도 전에 한립의 안색이 급변했다.

    “제길, 귀목이 쫓아옵니다.”

    “저쪽으로 가요!”

    제혼이 미간을 좁히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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