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화.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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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한립이 화지 동천을 닫고 다리 끝에 이르자 제혼이 전신에 암홍색 빛을 두르고 업화 속으로 뛰어내렸다.
잠시 후 업화 연못의 검은 불길이 갈라지면서 그녀가 돌아왔다.
“연못 아래와 세혼구로 통하는 출구의 봉인을 잠시 막아놨어요. 안심하고 가셔도 되어요.”
“고생 많았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유락,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는 겁니까?”
그때 누군가의 엄한 꾸짖음이 들려왔다.
한립이 휙 고개를 돌리니 눈꼬리가 길게 빠지고 물귀신처럼 피부가 창백한 마른 중년인과 그의 품에 안긴 흰색 살쾡이가 보였다.
연귀보 쪽에서 보았던 대라급 수사 귀목이었다!
그의 뒤로 다양한 용모를 지닌 수십 명의 괴뢰와 유노가 뒤따랐고 그중에는 소류도 있었다.
“귀목 장로, 저는 사존의 명을 받아 이 자를 업화에 제련시키려는 겁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유뢰로 돌아갈 수 없겠네요.”
제혼이 담담하게 답했다.
귀목은 제혼이 든 새빨간 사슬이 한립의 어깨를 꿰뚫고 있는 것을 자세히 살피고 코웃음 쳤다.
“역주 대인께서는 타호구에 신경을 쓰시느라 여념이 없으시고 음괄 장로도 폐관하며 특별히 내게 나생구를 돌봐 달라 부탁했습니다. 음괄 장로가 역주에게 보고를 드리지 않았는데 어찌 역주의 명을 받았던 겁니까?”
그의 표정을 보고 더는 속일 수 없다고 판단한 제혼은 한립의 몸에서 핏빛 사슬을 뽑아냈다.
그러자 한립의 어깨에 뚫린 구멍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정말 역주를 배반할 생각입니까?”
“나중에 직접 사존께 찾아가 벌을 청하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신다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귀목 장로.”
인상을 찡그린 귀목의 말에 제혼도 머뭇거리며 말했다.
“후회할 겁니다.”
서늘하게 소리친 귀목은 안고 있던 하얀 짐승을 풀어주었다.
하얀 짐승은 그의 발밑에서 주춤하다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한립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소류가 서 있던 입구 쪽으로 튀어 나갔다.
“가요!”
그걸 본 제혼이 손바닥을 펼쳐 허공에 대고 암홍색 빛의 장막을 분출했다. 특이한 기운을 지닌 핏빛 영역이 그녀와 한립을 감쌌다.
한립은 회계를 벗어난 듯 더이상 흉살기 압박을 받지 않고 제혼에게 이끌려 업화로 떨어졌다.
“제 영역 안에서는 주인님도 업화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의식은 잘 보호하셔야 해요.”
당부를 마친 제혼 위로 소류가 날아들었다.
촤르릉.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리고 소류 가슴 구멍에 박힌 금속 구슬의 주술문자가 반짝거렸다.
그러자 화염 속에 검은 연꽃을 피우듯 사슬들이 퍼져나갔다. 그걸 본 한립은 두 팔에 금색 비늘을 일으키고 청죽봉운검을 불러냈다.
쿵!
소류의 검은 화염에서 이글거리는 도끼가 튀어나와 금빛 뇌전과 충돌해 사방팔방으로 업화와 뇌전이 튀었다.
촤릉!
도끼가 막히자 소류는 쇠구슬이 달린 사슬을 움직였다.
쿵!
도끼날보다 훨씬 큰 쇠사슬에 맞은 한립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 업화 연못으로 떨어졌다.
제혼이 급히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어딜 가려느냐!”
귀목이 동공을 수축했다.
한립과 제혼이 밀리는 척하면서 업화 속에서 세혼구로 통하는 출구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확실히 제혼의 영역 덕분에 지난번처럼 괴롭지는 않았으나 한립은 전력으로 연신술을 운용해 손상된 의식이 더는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막았다.
업화 연못 위로 이동한 귀목이 아래를 향해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 검은빛이 덩굴식물처럼 뻗어 나가 거대한 그물을 이루고 두 사람을 가두려 했다.
동시에 유노와 괴뢰들도 전부 몰려들어 병장기를 마구 휘둘렀다.
“가라.”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어 녹색 호리병박을 꺼내 들고 밑바닥을 쳤다. 녹색 보광이 강렬한 법칙 파동을 발산해 주변의 업화를 밀어냈다.
챙!
눈부신 금색 검빛이 호리병박 입구에서 빠져나가 업화를 가르고 새까만 거대 그물을 끊으려 했다.
그물이 진동하고 유노와 괴뢰들이 날린 공격이 흩어졌다.
“가소롭구나.”
귀목은 그의 행동을 비웃으며 번득 사라져 한립과 제혼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손바닥에서 검은 액체가 빠져나와 안개로 변하더니 거대 그물로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물은 빠르게 수축하면서 한립과 제혼을 더욱 구속했다. 그 밖에 가느다랗게 갈려져 나온 덩굴 가지가 청죽봉운검까지 끌어와 귀목쪽으로 끌고 가려 했다.
“주인님 어서 보물을 거두세요. 귀목 장로가 수련한 귀등법칙(鬼藤法則)은 음의 독한 기운을 지니고 있어서 극양의 기운을 지닌 완골금뢰 같은 게 아니면 해칠 수 없어요. 게다가 덩굴의 독액이 선기를 부식시켜서 회계의 법보로 만들어 버려요.”
제혼이 멈춰서 경고했다.
그녀의 손에서 핏빛 사슬이 떠올라 그들을 쫓아온 소류를 향해 날아갔다.
제혼의 말대로 그물에 맺힌 검은 액체에서 지독한 썩은 내가 풍겼고, 검은 액체가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청죽봉운검이 애달피 울며 금빛 뇌전을 터트렸다.
한립은 검신에 하얀 흔적이 남은 것을 보고 긴장했다.
놀라 서둘러 검을 불러들이려 했지만 의식 연계가 끊겼다 연결되었다 불안정해져 있었다.
“한 벌로 된 검이로구나. 선계 금선이 쓰는 것치고는 괜찮아. 어떻게 제련한 것이냐?”
귀목은 한립이 든 또 다른 청죽봉운검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얼굴을 굳힌 한립이 호리병박을 들어 다시 밑바닥을 때렸다.
녹색 광채가 귀등을 막고 청죽봉운검을 데리고 돌아오려 했다.
“호오, 현천의 보물이라……. 보물이 적지 않구나?”
눈썹을 끌어올린 귀목이 웃음을 흘리고 검은 그물에서 덩굴을 늘어트려 둘 다 빼앗으려 했다.
서걱서걱.
하지만 호리병이 진동하고 암녹색 광선을 날려 덩굴들을 잘라냈다. 다행히 그 틈에 한립은 청죽봉운검과 호리병박을 회수할 수 있었다.
“훼멸법칙까지……. 음괄이 널 살려두라고 신신당부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구나.”
귀목이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쿵!
굉음이 들리고 제혼이 소류와 충돌한 뒤 튕겨지듯 한립 곁으로 돌아왔다.
“주인님, 괴뢰들은 혼백이 없어서 제 신통이 잘 통하지 않아요. 게다가 귀목은 대라급이라 저도 잠시밖에는 막을 수 없어요. 아무래도 세혼구까지는 데려다주지 못할 것 같아요.”
제혼은 씁쓸하게 말했다. 고개를 저은 한립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라급 수사를 상대로는 시간법칙을 사용해도 승산이 전혀 없었다.
“한 수사, 저를 소환해 주시지요!”
그 순간 머릿속에 마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얼 하려는 것입니까?”
“저는 어차피 남의 몸을 훔쳐 사는 입장입니다. 몸과 혼백이 융합된 것 같아도 실제로는 따로 놀지요. 제혼의 신통이 괴뢰들에게 통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고요. 오늘 몸을 잃더라도 한 가지 약조만 해주시면 수사를 위해 목숨을 걸어 보겠습니다.”
“천마계약 해지를 말하는 거군요.”
“천마계약을 맺기는 쉬워도 끊기는 어렵지요. 귀목을 이길 수는 없어도 수사를 위해 반 시진은 벌어드릴 수 있습니다. 반 시진 후에 제가 죽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살아남으면 그 후로는 서로 어떤 의무나 책임도 없는 겁니다. 어떠십니까?”
“알겠습니다.”
마광은 빠르게 원하는 바를 전달했고 한립도 즉답을 주었다.
팟.
은빛 속에서 마광이 나타나 이전의 표정과는 달리 낯설게도 아주 진중한 표정을 드러냈다.
“허합족인…….”
귀목이 반감을 드러냈다.
“가세요. 여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마광은 귀목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소리쳤다.
“겨우 태을경 수사가 감히!”
귀목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마광을 향해 달려들었다.
쿠오오오!
마광이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자 은회색 눈 사이에 묘한 문양이 떠올랐다.
들끓는 흉살기로 인해 장포를 펄럭이는 그의 기운은 어느새 태을경 후기에 가까워져 있었다.
“언제…….”
한립은 상대가 태을경 후기인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마광이 소매를 펄럭이자 아래쪽 업화가 거대한 화염 기둥으로 변해 귀목을 향해 치솟았고, 마광의 손끝이 칼날처럼 허공을 찌르자 검은빛이 튀어 나갔다.
푹!
검은 그물이 터지며 구멍이 뚫렸고 한립은 그를 향해 포권을 한후 제혼과 함께 그물을 벗어나 업화 통로로 질주했다.
쉭!
한립과 제혼이 통로를 들어가려는 순간, 파공음이 들려오며 소류가 도끼날 허상을 뿌리면서 검은 기운을 감싸고 달려들었다.
그때 갑자기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소류가 그 자세 그대로 멈추고 허공을 뒤덮은 도끼날 허상들도 정지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소류의 심장에 박힌 금속 구슬이 멈춰 있었다.
“어서 달아나야 해요, 주인님!”
제혼이 소리치며 한립과 함께 업화 통로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순간, 검은 귀등들이 마광의 육체를 뒤덮고 통로 입구까지 퍼졌다.
쿠콰콰쾅!
벽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 무섭게 흔들거렸고 떨어져 내린 암석에 업화 통로 입구가 막히고 말았다.
한립과 제혼은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오로지 다른쪽 출구를 향해 질주했다.
‘윽!’
한립은 제혼의 영역을 뚫고 바늘처럼 꽂히는 흉살기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립의 이상을 알아차린 제혼은 암홍색 기운을 북돋아 재빨리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통로로 진입할수록 끈적하게 변해 흉살기 침식은 더욱 심해졌다.
“세혼구로 갈수록 업화가 정순해져서 침식능력도 강해질 거예요. 전력으로 영역을 펼쳐 막겠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조심하세요.”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제혼의 당부에 한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최선을 다해 연신술을 발동하는데도 머리가 무겁고 심장이 뛰는 속도가 빨라져서 몸속에 잠복해 있던 흉살기들이 언제라도 미친 듯이 날뛸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벌써 수많은 핏빛 인영들이 전장을 누비며 무자비한 살육을 하고 그로 인해 풍기는 피 냄새까지 생생하게 떠올라 조만간 세살지에 이르지 못하면 더는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거의 다 왔어요!”
제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눈빛이 흐릿해지고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던 한립의 혈자리에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혼충을 심기 전에는 그래도 강대한 의식과 연신술의 보조로 어떻게든 견뎠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어려웠다.
이대로 살쇠 발작이 일어나면 철저히 회선이 되고 말 것이다.
파앗.
바로 그 순간, 한립의 미간 앞쪽에 붉은빛이 반짝였다. 제혼이 손에 든 붉은 구슬을 그의 미간에 가져다대었다.
매끈한 구슬 안쪽에는 작은 짐승 허상이 엎드려 앉아 있었는데 제혼의 진짜 모습과 비슷했다.
부드러운 빛이 독특한 혼백의 힘을 품고 한립의 의식세계로 흘러들어 피로 물든 그의 정신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고 있었다.
그 덕에 한립도 연신술을 이용해 다시 흉살기 침식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한립의 눈이 맑아질수록 제혼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제혼, 어찌 된 것이냐…….”
“괜찮아요. 제 혼백의 힘이 깃든 구슬이라 몸속에 넣어두고 요양하면 금방 회복될 거예요.”
제혼의 말에 한립은 얼굴이 어두워졌으나 더는 묻지 않았다.
다행히 업화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았고 다른쪽 끝에는 금제가 펼쳐져 있지 않았다.
제혼은 한립을 데리고 통로를 빠져나와 거대한 업화 호수 위에 도착했다.
검은 업화 호수 가장자리의 벽에는 백여 개의 통로가 연결되어 있었고, 호수 위 지하동굴 천장에는 검은 종유석들이 수정처럼 반짝이며 매달려 있었다.
반듯반듯하게 정리된 통로들은 거대 지하궁전의 일부 같았는데 뜻밖에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없었다.
“귀목이 아직까지 세혼구에는 알리지 않았나 보구나.”
“업화 통로가 붕괴되었으니 이곳을 지키는 음허 장로도 곧 알게 될 거예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산 벽의 어느 통로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얼른 제혼을 데리고 다른 통로로 들어가 은신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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