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화.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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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사이입니까?”
그 말에 한립은 기억을 뒤졌지만 눈앞의 가냘픈 소녀를 만난 기억이 없었다. 어째서인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익숙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휘릭!
소녀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고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검은 기운으로 머리에 뿔이 나고 눈이 3개 달린 거대 원숭이 허상을 불러냈다.
“제혼! 네가…….”
그걸 보고서야 한립은 눈꼬리를 꿈틀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오래 못 보기는 했나 보네요. 주인님이 저를 다 잊고요…….”
제혼이 서운한 눈빛으로 웅얼거렸다.
“그럴 리가 있더냐! 너무 놀랐을 뿐이다. 진선계에서 누군가 소환해 비승한줄로만 알았는데 어찌 회계에 있는 것이야?”
한립은 기뻐하며 물었다.
석천공, 호삼 그리고 백리염도 유락이 한립의 수갑 등을 풀어주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하다가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일단 완금뇌주(浣金雷珠)로 단전의 금제부터 풀고 실력을 회복하세요.”
제혼이 꺼낸 달걀 크기의 구슬은 뇌전 문양이 가득하고 수시로 가느다란 금빛 뇌전을 분출했다.
극양의 기운을 지닌 구슬은 벽사신뢰와 비슷하게 흉살기들을 쫓는 효과가 있었다.
“완금뇌주라면 이 안에 설마 완골금뢰(浣骨金雷)가 든 것이냐?”
“완골금뢰를 아세요? 맞아요, 그걸로 제련해 만든 구슬이라 음괄의 살뢰법칙과는 상극이에요.”
제혼이 의외라는 듯 말하고 구슬을 튕겼다. 구슬은 금빛 그림자로 변해 한립의 단전으로 흡수되었다.
쿠르릉!
단전에서 금빛 뇌전들이 튀어나와 몸을 자욱하게 덮자 한립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주인님, 선령력이 이렇게 심오할 줄은 몰랐어요. 태을경 수사와 비슷하겠는데요?”
몇 걸음 물러나 있던 제혼이 선령력을 되찾은 한립을 보고 감탄했다.
“음괄이 살뢰금제가 파훼된 것을 알아내지 않겠느냐?”
“걱정하지 마세요. 한 번에 유혼충 다섯 마리를 만드느라 본원 살기를 소모해서 폐관 수련 중이니까요.”
미소를 머금은 제혼의 말에 한립이 입에서 금색 기운을 불어냈다. 그의 몸을 빠져나온 완금뇌주는 아까보다 약간 작아져 있었다.
휙!
푸른빛으로 석천공 등 다른 이들의 감방 금제를 푼 한립은 그들을 구속하는 수갑을 잘라내 버렸다.
“일단 뇌주를 이용해 금제를 푸시지요.”
한립이 완금뇌주를 날려 보내주자 석천공이 두말하지 않고 그것을 단전에 가져다 대고 흡수시켰다.
감방을 빠져나온 호삼 등은 가부좌를 튼 석천공 옆에서 조용히 차례를 기다렸다.
“그렇지, 주인님 물건들을 돌려 드릴게요.”
제혼이 청죽봉운검과 저물법기들을 불러내자 한립은 희색을 띠며 푸른 빛으로 그것들을 거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혼,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구나.”
“우리 사이에 무슨 말씀이세요. 주인님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저도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텐데요.”
“하하, 그 이야기는 되었다. 내 의식세계 속의 유혼충은 어찌 된 것이냐?”
“유혼충은 구유족의 본명 신통이라 어떻게 하는 게 어려워요. 그래도 제가 성안에서 헛산 건 아니라 유혼충을 잠시 묶어둘 수 있는 특수한 물질을 찾아냈죠. 그걸 천음속혼단 속에 섞은 거예요.”
“그랬군. 제혼 너는 회계 태생도 아닌데 구유족들이 너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냐?”
“사정이 있어요. 당시에 영계에서 저를 소환해 진선계로 불러들인 사람이 천정의 대라경 수사였거든요.”
제혼은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차분히 답했다. 한립의 머릿속에도 제혼이 영계에서 비승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혼백을 삼키는 능력을 눈여겨보고 저를 소환한 그 사람은 그걸로 어떤 신통을 수련하려고 했고, 그 문하에서 5천여 년을 보내면서 제 수행도 금선경에 이르렀어요. 그런데 수행이 높아진 그가 삼시를 베어내려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잘라낸 시혼이 달아났는데, 그 시혼이 저를 붙들고 회계로 온 거죠.”
“그랬구나. 허나 삼시선이 회계로 오면 윤회역으로 간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구유역에 있는 것이야.”
“저를 데려온 시혼도 그리 좋은 의도로 그런 게 아니라 기회를 보아 도망쳤거든요. 나중에 구유역에 와서 구유족에 가담하게 되었고요.”
제혼은 간략하게 말했지만 한립은 그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경을 거쳐 여기까지 이르렀으리라 짐작했다.
“원래 체질이 음 속성이라 수련하기에 회계 환경이 좋더라고요. 거기다 출신도 특수하고 혼백을 삼키는 법칙도 장악하게 되어서 구유역 역주의 제자로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수련해 왔어요.”
“화가 도리어 복이 되었구나. 그래서 지금의 수행은 어떻게 되느냐?”
“역주가 신경도 많이 써주고 많은 자원을 제공해 줘서 백여 년 전에 태을경에 이르렀어요.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주인님이 어쩌다 회계로 와서 수라성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도 못 들었네요.”
제혼은 검은빛으로 태을경의 방대한 위압감을 드러냈다가 순식간에 감추었다.
“세살지를 위해 이곳에 잠입했다. 너도 감응해서 알겠지만 금선 최고봉에 이른 내가 태을경에 이르려면 반드시 세살지를 이용해 살쇠의 겁을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한립은 회계로 오게 된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다.
“세살지라면 쉽지 않을 거예요. 세살지는 세혼구 안에 있는 성지라 삼역회맹 때문에 더욱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을 거예요.”
제혼이 미간을 좁혔다. 그 말에 한립이 뭐라고 답하려는데 석천공 등이 다가왔다.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혼 수사!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제혼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주인님의 벗이니까 제게 그리 예의 차릴 것 없어요. 당신들 물건도 돌려줄게요.”
제혼은 챙겨두었던 선기와 저물법기들을 전부 불러냈다.
“감사합니다!”
석천공 등이 표정이 밝아지며 서둘러 자신의 물건들을 챙겼다.
“주인님이 한 번 내린 결정을 쉽게 번복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역주와 대부분의 대라급 존재들이 타호구 안에 있는 지금이 수라성 외곽 경계가 가장 약할 때일 거예요. 지금 수라성을 떠나겠다면 제가 데리고 나가 드리겠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서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기회를 잡기 어려울 거예요.”
제혼은 한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망설이며 말했다.
한립은 하나같이 꾀죄죄한 몰골에 부상이 가득한 호삼 등을 훑어보고 미간을 좁혔다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제 몸 상태가 그걸 허락하지도 않고요. 여러분 중에 함께할 마음이 없는 분은 그냥 떠나셔도 됩니다.”
한숨을 내쉰 한립이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제 상태가 수사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낫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가지요.”
백리염이 웃으며 답했다.
“저도 하던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습관은 없습니다.”
호삼도 호탕하게 웃으려다 내상 때문에 아픈지 배를 움켜쥐고 입을 다물었다.
“광원재는 거래해서 이익을 내는 곳입니다. 여기서 그냥 돌아가면 제가 너무 손해를 보는 장사라서요. 게다가 제가 빚은 꼭 갚아야 하는 성격입니다.”
석천공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광은 말없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소녀의 모습을 한 제혼을 보고 있었다.
“주인님이 결정하셨다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제혼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원이 많아 움직이기 어려우니 업화 구덩이에 이르기 전에는 제 동천 보물 안에 들어가 계시지요.”
한립은 손가락에서 빛을 발해 은색 빛의 문을 만들어냈다.
문이 열리고 드러난 죽루에서 짙은 천지영기가 흘러나와 호삼 등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건……옥곤루 경매에 나왔던 물건입니다. 백조산 장로가 가져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호삼이 놀라 중얼거렸다.
“그 물건은 아니고 다른 경로로 구한 겁니다. 자, 다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동천은 영기가 모이는 곳이라 선계의 어느 수련 명당 못지않을 테니 잠시 몸을 추스르세요.”
한립의 말에 마광이 먼저 죽루로 들어가고 나머지 사람들도 한립을 향해 포권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화지 동천의 금제가 개방되어 죽루가 봉인된 것을 알았지만 호삼 등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충만한 영기 속에 앉아 부상을 치료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동천을 닫은 한립이 갑자기 끙 앓자 제혼이 걱정스레 물었다. 한립은 말없이 손을 젓고 금색 단약을 복용해 혼백을 보호했다.
“괜찮으니 가자꾸나.”
잠시 후 눈을 뜬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선택이 복이 될지 화가 될지 모르는데, 주인님의 몸 상태로 견디실 수 있겠어요?”
“회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흉살기 침식도 심해지고 있다. 세살지를 찾아내지 못하면 누가 나를 죽이기 전에 살쇠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야.”
“세혼구는 구유족인들에게 무척 특별한 곳이라 구유족인이 아니면 못 들어가요. 역주의 신임을 받는데도 그를 따라서 한 번 밖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고요. 세혼구로 가려면 주인님이 가려던 길로 가야 해요.”
“업화 통로를 지나면 내부의 금제를 건드릴 것이다.”
“그건 제게 맡겨주세요. 다만 세혼구로 넘어가면 그곳 상황이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휴, 그래 상황을 보아가며 움직이는 수밖에 없겠지. 출발하자꾸나.”
“주인님,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데리고 나가드릴게요.”
제혼은 새빨간 사슬을 불러내 푹! 하고 한립의 어깨를 꿰뚫었다. 한립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을 뿐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제혼은 그를 붙들고 가는 척하며 유뢰를 벗어났다.
구유족에서 특수한 신분인 그녀를 대라경 수사들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데 일하는 유노들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심문할 수는 없었다.
오래지 않아 지하 통로를 따라 업화 구덩이 인근에 이른 그들은 연못 바깥의 입구에 괴뢰로 변한 소류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덤덤히 전방을 주시하는 소류는 손에 도끼날과 쇠구슬이 연결된 사슬이 둘둘 말려 있었고 몸에 남은 수많은 상처가 눈에 띄었다.
천정의 감찰사였던 소류에게 그리 호감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같은 선계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락 낭자가 한립을 ‘압송’하는 것을 본 소류가 두 손을 뻗어 검은 사슬에 달린 도끼날과 쇠구슬로 통로 중앙을 막았다.
미간을 좁힌 유락이 검은 흉살기가 깃든 영패를 들어 소류의 얼굴 앞에 띄웠다가 회수하고 나서야 소류는 병장기를 거두고 멍하니 물러났다.
한립과 제혼은 안으로 들어가 연못 위 다리에 아무도 없고 열화선존과 치융이 있는 철창만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한립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는 사람들이에요?”
제혼이 따라와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들 몸에 걸린 금제를 푸는 방법을 아느냐?”
한립이 고민하다 물었다.
“제게 구유령(九幽令)이 있어서 금제는 쉽게 풀 수 있어요. 하지만 업화의 흉살기에 너무 오랫동안 구워져서 이제는 거의 회선과 다름없어요. 금제를 푸는 순간 이성을 잃고 폭주할 가능성이 크고요.”
“그럼 금제는 나중에 풀고 일단 저들을 꺼내오거라.”
“그거야 쉽죠!”
제혼이 날아올라 수결을 맺은 손으로 철창의 열댓 군데를 퍽퍽 쳤다.
끼익.
철창의 주술문자들 위로 암홍색 빛이 반짝거리다 사라지고 문이 열렸다.
열화선존은 아직도 정신을 놓고 있었고 치융만이 살짝 고개를 들어 한립과 제혼을 보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아직 의식이 남아 있는 걸 압니다만 금제는 당장 풀어드릴 수 없습니다. 일어서서 스스로 나오시지요.”
무표정한 한립의 말에 치융이 침묵하다 말없이 일어나 열화선존을 부축해 걸어 나왔다.
“들어가세요. 모든 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한립은 은색 빛의 문을 불러냈다.
치융은 아직도 그가 왜 자신을 구해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열화선존을 데리고 죽루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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